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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안암(安岩)

#48. 인간의 폭력성.

by 장재현입니다

난 윤석열 씨의 국정운영과 계엄까지 가게 된 그 판단에 억만 분의 1도 찬성하지 않는다.

정치적 중립성을 억지로 지키려는 노력 따위 안 한다.

누군가의 눈엔 좌빨 성향의 깨인 척하는 위선자일테다.

물론 내가 옳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나의 사고방식에 타인이 맞출 필욘 없다.

내겐 그게 사회주의 적 사고방식이라 생각하는 지점에 있다.

상식? 통용되는 요소를 가져야 하나 다수의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 틀렸다는 기준이 될 순 없다. 각자의 정의를 관철하고 그에 맞게 지향점을 찾아가면 되지만, 그 과정에서 합의한 기준에 맞게 진행할 필요가 있는 일들이 있다.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앞선 세대가 끊임없이 합의점을 구성하여, 나라라는 유형적이면서도, 무형적인 합의체가 시대에 맞게 변화하게 되더라도, 기준을 가져야만 대한민국이란 정체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 시대에 맞게 변화한다는 건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을 투영하므로, 그 지지율은 시대의 생각을 반영하기도 한다.


정치 문제를 먼 나라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주변인들에게 가지는 정치적 요소를 반영하기도 한다. 사내정치, 정치한다는 말이 부정적 언어의 행태를 갖춰 좋은 이미지가 아니지만, 사람관계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가 정치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라 부르는 그 관계 역시 정치적 요소라는 말이다.

해서, 정치가 가장 먼저 해결하려고 했던 게 폭력적 요소다.

국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약자를 보호하고, 구성원을 이루는 것을 파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 중 어떤 것들을 통제할 것인가는 함무라비 법전이나 십계에서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올바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을 파괴하는 요소를 통제한 것이다.

파괴적 특성을 지닌 폭력성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더 큰 폭력에 대응할 수 없고,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집단의 규모를 성장시킬 수 없으니까.


정말 의외의 것이 있다면, 나는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인간의 본성은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 복잡한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어, 폭력성이나 이타성은 본성의 단면일 뿐이다.

해서 그 사람을 나는 다 알고 있다 믿는 건 정말 오만하고 섣부른 판단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이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답 역시 변할 수 없다 일 순 없다.


그 사람이 가진 경험의 방향에 따라 어떤 단면이 특수성을 가지고 넓은 면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이를테면 폭력성일 수 있고, 그에 적응하기 위해 순응력이 커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집단을 구성하는 것에 단점인 면은 통제하도록 노력하고, 장점인 면을 확장시키기 위한 경험을 쥐어줄 순 있지 않은가? 그걸 받아들일지는 물론 본인 선택이지만.


더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일수록 폭력성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저 사람과 나만의 문제였던 그 일들은, 권한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정부가 계엄을 선언하고 시민에게 폭력을 쓰려다 실패한 일이 그렇다.
실제로 윤석열은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했을 테다.
민주당의 의회 폭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아마 진심으로 믿었을 거다. 그게 정의라고.
동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치하고, 그게 그의 정의일 테다.
성공했다면 그를 상식적이지 않다 말했던 사람들의 상식이 매몰되고, 그의 상식이 상식인 사회가 왔겠지. 무엇이 옳으냐에 답할 수 없다. 각자의 옳음이 있을 테니.


그 기준들을 가지고 주변을 돌아본다. 사회에 드러낼 수 없는 폭력성을 잔뜩 담은 댓글들, 각자의 정의에 맞게 타인을 재단하려는 단층적 경험의 잣대가 곳곳에 숨어있는 폭언들. 그 단면적인 요소로 모든 일을 자신의 기준에 맞게 비난하는 이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통제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통제하려 하는 정의들.


시스템을 파괴하려 한다는 것에 대응하여 시스템을 파괴시키려 한다.

글을 쓰면서도 아이러니 한 건, 통제되지 않는 권한을 행사하는 건 이미 그 자신이 시스템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파괴된 시스템을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신이 보지 못한 다양성을 인정치 않고, 비난적 요소를 가진다.

그 상황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논리적임을 중시하는 이들도 그게 중요하지 않아 진 자신을 마주한다.

통제력을 잃은 정의는 폭력이다.


좁혀 보기로 했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답이 없단다.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 방법 역시 위정자의 경험에 따라 가짓수를 달리한다.

묻는다.

답이 내게 없는 거냐, 답이 그에게 없는 거냐?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한다.

모두가 각자 생각을 통해, 자신의 정의를 위해 정해진 기준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의를 관철한다.

다시 묻는다.

답이 내게 없는 건 아닌가?

그가 자신의 경험에서만 그 일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여 답을 찾지 못했듯,

너도 똑같은 행동을 한 건 아닌가?

자신이 가진 폭력성을 합리화시키진 않았나?

이런저런 이유를 붙였지만 결국 본인의 폭력성을 통제하지 못한 거 아닌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도 묻는다.

본인의 피해자로 만드는 그 합리성은, 어떤 기준에 맞게 부여되었는가?

실패할 순 있지만, 분석도 필요하지만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건 자랑이 아니다.

적응하지 못한 것에 고작 버텨내는 게 전부라고 말하는 것도 잘한 건 아니다.

방법을 여러 가지 알려줬지만, 실행하지 않은 건 본인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다면 그가 한 말과 같은 이유지 않은가.

어떻게 본인의 이야기는 합리성을 가지고, 그의 이야기는 합리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폭력에 피해자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은 작은 크기라 괜찮은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정치를 알려주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향점을 가지고 방향을 지시하며, 그 방향으로 함께 가기 위해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키고,

가야 할 목적성을 설득하고 조율해 나가는 것. 그게 사람 사이의 정치가 가질 역할이다.


정치를 하길 바랐다. 적어도 폭력성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이해했으면 했다.

목적을 설득하고, 지향점을 가리키고, 그 설득이 설득력을 가질 방식을, 자신이 설득되어 온 과정을 톺아보기도 하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 개개인의 삶이 가진 가치를 이해하길 바랐다.

조급하지 않게,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정치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게 선배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 생각했다.

시간의 단면을 살아야 하는 다면체인 인간의 어떤 면을 강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건 그 경험을 먼저 쌓았던 사람들이니까. 그게 선배잖아.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여전히 위를 보면서도 아래를 보듬기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를 똥꾸멍으로 처먹었냐"는, 그간 쌓은 경험의 양과 나이가 비례한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의 실망이기도 하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감을 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들 시간의 흐름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편안한 그 자리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 자리가 자신들이 욕하던 나이 든 사람들의 자리인 줄은 모르고 말이다.

멈춰있는 것 같겠지만, 본인 빼곤 모든 게 다 흘러간다.


윤석열은 기능적 특수성을 가졌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직업을 평생 동안 가졌다.

통제되지 않는 정의를 보여줄 때가 있었지만, 지지를 받으면서 권한 행사에 설득력을 가졌다.

하나 정치를 못했다. 세상은 정반합으로 이뤄져 있어, 이권을 몰아준다는 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긴다는 뜻이다. 권력자로 이권을 챙기는 행위는 타인을 설득하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고, 그 결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폭력이다.

그가 위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은 국가적 폭력이 되었다.

권한을 통제하지 않음으로써, 주변인에게 폭언을 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쿠데타로 진행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의 시기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그가 정치를 귀찮아하고, 사소하게 치부해 버린 과정을 우리는 2년 반 동안 목격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이기에 정치를 훼손하고자 했다.

합의된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정의를 기준으로 말이다.


자신의 잘못을 환경적 요소로 치부해 버린 결과 역시 목격했다.

자신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민주당 때문이란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지만, 분명 종교적 관념까지 치달은 깨지지 않는 자신만의 정의가 있으리라.


주변을 너무 단면으로만 구성해서 보고 있진 않을까?

나는 끊임없이 요청하고 설득한다.

경쟁심으로 치환하지 않는 폭력성은, 그저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시킬 뿐이며, 목적달성을 위한 효율성 또한 지니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통제되지 않는 폭력성은 그저 스스로를 경쟁력 없는 사회구성원으로 만드는 증거가 될 뿐이다.

청교도적 관념으로 스스로 깨끗하고 통제된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을 강요하는 것 역시 일종의 폭력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의를 설득하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 설득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은 생각들 많이 하는 거 이해한다.

그리고 내 대답은,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폭력성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제하여 스스로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끝내 빛을 발할 거라 믿는다.

이상적으로 치부하며 도망가겠다면 말리지 않는다.

그 말이 맞대도, 이상을 지향하지 않는 조직에게 미래가 있는가?

미래는, 그 단어 자체로 이상이 아닌가?

현실에 발을 디뎌 그 위치를 이해하고, 지향점을 향해 차곡차곡 나아가야 한다.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당연하단 듯 치부하는 네가 발을 닿고 있는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지 마라.

일을 잘하고 있다는 건 그저 기능적인 구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인간은 사람 인자와 사이 간자를 사용한다.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알고 있는, 우리는 사람 사이에 존재해야만 오롯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거시적 관점에서 현재 겪는 모든 일은 과정일 뿐이다.

어떤 목적성을 지니든 부정적인 방법을 합리화시킬 순 없다.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작은 요소조차 해결할 수 없는.

공적요소로 사적관점을 짓밟지 말자. 우리는 모두 사적인 삶을 살고 있다.

공적 요소는 사적인 시간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걸 인지 못하면 리더는 리딩할 수 없다.

나와 함께해야 하는 사람 대다수에게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마음에 안 들면 갈고 새로 사람 뽑으면 되지 않는가?

부디 계산해 보길 바란다. 그들이 우리를 인지하고, 지원을 하고, 적응을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인지하고 매력을 느낄 거라 판단하면 자의식 과잉이고,

그 수가 높다 믿으면 계산 착오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B급 리더에겐 B보다 높은 직원은 들어오지 않으므로,

우리는 진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진보의 개념은 확장성이므로, 지금 가진 가치관에 더해질 가치관의 확장을 가져야 성장할 수 있음을 믿는 것.

질문하고, 설득하며, 지향점을 지시할 방향을 이해하는 것.

폭력성을 통제하는 사회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능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

현재 본인의 판단이 때로 대통령실의 그의 판단과 다른가 고민해야 한다.

권한의 크기가 다를 뿐,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지록위마를 꿈꿨던 그의 어리석음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진 않은지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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