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읽고
지난 겨울, 한 예술가의 작업실에 다녀왔다. 손끝의 감각이 희미해질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작업실은 서울의 남쪽 끝에서도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더 달려야 하는 위성 도시에 있었다. 갈아탄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성냥갑같은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적막한 동네 풍경이 펼쳐졌다.
흐린 하늘이 시야를 온통 잿빛으로 뭉개 놓는 날이어서였을까. 구도심의 낡은 건물 4층에 위치한 작업실의 문을 열며 받은 첫 인상은 '사무치게 쓸쓸하다'는 거였다. 층고가 높고 안으로 깊은 형태의 스튜디오엔 전시를 마치고 해체된 작업물들과 각종 설치 자재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다. 안쪽의 작은 골방 속에 작가가 있었다. 자그마한 책상 위 조용히 차가운 빛을 내뿜는 모니터 앞에, 문을 등진 채로. 1시간 단위로 반복되는 장작불 소리가 방안을 은은히 채우고 있었는데, 그 소리마저 꺼진다면 거대한 정적이 몰려와 숨통을 조일 것 같았다. 그만큼 고독했다. 수도자처럼 살아온 사람다운 작업실이었다.
곳곳에서 적막함이 한기처럼 스며드는 작업실을 둘러보다, 어수룩하게 물었다. 10년 동안 이 방에서 혼자 외롭지 않았느냐고. 그는 외로웠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 편이 좋을 때가 많았다고 답했다.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창으로 저 멀리 아파트 단지의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프레임 속의 그 풍경이 마치 소리 없는 무성영화 같았다. 도시의 어지러운 소음이 멀어져 있었고, 현기증 나는 바깥 세상의 속도감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작가는 이곳에서 '고독해서' 충분히 자유로운 것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함부로 간섭하고, 충고하며, 제멋대로 점수를 매기는 세상으로부터 얼마간은 유리 돼 있어야, 자신 안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리라.
<1945년 이후 한국미술>은 역사서다. 80년에 가까운 시대를 조망하는 책이기에 예술가 개인의 삶을 알긴 어렵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들이 어떤 시대의 굴곡 위에 위치해있었는지를 일별하기 위한 책이다.
이중섭과 권진규가 불행히 죽어간 시대, 박서보와 정상화, 김창열이 청년 작가였던 시대, 김환기와 백남준이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시대 그리고 이불과 김수자, 양혜규가 북미와 유럽을 누볐던 시대를 거쳐 장영혜중공업의 시대에까지 이른다.
이 책이 견지하는 관점은 숲을 보는 위치지만, 나는 고독의 모양을 한 나무들을 찾았던 것 같다. 많아야 두 페이지, 짧으면 한두문단 정도로 거칠게 요약된 몇몇 작가의 일대기 속에 그의 삶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을 고독의 존재가 언뜻언뜻 보였다.
살아 생전의 이중섭은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후 영양실조, 정신분열, 거식 증세를 번갈아 앓았다. 껌 포장지에 드로잉을 연습할 수밖에 없었던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포기하지 않았을테다.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결국 외롭게 죽었다. 명성은 사후 20년이 지난 이후에야 얻게 됐다. 살아생전의 권진규는 모더니즘과 추상이 흐름이었던 시기에도 고집스럽게 사실주의적 인물상을 제작했다. 의뢰를 거의 받지 못한 채, 수전증과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김환기는 파리와 뉴욕을 떠도는 오랜 디아스포라적 삶 속에서 향수병을 겪으며 어머니의 땅을 떠올리게 하는 전통적 심상으로 회귀했다. 이불과 김수자, 서도호 역시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자들의 분열'을 원동력으로 작업을 만든다. 이들은 각기 분열된 자아로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본다. 흑도 백도 아닌 회색지대를 떠도는 그들의 외로운 떠돌이 여정은 걸작의 주요한 재료가 된다.
얼마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2021전>을 보다가 최찬숙 작가의 작품 앞에서 오래도록 발이 묶였다. 작가의 인터뷰엔 이런 말이 나온다.
"이동하는 사람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거나 새어나올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하고 불안한 진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긴시간 동안 이주자로 생활하면서 여전히 어딘가에 단단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자신의 상태에 대한 관심이기도 합니다.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어떤 밀려남들에 대해 늘 생각합니다." (최찬숙)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불순물 같은 타인의 말과 시선이 휘발되고 한층 농도가 짙어진 자신만의 사유, 영감을 길어 올릴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숨을 한껏 깊이 들이쉬고 잠수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어쩌면 예술가들은, 깊은 심해의 압력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닐까, 때문에 '고립'을 연료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