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 되는 말

24년 12월 11일

by 레톤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교양 과목 하나는 단답형과 논술형 중 문제 형식을 자유롭게 골라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 중간고사 당시에는 단 한 명의 학생 외에는 아무도 선뜻 논술형에 도전하지 않았다. 내심 논술 문제가 궁금했던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결국에는 다수를 따라 단답형 시험에 응시했다.


내가 원하던 것이 옳은 선택이었던 적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고등학생 때 배운 점이 있다면 실패에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따금씩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무리를 했다. 그렇게 철없을 기회를 단 한 번이라도 단단하게 잡아보고 싶었지만 좋은 성과가 돌아온 적은 거의 없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것이 이른 것인지 늦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르다고 느꼈다. 언젠가는 현실을 깨달아야 하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벌써 무기력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침대를 두고도 기숙사 방바닥에 주저앉아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단답형으로 응시했던 시험은 어려웠고 예상보다 훨씬 낮은 점수를 받았다.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과목이라 적지 않게 당황했고, 동시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학점은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자. 그래서 기말고사도 논술형 시험지는 한 부만 준비하면 되겠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조용히 손을 들었다. 나도 이번에는 논술형으로 응시하겠다고.


그렇게 마주한 기말고사 시험지는 만만하지 않았다. 나름 대입 당시에 논술 준비를 일 년 정도 해 보았는데, 글자수조차 다 채우기 힘들 정도로 막막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시험 종료 4분 전에 겨우겨우 답안지를 내미는 나에게 교수님께서 다가오셨다. 왜 이번에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둘러대는 데에 별로 소질이 없는 나는 그저 솔직하게 대답했다. 원래도 논술형 시험을 보고 싶어 고민했는데 성적을 잘 받는 데에는 단답형이 더 유리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제 중간고사 성적이 많이 낮길래, 이왕 망한 거 하고 싶은 걸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교수님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하셨다.


좋아하는 걸 했는데 그게 왜 망한 거예요.


입가의 약간의 미소를 건 채로 수고했어요, 라고 덧붙이고 먼저 강의실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교수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나중에 성인이 아닌 어른이 된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 말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방을 챙기며 생각했다. 내가 저 말을 조금 더 일찍 들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수없이 좌절하던 시기에 나에게 처음이 되었던 말은 이러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남들도 다 똑같이 힘들다고. 심지어 너는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는 말이었기에 스스로를 약하고 무능하다고 미워하는 길밖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닮고 싶었던 사람의 말은 늘 나를 가장 아프게 찔렀다.


힘들 때에는 그저 힘들어도 된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이 듣고 나서야 겨우겨우 그때의 상처를 메웠다. 지금의 내가 유독 십 대 학생들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고등학생 때의 나에게 보내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가 이제야 안쓰럽게 느껴져서. 날카로운 처음에 가장 많이 찔릴 시기인데 그때는 그걸 몰라줘서.


조교로 일하는 수학학원에는 유독 나에게 다가와주는 학생이 있다. 수업이 시작하면 어김없이 내 옆에 털썩 앉아 이런저런 장난을 걸어오고, 본인이 학원에 오는 요일을 바꿔놓고서 나에게 그만둔 줄 알았다며 서운한 기색을 잔뜩 내비치던. 그 애가 점점 현실과 현실의 사이에서 흔들려가는 모습을 보며 수없이 다짐한다.


나는 절대로 너의 처음이 그런 말이 되지 않게 해 줄게. 누군가 너에게 모난 말을 내뱉기 전에 내가 제일 먼저 둥그런 말들로 네 처음을 미리 채워줄게. 그 애가 오른손을 다쳐 왼손으로 글씨를 쓰던 날 같이 왼손으로 펜을 잡으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이 마음이 설령 과거의 스스로에게 보내는 화해에 불과한다 할지라도 의미를 가질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