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들리는

25년 12월 23일

by 레톤

#1

구차한 변명들은 대체로 ‘있잖아‘라는 짧은 심호흡으로 시작된다. ’아‘로 시작하는 단어는 분명 무수히 많은데 그 끝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는 늘 잘 모르겠어.


아하.

아 이게 아닌가.

아프지 마.

아직도 마음에 안 들어?

아이 아침 아늑 아련 아슬 아득 아람 아삭 아담......


네 이름이라는 제일 쉬운 선택지를 피해 다니다 보면 나는 끝말잇기에서 그 누구도 이겨볼 수 없었다.


있잖아 나는 출석을 부를 때 내 이름만 알아듣지 못하는 병이 있어 그래서 어딜 가든 내 앞뒤 사람의 이름부터 외우거든 그 사이에 내 자리를 자연스레 끼워 맞출 수 있도록

그래서 사실 네 이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최선을 다해 모르고 싶었을 뿐이지.


#2

지난 겨울 대전에 갔을 때 역에서 네일 케어 서비스를 받았다. 손을 워낙 험하게 쓰는 편이라 손톱은 한 번도 꾸며본 적이 없는데, 모양을 다듬고 큐티클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깔끔해졌다. 그날 내 손을 담당해 주신 분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분이셨고,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종이에 적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손끝과 손가락이 맞닿은 채 적막하게 흘러간 30분. 손을 쓰는 동안에는 수화도 하지 못하니까, 말을 함께 다물게 되는 기묘한 침묵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편안했으나 그분께는 답답했을까 싶어 감사하다는 인사는 꼭 수화로 하자고 다짐했다. 자리를 정리하시는 동안 급하게 동작을 검색해 보고, 손등 위에 손날을 얹어 가볍게 두드렸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왼손이랑 오른손이 바뀐 건 아닐까. 나는 왜 기차에서 미리 찾아볼 생각을 못 했지? 내 표정이 어설프게 무너지는 동안, 그분은 종이학이 날개를 펼치듯 서서히 활짝 웃어주셨다. 내 손을 잡고 가볍게 방향을 뒤집어 자세를 고쳐주신 덕분에 나 역시도 혼란을 지우고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느리게 움직이는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감, 사 합, 니 다.


역 밖으로 나오자 옅은 눈이 조용히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 비보다 다정한 이유는 아무런 소리 없이 다가온다는 점에 있겠지. 그날의 여행도 그렇게 시작될 것 같았다.


#3

밴드부를 처음 시작할 당시 나는 드럼을 배운 지 3개월밖에 안 된 실력으로 다짜고짜 합류했다. 박자의 중심이 되는 악기가 드럼인데, 당연하게도 초보자의 감각은 위태로웠기에 믿음직한 소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꽤 괜찮은 수준의 합주가 이어졌던 건 다른 부원들의 실력이 모두 출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의 리더는 내가 자꾸만 틀려도 지적하기보다 조용히 메트로놈을 켜주는 사람이었다. 드럼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날은 딱 하루 있었는데, 아마 그만큼 내 연주가 형편없었다는 뜻이겠지. 박자 속에서 길을 잃고 멍하니 스틱을 만지작거리자 그는 노래를 들으면서 치면 좀 나으려나, 하고 에어팟 한쪽을 나와 나눠 끼며 말했다.


그냥 너 치고 싶은 대로 쳐.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같이 듣고 있으니까. 안 맞으면 내가 노래 부를 테니까.


드럼 소리에 묻힐까 봐 최대로 키워놓은 볼륨 속에서, 나는 다른 악기들은 무시한 채 자유롭게 드럼 스틱을 휘둘렀다. 평소에는 늘 음원을 들으며 연습했기에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전체적인 합이 맞지 않을 때면 그가 중간중간 나에게 맞추어 노래를 불러주는 목소리가 에어팟을 넘어 파고들었다. 자기가 보컬도 아니면서. 본인도 연주해야 할 악기가 있으면서. 나의 박자는 점차 단정해졌고 그제야 일정한 반복의 궤도 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몇 번의 연습이 끝나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수고했다고 나머지 에어팟 한쪽을 돌려주었다. 그를 리더라고 부를 때마다 진심이 담겨 있었던 건 이런 면들 때문이었다. 언제나 쾌활하고 섬세하고, 그렇게 눈치챈 걸 행동으로 고민 없이 옮기는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나도 다 알아. 중간중간 따가운 귀를 만지며 인상 쓰는 거 다 보여. 그 표정을 금세 지우고 일부러 더 밝게 웃는 거 모르지 않아.


그가 남들에게 절대로 뒷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럴수록 이를 더 꽉 물고 연습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어울리는 소리가 될 수 있도록.


#4

네, 감기약 주세요. 인후통이랑 몸살, 기침 가래 있다던 데. 아, 저는 아니고, 잠시만요... 너 알약 먹을 수 있어? 가루약으로 받을까?

내가 나이가 몇인데 가루약을 먹어.

알약으로 주셔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가끔 너 밥 먹는 것만 봐도 신기해.

인간이 밥을 먹는데 그게 뭐. 가끔 나 좀 귀찮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프기도 자주 아프고 가리는 것도 많잖아.

그럴 때 기겁하면서 챙겨주는 게 즐거운 건데, 나는.


#4-1

(가루약 필요하냐는 질문이 그 어떤 고백보다 울렁거렸다는 걸 너는 알까?)


#5

첫눈이 오는데 기쁘지 않을 수도 있구나.


올해의 첫 번째 눈인사는 12월 4일. 스무 살의 이맘때쯤 나는 인생의 첫 번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는 내가 일하던 주말 아침마다 눈이 와도, 그래서 출근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고 매장이 구정물로 더러워져도 마냥 즐거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너무나도 동화 같으니까. 10분에 한 번씩 걸레질을 새로이 하면서도 좋아하는 나를 보며, 같이 일하는 언니들은 스무 살 답다며 웃었다. 사회에 조금만 더 물들면 눈이 정말이지 싫어질 거라면서.


사실 그때의 출근은 매일이 버겁도록 긴장됐다. 어떻게든 내 쓸모를 찾고 싶었는데, 재수까지 실패한 나는 조금도 별 볼 일이 없어서. 공부가 끝났으니 일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화장품 가게 직원도 딱히 내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도 지긋지긋하게 일을 못 하는 걸 보면.


그럼에도 그때 만난 손님들은 어리바리한 스무 살짜리 알바생에게 하나같이 친절했다. 한 번은 나에게 마스크팩 위치를 물어본 분이 계셨는데, 제품 위치를 외우는데 서툴렀던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하며 매장 곳곳을 뛰어다녔다. 다들 바빠 보여 다른 직원분께 도움도 청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중, 손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제가 찾았어요! 저쪽에 있더라고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도와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쭈굴쭈굴하게 주름진 기억이지만 나는 눈이 올 때마다 그날의 친절을 기억했다. 그래서 눈을 계속계속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싫다. 계단을 내려오며 두 번을 미끄러질 뻔하고, 퇴근길 버스에 40분 동안 갇혀 텁텁함을 느끼는 동안 드디어 내가 사회에 편입된 걸까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른 곳으로 출근하지만, 2년 가까이 제대로 발을 붙이고 일하고 있으니.


도저히 집에 자정 전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 전철을 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역 앞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하나 있었고, 저녁을 먹지 않은 것이 뒤늦게 떠올라 싱글 레귤러 콘 하나를 주문했다. 손님이 몇 명 없었음에도 나의 대기번호는 20분 만에 불렸고, 중간중간 몇 번이나 짜증을 참았던 터라 냉소적인 기분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으러 향했다.


그때 나에게 콘을 내민 직원분은 가늘게 눈빛을 떨고 계셨다.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앳되어 보이는 두 눈. 끊임없이 울리는 배달 주문 소리. 언뜻 봐도 정량보다 많아 보이는, 서툴지만 동그란 아이스크림. 그 멋쩍은 공기를 마주한 순간 모든 기분이 녹아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미 얼어붙은 안면근육을 최대한으로 움직여 웃어 보였다. 감사하다는 뻔한 인사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카페나 음식점, 온갖 상점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마도 ‘감사합니다’. 우리는 돈을 지불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당연하게 받는 것임에도 왜 감사하다고 말하는 걸까. 그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교환하는 것이 음식이나 물건에 한정될 필요는 없으니까. 그 인사 한 마디가, 여름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겨울에게 마음을 나눠주도록 만들어주니까. 들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흔한 말이 결국 정답이었구나.


겨울도 겨울이라는 발음으로 실감하는 게 아니잖아.

살짝 붉어진 코끝과

떨어지는 눈을 곁들여 한 입 베어 먹는 붕어빵,

트리 위 오너먼트처럼 머리 위로 내려앉는 흰색 결정.

그런 것만으로도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들을 수 있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