그리고 1인 가구의 가전 방랑기
나는 80년대생으로, 내가 미취학 아동이었을 적 한국의 서민 경제는 한창 번성기를 맞이하던 중이었다. 30년도 훌쩍 넘은 기억을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냉장고와 컬러 텔레비전은 분명 있었다. 그다음 생긴 파란 날개 달린 선풍기도 냉장고와 마찬가지로 ‘Goldstar’ 즉 금성—지금의 LG— 제품이었다. 선풍기 전후로 세탁기가 생겼던 것 같은데 그것도 역시 같은 브랜드 제품이다. 당시 가전 시장을 평정하겠다는 것이 금성의 비즈니스 전략이었는지, 아니면 내수 시장을 타깃으로 그것밖에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삼성이 가전제품 시장에서 주부의 눈길을 끌려면 십여 년은 더 있어야 했다.
여기까지가 80년대 서민 가정의 필수 가전이고 이제부터는 옵션이다. 초등학교—실은 내가 다닌 것은 국민학교다—에 입학할 때쯤 집에 전자레인지가 생겼다. 이것은 대우 제품이었는데 당시 제일 좋다는 것은 아니어서 왠지 나는 며칠간 침울해했다. 그다음에 생긴 것은 석유 히터로, 걸프 전으로 인해 연료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는 바람에 어딘가로 석유를 조달받으러 간 기억이 있다. 다음은 너무 못생기고 시끄러워서 미워했던 진공 청소기다. 처음으로 집에 들인 삼성 제품은 당시 돈으로도 300만원이 넘었던 퍼스널 컴퓨터인데, 집안 DNA에 새겨진 허영의 유전자가 그것을 사도록 충동질했다. 지금은 벽걸이 TV부터 커피 메이커에 이르기까지 십수 가지에 달하는 가전제품을 일제히 맞춰서 신혼집에 들어가는 시대이나, 당시에는 신혼부부가 돈도 구매할 가전도 별로 없어서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정도만 갖고 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다 차례로 선풍기를 들이고, 전자레인지를 들이고 한 것도 그제야 시장에 제품이 공급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렇게 말하니 지금보다 마냥 가난하기만 했던 것 같지만 예금 금리 24%에 달하는, ‘돈이 복사가 된다고’ 시대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는 집이건만 인형의 집에 하나씩 가구를 채워 넣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너희 집에 전자레인지 있어?” “진공청소기는 있어?” 같은 유치한 질문으로 어린이들끼리 서로의 경제 수준을 가늠하던 때이기도 했다. 나는 그 질문에 번번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드디어 그게 생겼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됐을 때쯤이면 유행이 지나버려 아무도 집에 뭐가 있는지 물어봐 주지 않는, 비교적 가난한 축에 속하는 아이였는데 집안 DNA가 별안간 폭주하는 바람에 아파트 단지에서 유일하게 퍼스널 컴퓨터를 갖춘 세대의 구성원이 되고 나서는 한 방에 그 한을 풀었다. 여러모로 시대만큼은 잘 타고났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까지 두루 아우르며, 대충 헤아려도 쉰 가지는 족히 넘을 전자제품을 실컷 써봤으니까.
성인이 되어서는 가전이 필요해 샀다가 돈이 없어 도로 팔아치우는 생활이 한참 지속됐다. 더 이상 인형의 집 같은 낭만은 없었다. 내가 사는 데가 인형의 집보다 아주 약간 넓은 고시원 방이었다. 거기 처음 들여놓은 게 남에게 헐값에 얻은 랩탑으로, 지옥에서도 천국을 그리는 심정으로 매일 밤 쓰던 글이 나중에는 돈도 좀 벌어다 주고 그랬다. 드디어 고시원을 벗어나 원룸으로 갈 때 제일 먼저 전기 포트와 전자레인지를 샀다. 전자레인지는 월풀 제품으로 분과 초를 따로따로 입력하게 되어 있어 나는 아직도 ‘300’이 왜 5분이 아니라 3분인지 의아해한다. 드롱기 오븐은 겨우 3년 전에 손에 넣었다. 인덕션이든 핫플레이트든 라면 하나라도 끓여 먹을 주요 열원이 있다면 역시 전자레인지가 제1순위 주방가전이다. 그 후에는 계란 삶는 기기와 바이타믹스 정도를 들여놨다가, 내가 간 과일보다 안 간 과일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이타믹스는 산 것과 거의 유사한 가격에 팔아치웠다. 코스트코와 당근마켓 만세다.
DNA에 새겨진 물욕은 식을 줄 몰라, 최근에는 ‘깔맞춤’의 욕망이 불타올랐다. 드롱기 디스틴타 오븐은 그 시뻘건 구리색만 빼면 사이즈도 기능도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번에 민트색이 새로 출시돼 버렸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울면서 민트 색을 들이고 기존 오븐은 친구를 줬는데, 그랬더니 갖고 있는 드롱기 아이코나 빈티지 전기포트도 똑같은 민트로 바꾸고 싶어진 것이지… 내가 이렇다. 일단 사고 싶어지면 살까 말까가 아니라 언제 살까로 바로 뛰어넘는 인간이므로 고민을 길게 해봐야 헛수고다. 주전자도 친구를 주자. 내 친구들은 나를 감당하는 대가로 가끔 이런 걸 얻을 수 있다.
그밖에는 카페인 중독자의 필수품인 캡슐 커피 머신과,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원두 갈기의 귀찮음을 감당 못하고 사버린 커피콩 그라인더가 있다. 주방 가전은 아니지만 집에서 뭘 먹는 시간이 늘어 괜히 사본 물치실 기계도 있다. 디자인도 기능도 뺴어난 제품들로만 집을 채워놓는 것이 행복이다. 손님이 오면 새 가전을 열어 보고 하나하나 눌러 보게 해주면서 그걸로 뭘 만들어 주는 것이 행복이다. 최근에는 하도 요거트를 시켜먹어서 요거트 기기를 들여야 하나 고민했는데, 한 통에 8천 원씩 하는 고급 요거트 맛이 안 나면 싫다.
그런데 가전이라면 역시 80년대 미국 경제 전성기에 만들어진 크고 힘 쎄고 튼튼한 것이 좋다. 달린 것은 강도를 높이는 아날로그 다이얼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한 타이머뿐인, 겉과 속이 일치하고 작동 원리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가전 말이다.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나와 함께 나이 먹어 가면서도 나보다 더 성실하고 덜 지치는 가전이 내 생활을 지켜주면 그보다 든든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AI를 탑재하고 섬세한 플라스틱 외관을 두른 건조기 일체형 세탁기니 오븐레인지니 하는 것들은 틀어놓고 돌아서면 등 뒤에서 저들끼리 나를 속여먹을 것만 같다. 내구성도 한 세대 위 선배들보다 떨어져 생산자의 속내를 의심케 할 뿐이다. 심지어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가전들은 어느 것의 열화 카피판인 건지 뭔지 미감도 마감도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세련된 UI, 유려한 UX도 필요없으니, 직접 내 손으로 스프링이 들어간 버튼을 누르고 다이얼을 돌려 조작하는 경험과 손맛을 돌려달라. 가전의 세계에서만큼은, ‘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