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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Apr 23. 2022

冊. 계절을 누리는 사치에 관하여

모리시타 노리코, 『계절에 따라 산다』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일일시호일』의 저자 모리시타 노리코의 또 다른 에세이, 『계절에 따라 산다』를 얼마 전 읽고 어쩐지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COVID-19 후유증과 급격한 계절 변화의 영향으로 몇 주간 내리 기운이 없던 탓이다. 내친 김에 작년 초겨울 읽다 만 『작가의 계절』을 꺼내 봄 편을 읽었는데, 호리 다쓰오의 목련꽃 이야기가 또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올봄 내가 사는 곳에서는 벚꽃이 목련과 동시에 펴서 졌다. 아니, 그렇다기보단 일시에 만개한 벚꽃에 아연해 ‘목련은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언젠가 동네에서 본 목련나무를 찾아갔더니 봉오리가 막 벌어져 보기 흉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개나리 진달래 다음엔 목련 그다음엔 복사꽃과 벚꽃—이라고, 30여 년에 걸쳐 경험한 봄의 질서가 틀어졌다. ‘이제 봄꽃을 본 날이 볼 날보다 많나?’ 하고 내 나이나 실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보든 말든 지구의 태양 공전 주기에 맞춰 피던 꽃이 역시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는 피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이 전지구적 위기 앞에서 나는 여행이나 가고 싶어졌다. 지금 할 수 있는 노력과 더불어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은 실컷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남의 꿈 얘기만큼 남의 여행 얘기도 재미없는 것은, 남이 여행지에서 본 풍경도 느낀 감상도 내 것은 아닌 까닭이다. 생판 남이 타지에서 겪은 일에 공감하려면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우선 형성된 맥락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는 상태에서 다른 세계의 얘기를 들어봤자, 어쩌라고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여행 얘기를 할 것이다. 내가 계절을 ‘누렸다’라고 할 만한 체험을 여행 가서밖에 못 해봤기 때문이다. 2019년 이래 계절에 관한 나의 경험은 ‘덥다’(여름)-‘좋다’(가을)-‘춥다’(겨울)-‘우울하다’(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산다』가 새삼 일깨운 계절감은 초여름 날씨에 피었다가 진 벚꽃 때문에 당혹감을 맛보았을 따름이다.



 『계절에 따라 산다』는 40년간 다도를 배운 저자가 차를 우리고 마시는 시간에 더욱 예리해지는 계절감, 이에 따른 마음과 생활의 변화를 그저 써 내려간 책이다. 저자는 새해 첫 다회에서 대접받은 화과자에, 춘분에 도코노마 위에 걸린 족자봉에 자연과 삶의 진리가 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시간을 못 낼 것도 없는데 어떤 것을 40년은커녕 4개월 간만이라도 꾸준히 배우는 끈기가 없는 탓에 나는 그만 자연과 삶의 진리를 발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20대에도, 30대에도 쫓기듯 사느라 일일이 멈춰 서서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매일이 먹고살기 바쁜 나날, 서울은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곳—같은 처지인 데다, 아름다운 것은 구질구질한 것과 함께 두고 싶지 않다는 나의 고질적 미학 때문에 ‘계절’은 날씨의 변화와는 별개의 사건이었다.



해서 그 별개의 사건은 생활의 터전이 아닌 곳에서만 일어났다.

내게 봄은 산넨자카 계단 위로 드리워진 벚꽃, 덴류지에 만개한 이름 모를 꽃들, 카모가와 위를 스치는 미풍이다. 여름은 아라시야마 치쿠린의 시끄러운 바람 소리, 얼음에 맛차를 끼얹은 빙수, 우에시마 커피의 아이스 밀크 커피다. 가을은 사가노의 단풍, 맨발에 스며드는 에이칸도 사원 마루의 서늘함이다. 겨울은 이르게 해가 진 오타루 운하의 고요하고 쓸쓸한 눈길이다. 노천 온천에 담근 몸 위로 떨어지던 눈송이다.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곳, 역병의 시대에는 갈 수도 없는 곳에서만 계절을 느껴왔다니 사치스럽기 짝이 없다. 분에 넘치는 짓이다. 앞으로 몇 년이다 더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벚꽃을 실컷 즐기듯, 몇 번이나 누릴 수 있을지 모를 사치를 내 분수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실컷 누렸으니 후회는 없다. 어쩌면 분수의 허용치를 좀 넘었을 수도 있다. 하여도 봄다운 봄, 여름다운 여름, 가을다운 가을, 겨울다운 겨울을 손가락 가득 꼽을 만큼 보았다. 유감이 있다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아쉬움 정도다.



더구나  아쉬움은 이제 나의 사정에만 달려 있지 않다. 계절의 경계마저 옅어져 꽃도 녹음도 단풍도 눈도 언제까지고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태어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 문제를 1순위 삼을 생활의 구차함이라든지, 전지구적 위기라든지, 팬데믹을 탓할 것은  된다. 내가 계절에 따라   없다면 그것은 역시 끈기가 없어 20년이고 40년이고 다도 같은 훌륭한 취미를 익히지 못해서이리라.


좋은 것, 좋을 때를 실컷 누리고 그 기억을 소중히 하자는 다짐이 근래에는 특별히 가슴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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