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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Jun 09. 2022

冊. 실패자를 위한 위안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와 『고립의 시대』

최근 나의 회의주의를 자극하는 책을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고립의 시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읽었다.  번째 책은 심히 강렬하여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권의 책을 통해 내게 결여된 것과 무기력의 원인에 대한 유력한 가설을 세울  있었다. 더불어 “그래, 이게   잘못이 아니라니깐?” 재차 확인한 것이 독서를 통해 얻은 소기의 성과였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는 어린 시절의 신체적/정신적 학대 및 방치가, 성인이 된 후에도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한 건강 이슈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한 소아과 의사가 데이터와 직관에 근거해 입증하는 책이다. 불행한 어린이는 불행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커서도 여전히 불행한 어른이 된다. 거기 더해 이 책의 저자는 불행한 어린이가 두뇌 기능이 아직 제기능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유독성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호르몬과 염기서열에 반영구적 손상을 입어 수십 년 후 자가면역질환이나 뇌졸중,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책에서는 이 불행을 정량화한 지표로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지수라는 것을 제시하는데, 이 ACE 지수가 높을수록 성인기에 중병에 걸릴 가능성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이런데도 어떤 부모들은 자기가 책임지지도 못할 어린이를 계속 생산해야만 하는가? 국가가 세수를 위해 인구의 양을 그저 늘리기만 하는 것이 공리에 기여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정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에 아주 명쾌하게 제시되어 있다. 나의 ACE 지수는 10점 만점 중 5점이었다.


불행한 어린이가 어쩌다 무사히 성인이 되었어도 건강하게 살아남기는 요원한 방식으로 현대사회는 발전하고 있다.  『고립의 시대』는 ‘외로움’이라는 개념을 단순한 정서적 고독을 넘어 사회적 고립감과 연결시키며, 이 고립감이 개인의 삶과 지역사회를 어떻게 망치는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다. 특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스마트 기술과 일터와 도시가 개인을 어떤 식으로 배제하는지 잘 나와 있다. 미국 경제학자가 쓴 최신간인데 부정적인 사례마다 어쩜 한국이 빠지지 않는다. 예상은 했지만, 내가 이토록 무기력하고 피곤한 게 역시 내 탓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나는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은 자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어 있는 바로 그 운명을 맞이하는 중이다. “그것은 젊어서 앞날을 헤아리지 못한 너의 탓이다”라고 나를 비난할 사람이 있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타인의 삶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짜고짜 극딜을 박는 것보다야 나 하나의 앞날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도덕적인 선택을 한 입장으로 변명을 하자면, 내가 인생의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데 꼭 필요한 계획성이나 self-discipline 이 결여된 인간인가 하면 오히려 그 반대다.

이를테면 나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어떤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최적의 계획을 척척 세워 실행하고 기일 내에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무리 중에 ‘탁월한 실행력을 갖춰 믿고 일을 맡길 자’로도 손색이 없어 여행 계획부터 행사 기획까지 못 해내는 게 없다. 그런데도 내 인생의 장기 계확에 이르면 의욕 같은 것은 싹 사라지고 만다. 먼 미래에 대한 건설적 희망 따위를 품어본 적도 없다. 요컨대 장기 계획의 또 다른 필수 조건, ‘전망’이 내게는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타고났다고 여겨온 저 성실함과 책임감도, 내가 남달리 유능하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어떻게든 할 일을 빨리 끝내고 내적 평화를 찾고 싶은 몸부림의 부산물에 불과하겠다는 의심마저 든다.


ACE 지수 5에 달하는 어린이였을 때부터 나는 장례를 치러줄 이 하나 없을 나의 죽음과 궁핍하고 쓸쓸한 말년을 무심코 예감했다. 그게 불과 대여섯 살 무렵이었으므로, 그 예감이란 것도 불우한 아동기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나이가 되어서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왔다. 이 결여된 전망이 장기간에 걸쳐 나의 장기 계획 수립을 막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1인 가구 세대주의 필수 덕목인 경계심조차도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고립의 시대』,에 따르면 이 경계심은 크롬이 CPU 사용량을 잡아먹듯 내 전전두피질의 가용 리소스를 야금야금 갉아먹어 판단력과 조절 능력을 손상시킨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레토릭이 그토록 못마땅하게 들린 데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수시로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생존이 가능한 사람이 만인에게 상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근래에 나는 무기력하여 돈을 벌기 위한 일도 생존 활동도 인간관계도 성가시기 짝이 없고 오로지 책과, 나약한 도시인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잘 손질된 자연만을 벗삼아 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에 사로잡혔다. 마음만 사로잡혔을 뿐 당연히 몸까지 거기 맡기지는 못하였다. 해서 어쩔 수 없이 돈도 벌고 생존 활동도 하고 인간관계도 지지부진하게 이어 가되, ‘인생의 장기 계획에는 일찌감치 실패했고, 조만간 인류는 전 지구적 환경과 식량 위기를 동시에 맞닥뜨릴 것이고, 내가 운 좋게 약간이라도 누렸던 호사를 다시는 누리지 못하게 되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도리어 차분하게 이 상황을 관조할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추억보다 더 아름다운 순간은 내 삶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마냥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스스로 정하는 사치 따위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나는 『작은 아씨들』의 에이미와 같이, 내 손에 쥔 이 빈약한 것들로 별볼일 없는 삶을 예쁘게 꾸미는 일에 질릴 정도로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이 손에 남은 것이 설사 빈약하여도 쓸모없지는 않다는 사실도 적잖은 위안이 된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에서 나는 나의 처참한 ACE 지수와 완치 불가능한 질병에 걸릴 높은 가능성만을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사실 한 소아과 의사의 무모한 도전—‘지역사회의 모든 불행한 아동과 그 가족을 구제해 미국 전역의 건강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겠다’—을 감명 깊고도 유머러스하게 다룬 인류애의 역작이기도 하다. ‘운이 나빠서 불우한 아동기를 보냈기 때문에 당신은 언젠가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라는 선고를 받고도 이 책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나의 섬세한 감수성과 지성은 내가 평생에 걸쳐 나름대로 갈고닦아온 것이다. 그러면 40년간 이룬 것이 뭐라도 있기는 하다.  그로 인해 인생의 부조리함을 더욱 민감하게 느끼고 속속들이 이해하는 바람에 손해가 더 큰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마는, 그래도 남은 별볼일 없는 삶을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바랄 뿐이다. 그게 어렵다면 평화로운 죽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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