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영화

24년 4월 7일

by 레톤

생일 축하해.


그해의 네가 선물로 사 온 건 로즈마리 화분.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아니었던 나는 그걸 스터디 카페 사물함에서 키웠다. 매일 아침 7시마다 화분을 사물함에서 꺼내 볕 좋은 곳에 올려두고, 종일 공부를 하며 틈틈이 살펴보다 가끔씩 물도 주고. 집으로 향하기 전에는 다시 네모난 어둠 속으로 들여놓는 삶. 최대한 늦게까지 버티고 버티다 집에 가기 전, 사물함 앞에 쪼그려 앉을 때면 어쩐지 두 손을 모으게 되었다. 제발 내일 아침에도 잎사귀가 살아있게 해 주세요. 하얀 솜털들이 고개를 숙이지 않게 해 주세요.


내 불안을 먹고 자란 로즈마리는 짧다면 짧게 길다면 길게 살아남았다. 두 달 정도 버텼던가? 하나뿐인 집이 너무 좁았지. 미안해.


로즈마리의 안부를 전하자 너는 픽 웃더니 말했다. 선인장을 사 줄 걸 그랬네, 미안. 나는 가끔씩 네가 대체 왜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럴 때면 너는 신경 치료를 받은 열한 살 때 내 손을 잡아주던 치위생사 같아. 어떡해, 많이 아프죠. 내가 미안해요, 괜찮아요? 왜 사과는 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몫일까.


내 인생의 생일 중 절반이 넘는 횟수를 네가 챙겨줬어.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초등학생 때 학교 뒤 텃밭에서였나. 너는 방울토마토에 나는 봉선화꽃에 물을 주는 동안 말했던 것 같아. 내 생일은 외우기 쉬워. 죽을 사(4)에 럭키 세븐(7). 검지 손가락으로 허공에 숫자를 그리자 너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왜 손바닥만 한 구역만 피해서 물을 뿌리는지 물었지.


저기에는 내가 관을 묻어놨거든.


과학 실험 때 쓴 부레옥잠이랑 알로에. 쓰레기통에 버리기는 좀 그래서 천으로 덮은 채 묻어줬어. 흙을 같이 파 준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걔랑은 일 년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묵념하려고.


쓸데없는 연민과 불완전한 용기가 만들어낸 기념일.

딱 두 사람만 잊어버리기로 새끼손가락 걸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애도.

일 년 뒤 그 애는 과연 우리의 약속을 지켰을까? 나는 끝내 그곳에 가지 않았거든. 그런 연민을 진지하게 믿던 나이는 금방 지나가더라고.


방금 네 생일이 지나갔어.

뭐?

앞 차 번호판 숫자가 네 생일이었어.

아.


지금의 내가 믿을만한 건 너의 시시한 말장난인가. 사실 나는 내 생일에게 질려버렸어. 수없이 많은 비밀번호에 제일 무난하게 집어넣는 숫자 배열인데 그럴 만도 하잖아. 그래서 일부러라도 잘 쓰지 않는데. 너는 왜 마주칠 때마다 하나하나 반가워하는지.


너한테 받은 생일 선물은 죄다 특이했던 것 같아. 초콜릿 상자를 열자 우르르 쏟아지던 종이학 500마리. 오렌지맛 츄파춥스만 모아서 만든 꽃다발. 하지만 가장 마지막 생일에 너는 대중적인 명품 브랜드의 립밤을 내밀었고 내가 너에게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지. 과장되게 립밤을 네 눈앞에 흔들어 보이면 너는 케이스에 각인된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물었어. 올해 생일에는 뭐 받고 싶은 거 없냐고.


나 심야영화가 보고 싶어.

대단한 일탈도 아닌데 굳이 싶어서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잠을 참으려 노력해야 하는 시간에 굳이, 막차도 끊길 시간에 정말 굳이. 그래서 한 번쯤은 자정이 넘어간 시간에 팝콘을 먹고, 가로등 불빛에 키가 자란 그림자로 장난도 치고, 24시간 카페에서 밤을 샌 다음 첫차를 타고 양재 꽃시장에 가고 싶어. 거기서 푸른색 꽃을 한 묶음 사고 아침에 맥모닝을 먹은 뒤 헤어지는 것까지.


나는 대단하지도 유명하지도 않아서 그런 새벽을 보낸 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겠지만 내 기억에는 아주 오래 남을 것 같아. 모의고사를 망친 날 너랑 교실 맨 뒷자리에서 숨죽이고 보던 타이타닉같이.


그 로즈마리는 대체 언제 쓰러졌을까? 사실은 내가 발견하기 전날 밤이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날 새벽,

어쩌면 그 사이의 자정.

그 시간을 지날 때 옆에서 지켜봐 주었다면 그것도 영화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로즈마리가 두 달간 세상을 살다 간 사실을 우리 둘밖에 모르는 게 조금은 안타까워.


그리고 가끔씩 무서워. 너랑 나는 너무 오랫동안 서로에게만 서로였잖아. 한 명이라도 잃어버리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반쪽짜리 추억들이 참 많은데 말이지. 응급 구조 훈련을 받는 네 비상 연락망에 내 번호가 있다는 게 기쁘지만, 영원히 전화를 받을 일은 없으면 좋겠어. 정말, 혹시라도 전화가 온다면 늘상 무음 모드인 내 휴대폰이 재깍 기지개를 켜 주기를.


우리의 오늘에는 너랑 나밖에 없는데

네가 사라지면 나는 누구를 붙잡고 울어야 할지.


가만가만 듣던 너는 그러면 올해는 영화를 예매할까, 하고 묻는다. 이번은 말고 다음에. 내 변덕에 익숙하다는 듯이 달랑이며 살짝 숙여진 고개가 이어서 말한다. 앞으로는 아예 생일선물을 소원권으로 줄게. 올해에는 뭐 해줄까?


나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라.

굳이 선물을 걸지 않아도 들어줄법한 부탁.

이렇게 네가 쥐여준 소원을 무효표로 만들어버리지.


살아있는 건 좀 나중에 받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