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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우 Jun 26. 2023

꿀 직장. 약인가? 독인가??

힘들어지면 2022년 가로등 불빛아래 과일 팔 때 생각하자.

아프니까 사장이다 커뮤니티 ; 슬기로운 신용회복기 연재글입니다.



장사를 접고 모든 것을 잃고 나니 정말 할 수 있는 게 몇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와이프랑 노점에서 과일을 한동한 팔았습니다. 한 6개월 정도 했었는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니 과일이 안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점이 작년 수능시험일 정도로 기억합니다. 경매장에서 노점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수소문한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막일 다니거나 붕어빵. 군고구마 한다는 분들도 계셨고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그냥 쉬신다고 하시더군요. 


이데로 가다간 손가락 빨다가 굶어 죽겠다 싶어서 빠른 태세 전환을 합니다. 중고로 산 15년 된 1톤 트럭을 200만 원 헐값에 팔고 한 달을 버티면서 급하게 아르바이트라도 구하려고 구인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땅히 기술도 없고, 나이도 마흔이 훌쩍 넘으니 300만 원 정도 벌려면 택배 상하차나 공장 가서 2교대 라인 타는 방법뿐이었습니다.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힘쓰면서 돈 벌면 병원비가 더 나가는 유리몸이기도 합니다. 집 가까운 곳에 택배허브도 공장도 없어서 출퇴근 시간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 막일 갔다가 손가락만 크게 다치고 옴



'고급 아파트 경비, 보안 요원 모집, 40대 이하'


최대한 시간은 길고, 힘은 덜 드는 그리고 출퇴근이 용이한. 급여는 최저시급 이상은 주겠지 생각하고 지원을 했습니다. 3일 정도 지났을까요.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면접내용은 이렇습니다.


1. 사업 망했습니다. 

2. 초등학생 애가 둘이 있습니다.

3. 빚이 많습니다.

4. 한번 살려주세요.


면접관은 아마도 제가 진득하게 붙어있을 거란 생각을 했는지 4일간의 경비교육을 이수하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작년급여는 세전 274만 원 / 2023년은 289만 원 측정되었습니다. 일이 다급했기에 근무환경이나 조건을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일을 시작한 첫 달.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본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인데(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로비에 자리 지키고 있는 일입니다.) 근무시간이 너무 긴 게 문제였습니다. 



격일 야간근무이고 대략 스케줄은 이렇습니다.


화: 오후5시 출근(15시간근무 휴게2시간)

수: 오전8시 퇴근(33시간 귀가휴식)

목: 오후5시 출근(15시간근무 휴게2시간)

금: 오전8시 퇴근(24시간 귀가휴식)

토: 오전8시 출근(24시간 근무 휴게3시간)

일: 오전8시 퇴근(33시간 귀가휴식)

월: 오후5시 출근(15시간근무 휴게2시간)


평일은 할만한데 주말이 되면 24시간 근무를 하루 해야 합니다. 저는 원래 야행성이라 밤을 새우는 것에는 어렵지 않은데 주말 24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정말 정신병 오는 듯했습니다. 남들이 일하는 8시간이면 이제 3분의 1 일한 것이었고 아침 8시에 출근을 하고 밤 8시가 되면 딱 절반 일한 셈입니다. 대신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한번 출근이 2회 출근 수준이어서 한 달에 14번~15번 출근을 합니다. 야간 수당이 있기 때문에 낮과 밤을 평균시급으로 계산하면 12,000 원 정도 되었습니다. 월간 근무시간은 230시간 정도이며 주당으로 52시간쯤 됩니다.(휴게시간 제외)



첫 달은 지루한 시간을 못 견뎌서 새벽이 폰게임을 했었습니다. 삼국지를 5번 정도 통일 시켰습니다.


중학생때 하던 게임을 다시 하게 되었네요



드라마 정주행도 해보고 유튜브도 실컷 봤습니다. 한 달쯤 하니까 이것 또한 못할 짓이더군요. 인생을 팔아서, 내 영혼을 팔아서 돈으로 환전한다는 느낌일까요? 크게 비전도 없고 진급도 없고 최저시급 올라가면 같이 조금씩 올라가는 급여 수준과 1년 단위 계약직이라는 불안정한 직장이라 정도 딱히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급하게 들어와서 다른데 구할 때까지 잠시 있다 가자고 마음을 먹다가 킬링타임을 그만두고 근무시간을 활용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자격증 공부를 해볼까 다른 곳 취업준비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청소하신 이모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여기 근무하는 삼촌들은 다 그랬어~"


"첫 달은 몸을 베베 꼬면서 괴로워하다가, 둘째 달은 공인중개사 같은 책을 가지고 오더니 꾸벅꾸벅 졸다가, 셋째 달은 유튜브만 몇 시간씩 보더니 그것도 지겨운지 멍 때리다가, 넷째 달 때쯤 되면 이건 아닌 거 같다며 다른 직장 알아본다고 그만둬~"



코스를 들어보니 저도 별반 다르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공인중개사 책이라도 들고 왔으면 그대로 그 코스로 갈까 봐 저는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1. 일기 쓰기

2. 1시간 정도 책 읽기 (오래 보면 잠 오니까)

3. 글쓰기 이것저것

4. 투잡 알아보기 (현재는 투잡 중이죠)

5. 로비 복도 걷기 (오리 스쿠루지 영감처럼 8자로 걷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빨리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로비가 이제는 제 집무실 같은 느낌입니다. 오히려 집보다 편할 때도 있고요. 그렇게 벌써 8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투잡, 금연이라는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그다음 목표를 정하지 않았기에 최근 다시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입니다. 언젠가 다시 사업을 하게 되면 영업과 마케팅에 대해서 필요할까 봐 관련 책을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돈을 벌면서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게 지금은 저에게 꿀 직장임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참 게으른 사람입니다. 몸이 편하려고 잔머리를 쓰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 마흔이 넘어서 배웠습니다. 꾸준하게 하기만 해도 절반이상 간다는 걸요. 아파트 경비 그만두면 아마도 글 쓰는 것도, 일기도 안 쓰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부지런하게 하게 되는 것들이 생겼습니다. 출근만 하면 월급도 들어오고 혼자 사색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사업구상도 하고 책도 보고 글도 씁니다. 가끔 외국인 입주민과 프리토킹하는 시간도 갖습니다. ㅎㅎ


처음에는 일이 쉬워서 꿀이었다가,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고쳐 먹으니 로열젤리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조금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생각하고 활용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지나고 나면 가로등 밑에서 노점과일 팔던 시절. 아파트 로비에서 경비시절. 모두 피와 살이 되겠지요. 근무시간이 길긴 하지만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나름 괜찮은 직장이구나 생각도 듭니다. 20대~30대 친구들은 아파트 경비라는 직장이 주위 보는 시선이 있어서인지 정말 빨리 그만둡니다... 제가 20대 때 이렇게 돈 벌면서 시간 활용을 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도 참 철이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조금은 알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죠!!




이은우


10년간 회사생활 후 7년간 자영업자

코로나 이후 폐업 / 신용회복 2년 차

슬기로운 신용회복기 극복 에세이

아프니까 사장이다 커뮤니티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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