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바리 독서 모임 후기
⚠️ 스포일러 주의
이 글에는 토니 모리슨의 단편소설 〈레시타티프〉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핵심 플롯이 언급됩니다. 아직 읽지/보지 않으셨다면, 먼저 감상하신 뒤 돌아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전 세계 1살 아동 중 어떤 질병이든 예방접종을 받은 비율은 몇 퍼센트일까?"
20%, 50%, 80%. 세 개의 선택지를 보며 나는 직감적으로 50%를 골랐다. '전 세계'라고 했으니 아프리카나 저개발 국가들을 포함하면 그 정도 아닐까.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정답은 80%였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는 이런 식의 13문항 테스트로 시작한다. 전 세계 문맹률, 빈곤층 비율, 여성의 교육 기간 등. 흥미로운 건 이 테스트를 수천 명에게 돌렸을 때, 인간의 평균 정답률이 침팬지의 랜덤 선택(33%)보다 낮았다는 사실이다.
잠깐,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멍청하다는 뜻일까?
로슬링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단순히 몰라서 틀린 거라면 정답률은 33% 근처에 머물러야 한다. 랜덤하게 찍으면 그 정도는 나오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보다 더 못 맞혔다. 이건 무지가 아니라 왜곡이다. 우리의 집단지성이 특정 방향으로—그것도 비관적인 방향으로—조직적으로 쏠려 있다는 증거다.
왜 그럴까.
여기서 주목할 건 단순히 "틀렸다"는 사실이 이상이다. 틀림에도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수천 명의 응답자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틀렸다면 평균은 33%에 수렴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가 같은 방향으로, 더 비관적인 선택지로 몰렸다. 이건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인식의 조직적 왜곡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읽어내는, 일종의 기울어진 렌즈가 장착되어 있는 셈이다.
왜 우리는 실제보다 세상을 더 어둡고 위태로운 곳으로 렌더링할까?
진화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사바나에서 살아남으려면 긍정적 신호 열 개보다 위협 신호 하나에 더 민감해야 했다. "저 덤불 뒤에 아무것도 없겠지"라고 낙관한 조상은 도태됐고, 매번 호랑이를 의심한 조상이 살아남아 우리가 됐다. 문제는 이 생존용 비관 회로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작동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미디어가 기름을 붓는다. 뉴스의 비즈니스 모델은 주목 경제다. "올해도 비행기 99.99%가 무사히 착륙했습니다"는 헤드라인이 되지 못한다. 클릭을 부르는 건 추락, 폭발, 위기다. 우리의 원시적 위협 탐지기와 미디어의 공포 유통망이 공명하면서, 실제보다 위험한 세계상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또 하나의 가설은 우리가 가진 '세계관'의 뼈대는 대부분 학창 시절에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시간차가 존재한다. 교과서는 집필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선생님들은 자신이 대학 시절에 배운 지식을 가르친다. 결국 우리는 이미 30년 묵은 지식을 최신 정보인 줄 알고 받아들인 것이다.
더 문제는 그 지식이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스마트폰처럼 자동 업데이트 기능이 없다. 20년 전 학교에서 배운 '선진국/후진국' 이분법이 내 머릿속 바탕화면에 그대로 깔려 있고, 그 위에 뉴스라는 버그 패치만 계속 덮어쓰고 있는 셈이다. 매일 쏟아지는 재난과 전쟁 뉴스가 낡은 OS 위에 겹겹이 쌓이니, 세상이 점점 망해간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침팬지는 세상에 대한 이론이 없다. 그래서 버튼을 누를 때 아무런 편견도 개입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안다고 생각한다. 배웠고, 뉴스를 봤고,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했다. 그 '앎'이 오히려 우리를 랜덤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가 똑똑하다고 믿었던 그 지성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격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침팬지를 이긴 건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다.
이 낡은 OS가 세상을 처리하는 가장 주된 연산 방식은 '이분법'이다. 우리 뇌는 복잡한 맥락을 파악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모든 데이터를 'A 아니면 B'라는 두 개의 서랍 속에 구겨 넣으려 한다. 한스 로슬링은 이를 '간극 본능(Gap Instinct)'이라 명명했지만, 나에게 이 본능은 훨씬 더 원초적이고 지독한 '분류의 집착'처럼 느껴졌다.
독서모임을 준비하며 대학 시절 수업 시간에 배웠던 토니 모리슨의 단편 소설 <레시타티브(Recitatif)>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독자의 뇌 속에서 돌아가는 '간극 본능'의 알고리즘을 역이용한 지독한 실험작이다. 작가는 첫머리에 "한 명은 백인이고 한 명은 흑인이다"라는 단 한 줄의 정보만 던져둔 채, 두 주인공 트와일라와 로버타가 성장하고 재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놀라운 건 소설이 끝날 때까지 누가 흑인이고 누가 백인인지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읽는 내내 지독한 인지 부조화에 시달렸다. "엄마가 춤을 추러 다녔으니 흑인일까?", "리무진을 타고 나타났으니 이제 백인이 된 걸까?" 소설 속 그녀들의 식습관, 옷차림, 심지어 정치적 견해까지 샅샅이 뒤지며 인종적 단서를 찾으려 애쓰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작가는 인종이라는 '라벨'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림으로써, 우리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집단(Us or Them)'에 가두어야만 비로소 이해했다고 안심하는 존재라는 걸 뼈아프게 증명해냈다. 인종 정보를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한 인물의 삶이 이토록 불투명하게 느껴지다니, 나의 인식 시스템이 얼마나 이분법적 분류에 의존하고 있었는지 소름이 돋는 지점이
었다.
이 지독한 간극 본능을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적 얼굴은 단연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다. 고담시의 '빛의 기사'였던 그가 얼굴의 절반과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투 페이스'로 타락했을 때, 그가 선택한 유일한 정의는 동전 던지기였다. 앞면(삶/선) 아니면 뒷면(죽음/악). 그에게 더 이상 인간사의 복잡한 인과관계나 참작해야 할 사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50대 50의 확률로 세상을 반 토막 낼 뿐이다.
우리의 일상도 이 타버린 동전 던지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멘토링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동전을 던질 때가 있다. 포트폴리오를 보고 5분 만에 "이 사람은 가능성 있다/없다"를 판정하는 순간들. 하지만 실제로 여러 차례 세션을 진행하다 보면, 처음 '가능성 없음' 폴더에 넣었던 사람이 예상 밖의 성장을 보여주는 경우가 꽤 있다. 맥락을 모른 채 5분 만에 내린 판단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는 순간이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무심코 쿠키 하나를 입에 넣는 순간 우리 머릿속 동전은 뒤집힌다. "오늘은 망했다"는 결론과 함께 저녁의 폭식을 정당화한다. 0점 아니면 100점, 완벽한 성공 아니면 완전한 실패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80점짜리 하루를 보낼 기회를 박탈한다.
인간관계에서는 또 어떤가. 나에게 조금만 퉁명스럽게 대한 동료를 우리는 순식간에 '빌런' 폴더로 드래그 앤 드롭한다. 그 사람이 어제 겪었을 개인적인 불행이나 컨디션 난조라는 '데이터의 맥락'은 무시된 채,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만 남는다.
모임에서도 비슷한 고백이 나왔다. 마케팅 업무를 하는 한 멤버는 "타겟을 정할 때 29살까지는 우리 고객이고 30살부터는 아닌 것처럼 선을 그어야 하는 게 늘 불편하다"고 했다. 인사 업무를 맡고 있는 다른 멤버는 "처음엔 데이터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려 했는데, 충분한 시간을 들여 면담해보면 다들 각자의 사정과 이유가 있더라"고 말했다. 결국 "나쁜 회사, 나쁜 직원은 없고 조직과의 핏이 맞고 안 맞고의 문제"라는 결론. 이분법의 서랍이 얼마나 많은 맥락을 짓뭉개는지, 현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팩트풀니스>가 데이터를 통해 끊임없이 외치는 진실은, 세상의 진짜 모습이 양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의 '거대한 중간층'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1단계와 4단계 소득 수준 사이에는 50억 명의 역동적인 삶이 흐르고 있고, 흑과 백 사이에는 무수한 회색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렇다면 정말 극단적인 상황—Loss or Loss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인간은 결국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을까?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그렇게 믿었다.
조커는 인간이 극한의 위기 앞에 서면 100% 이기적인 악마로 변할 것이라 장담하며 두 척의 배에 폭탄 스위치를 쥐여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나. 어느 쪽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 그들은 숭고한 성인도,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도 아니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스위치를 쥐고 '이게 정말 맞는 일인가'를 고민하며 끝내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중간 어디쯤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이 '중간'을 보지 못하는 건, 사실 게을러서라기보다 입체적인 시야를 유지하는 것이 뇌 입장에서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연산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맥락을 따지기보다 라벨을 붙이는 게 훨씬 빠르고 속 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비 덴트처럼 동전을 던진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동전의 앞뒷면만 보는 동안, 우리는 그 동전의 '옆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삶의 진실을 영원히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한스 로슬링이 제시하는 방대한 데이터들은 분명 매혹적이다. 수십 년간 우상향하는 그래프, 극빈층의 드라마틱한 감소, 예방접종률의 수직 상승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금방이라도 유토피아가 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독서모임 내내 내 마음 한구석에는 해소되지 않는 묘한 불편함이 끈질기게 남았다. 수치는 명확하고 논리는 정교하지만, 그 매끄러운 그래프가 담아내지 못하는 '이미지 밖의 노이즈'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모임에서 이 불편함을 꺼냈다. "데이터대로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GDP는 50년 전보다 몇 배나 올랐는데, 자살률은 왜 세계 최고 수준인 거죠?" 로슬링의 그래프가 측정하지 못하는 어떤 결핍이 분명히 존재했다.
유발 하라리가 최신작 <넥서스(Nexus)>에서 지적했듯, 정보가 많아진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합리적이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교하게 가공된 정보는 우리를 가장 논리적인 방식으로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하라리는 이를 정보에 대한 '나이브한 관점(Naive View)'이라 일갈했다. 역사적으로 대중을 움직인 건 복잡하고 정확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단순하고 자극적인 이야기, 그럴듯한 내러티브, 소속감을 주는 신화가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천문학자의 정교한 계산보다 점성술사의 별자리 운세가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오늘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유전자 검사 결과지가 아니라 "MBTI가 뭐예요?"를 묻는다. 과학적 근거는 빈약해도, '나랑 같은 I 성향이네'라는 연결감이 주는 효용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그 처절했던 얼음 행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떠난 탐사대 앞에는 거대한 선택의 기로가 놓인다. 하나는 만 박사(Dr. Mann)가 보내온 '완벽한 데이터'가 가득한 행성이고, 다른 하나는 에드먼즈가 보낸 '희미한 신호'만이 남은 행성이다. 탐사대는 철저히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만 박사의 행성을 선택한다. 데이터가 그곳을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 박사는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던 인물이었고, 그가 전송한 로그는 빈틈없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 데이터는 지독한 조작의 산물이었다. 만 박사는 자신의 고독과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즉 타인에 의해 '구조받기 위해' 데이터를 편집했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수치가 가장 주관적인 생존 본능에 의해 오염된 순간, 데이터는 인류를 구원하는 지도가 아니라 죽음으로 인도하는 화려한 덫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로슬링의 데이터 낙관주의 뒤편에 숨겨진 위험성이다. 우리는 종종 데이터라는 이름의 권위에 압도되어, 그 데이터를 생산하고 전송하는 주체의 '의도'와 '결함'을 간과하곤 한다.
반면, 브랜드 박사는 데이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에드먼즈의 행성으로 가자고 주장한다. 그녀의 근거는 수치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과학의 영역에서는 도저히 렌더링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직관이었다.
"사랑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것이에요.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무시해선 안 돼요."
당시 대원들에게 그녀의 말은 비과학적이고 감상적인 헛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나 역시 엔지니어로서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브랜드 박사의 감정에 이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팩트풀니스>를 덮고 다시 생각해보니, 영화의 결말은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이 본질적으로 틀어져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가?
한스 로슬링은 철저히 '만 박사의 행성' 같은 데이터적 접근을 취하며 "데이터를 봐라,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고 복음처럼 외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을 투영해보면 그 낙관론은 공허하게 들린다. 한국의 경제 지표는 지난 50년간 전무후무한 우상향을 기록했고, 우리는 로슬링이 정의한 소득 4단계의 정점에 서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수치 뒤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청년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무력감이라는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물질적 생존의 지표는 개선되었을지 모르나, 삶의 질과 정신적 풍요라는 데이터 밖의 영역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 행성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모임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한 멤버는 "이 책의 저자가 북유럽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거기는 기본적인 안전망이 있으니까 '세상 좋아지고 있어, 걱정 마'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한국처럼 죽어라 경쟁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또 다른 멤버는 "책에서 '스스로 데이터를 찾아보고 판단하라'고 하는데, 솔직히 일하기 바빠 죽겠는데 누가 그래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좀 쉬고 싶지"라고 말했다.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로슬링의 조언은 옳지만,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대다수에게 "직접 데이터를 확인하라"는 말은, 익사하는 사람에게 "수영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로슬링의 낙관주의는 '나쁨'과 '아쉬움'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아지고 있다'는 위로가 아니라 '왜 여전히 고통스러운가'에 대한 지혜다. 하라리가 경계한 것처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는 이유는 데이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데이터가 가리키는 '지향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데이터는 '과거의 흔적'이지, '미래의 지도'가 아니다.
왜 대원들은 만 박사의 거짓 데이터를 의심하지 못했을까.
다급함 때문이다.
연료는 부족하고, 시간은 없고, 지구의 인류는 죽어가고 있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잠깐, 이 데이터가 진짜 맞는지 검증해보자"고 말할 여유가 없었다. 눈앞에 '살 수 있다'고 소리치는 숫자가 있는데, 굳이 의심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급함은 분석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그리고 가장 자극적이고 확실해 보이는 데이터에 매달리게 만든다.
<팩트풀니스>의 10장에서 로슬링이 경고하는 것도 바로 이 '다급함 본능(Urgency Instinct)'이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느낌이 들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슬링 본인의 책이 주는 메시지—"세상은 좋아지고 있으니 걱정 마"—도 어떤 면에서는 다급함의 반대급부로서 '안심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 아닐까. 만 박사의 데이터가 "여기로 오면 살 수 있어"였다면, 로슬링의 데이터는 "걱정 마, 세상은 나아지고 있어"인 셈이다.
둘 다 데이터다. 둘 다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데이터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알려주지 않는다.
데이터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는 데이터가 아니라 가치와 방향의 문제다. 만 박사의 행성이 데이터상으로는 완벽했어도, 그 데이터 뒤에 숨은 인간의 절망과 기만은 숫자에 담기지 않았다. 브랜드가 말한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본질—신뢰, 직관, 관계의 역사—을 가리키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모임에서 한 멤버가 던진 말이 오래 남았다. "이 책의 저자가 북유럽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거기는 기본적인 안전망이 있으니까 '세상 좋아지고 있어, 걱정 마'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한국처럼 죽어라 경쟁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체감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또 다른 멤버는 이렇게 말했다. "책에서 '스스로 데이터를 찾아보고 판단하라'고 하는데, 솔직히 일하기 바빠 죽겠는데 누가 그래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좀 쉬고 싶지."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로슬링의 조언은 옳지만,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대다수에게 "직접 데이터를 확인하라"는 말은, 익사하는 사람에게 "수영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데이터가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직관은 데이터보다 더 엉망이니까. 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이 그 증거다. 다만 데이터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로슬링의 낙관주의에는 중요한 한 조각이 빠져 있다.
데이터는 '과거의 흔적'이지, '미래의 지도'가 아니다.
만 박사의 데이터가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그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측정된 스냅샷일 뿐이었다. 그 데이터가 만들어진 맥락—누가, 왜, 어떤 상태에서 이 숫자를 보냈는가—을 묻지 않으면, 우리는 조작된 희망을 붙잡고 잘못된 행성으로 향하게 된다.
브랜드 박사의 선택이 옳았던 이유는, 그녀가 데이터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데이터 너머에 있는 어떤 것—오랜 시간 쌓아온 신뢰, 사람에 대한 믿음,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의 무게—을 함께 저울에 올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데이터는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데이터가 나에게 "그러니까 너도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주지는 않는다. 통계적 평균의 개선이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간극을 인정하는 것, 데이터의 힘을 믿으면서도 그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일 테다.
모임에서 누군가 물었다. "뉴스가 불편해지는 '나만의 트리거'가 있나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저는 기사보다 댓글창이 트리거예요. 기사는 그래도 팩트를 전달하려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댓글창은 그냥... 서로를 물어뜯는 투견장 같거든요."
실제로 나는 몇 년 전부터 뉴스 댓글을 의도적으로 안 본다. 처음엔 정보를 얻기 위해 뉴스를 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댓글창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싸움을 보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했다. 세상이 온통 서로를 미워하는 전쟁터 같았다. <팩트풀니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 대다수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합리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댓글창만 보면 세상이 극단적인 '우리(정상)'와 '그들(비정상)'로 쪼개져 있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한 멤버는 더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그냥 살려고 SNS를 안 봐요. 데이터도 안 보고, 뉴스도 안 보고. 해결되지 않은 채 던져지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속에 있으면 계속 답답하고 화만 나거든요."
이 말이 묘하게 와닿았다. 현대의 뉴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화제'를 생산한다. 사건이 터지면 초반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쏟아지고, 여론이 끓어오르다가, 어느 순간 다음 화제로 관심이 옮겨간다. 그 사이에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피해자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는다. 우리는 분노의 시작점만 반복적으로 소비하고, 해결의 과정은 영영 목격하지 못한다.
이 구조가 기묘하게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콜로세움에 모여 검투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광경을 구경했다. 맹수와 인간이 싸우고, 피가 튀고, 누군가 쓰러지면 환호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잔인해서? 아마 아닐 것이다. 대부분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들은 그저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고, 자신은 저 아래 경기장이 아니라 안전한 관중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을 뿐이다.
현대의 콜로세움은 스마트폰 화면 안에 있다. 우리는 유명인의 '논란'이라는 이름의 검투 경기를 실시간으로 관람한다. 누군가의 과거 발언이 발굴되고, 사과문이 올라오고, 사과문의 폰트와 문장 구조까지 비평의 대상이 된다. 댓글창에서는 도덕 심판관들이 저마다의 판결을 내린다. "진정성이 없어 보여." "반성하는 것 같지 않아." "이 정도면 퇴출감이지."
우리는 이 광경을 보며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솔직히 자문해보자. 우리는 정말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무너지는 장면을 구경하고 싶은 걸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도덕적 면허(Moral Licensing)'라고 부른다. 타인을 비난하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받는 메커니즘이다. "저런 짓을 하다니 인간이 아니지"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저런 짓을 하지 않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자격을 획득한다. 상대를 '저들'의 영역으로 밀어냄으로써, 나는 '우리'의 영역에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간극 본능이 분노라는 연료를 만나 폭주하는 순간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 <레시타티브>에서 두 주인공이 약자인 '매기'를 공격하며 자신들의 결속을 다졌던 것처럼, 우리는 타인을 '악마화'함으로써 내가 속한 집단의 안전함을 확인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간극 본능의 발현이다. 논란의 주인공을 '비정상'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순간, 우리는 복잡한 자기성찰의 의무로부터 면제받는다.
모임에서 최근 화제가 됐던 한 배우의 논란이 언급됐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패턴의 사건은 매달 터지니까. 한 멤버가 말했다.
"그 배우 비난하는 댓글은 수만 개인데, 그 사람이 출연한 작품이 공개 안 되면 손해 보는 스태프들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하더라고요. 진짜 피해자가 누군지, 어떻게 보호할 건지는 관심 없고, 그냥 욕하고 싶은 거예요."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게 아니다. 비난할 대상을 찾고 싶은 것이다. <팩트풀니스>의 9장에서 로슬링이 경고하는 '비난 본능'이 바로 이것이다. 사건이 터지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구 책임이야?"를 먼저 묻는다.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이나 복합적인 원인 분석에는 관심이 없다. 그건 복잡하고 지루하니까. 차라리 명확한 악당 하나를 지목하고, 그 사람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붓는 편이 속 시원하다.
그래서 뉴스의 사이클은 이렇게 돌아간다. 사건 발생 → 책임자 색출 → 여론 린치 → 사과 또는 퇴출 → 다음 사건으로 이동. 그 사이에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똑같은 구조에서 똑같은 사건이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음 콜로세움으로 자리를 옮긴 뒤다.
이 현상을 더 악화시키는 건 현대 미디어의 구조다. 뉴스는 더 이상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관심 경제의 플레이어다. 클릭을 유도해야 광고 수익이 생기고, 클릭을 유도하려면 자극적이어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충격", "경악", "논란", "결국 이렇게 됐다"가 화면을 채운다.
로슬링이 말한 부정 본능과 다급함 본능이 알고리즘과 결합하면 완벽한 폭풍이 된다.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정보에 먼저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알고리즘은 그 반응을 측정해서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밀어넣는다. "지금 당장 이걸 봐야 해!" "지금 당장 분노해야 해!" 우리가 숨을 고르고 맥락을 파악할 틈은 없다. 그저 자극에 반응하고, 클릭하고, 스크롤하고, 다음 자극을 기다린다.
이건 정보 소비가 아니라 정크푸드 섭취에 가깝다. 영양가 있는 통곡물—심층 탐사 보도, 데이터 기반 분석, 복잡한 맥락을 설명하는 기사—은 씹기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 반면 자극적인 논란 기사는 입에서 살살 녹는 정크푸드다. 당장은 달콤하지만, 계속 먹으면 몸이 망가진다. 우리의 세계관이 망가진다.
나도 이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끔 X를 열면, 오늘의 논란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 확인만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30분이 지나 있다. 그리고 폰을 내려놓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다. 정보를 얻은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구경하다 왔을 뿐인데.
모임에서 한 멤버가 자신만의 대응법을 공유했다. "저는 '논란'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면 안 클릭해요. 한 달 지나서 '그래서 어떻게 됐지?' 하고 찾아보면 대부분 흐지부지됐거든요. 그때 클릭 안 한 내가 이긴 거죠."
로슬링이 10장에서 제안하는 해법도 비슷하다. 다급함을 느낄 때일수록 심호흡을 하고, "진짜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는 일인가?"를 물으라고. 대부분의 뉴스는 내가 지금 당장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세상은 내 분노 없이도 잘 돌아간다. 오히려 내 분노는 알고리즘에게 "이런 콘텐츠 더 줘"라는 신호를 보낼 뿐이다.
결국 문제는 뉴스 자체가 아니라, 뉴스를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다. 우리가 '논란'이라는 불구경을 원하니까, 미디어는 불을 지른다. 우리가 '책임자 색출'이라는 린치를 원하니까, 기사는 희생양을 찾는다.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
콜로세움의 검투 경기가 폐지된 건 로마 시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도덕적으로 각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제국이 기울고, 경기를 운영할 여력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불편한 진실은, 관중이 원하는 한 경기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나는 콜로세움을 떠나는 것이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나를 부를 때, "이건 내가 지금 알아야 하는 정보인가, 아니면 그냥 정크푸드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 질문 하나가 나의 세계관을 조금이나마 지켜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임에서 가장 오래 토론이 이어진 질문이 있었다.
"'나쁜 일이 존재한다'와 '전체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는 동시에 성립할 수 있을까요?"
단순해 보이지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로슬링은 책 전반에 걸쳐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뉴스를 열면 전쟁, 기후재난, 혐오범죄가 넘쳐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인 걸까?
나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꺼냈다. 스냅샷과 동영상의 차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 순간이 정지된다. 친구의 표정, 배경의 풍경, 그 찰나의 모든 것이 한 장의 이미지에 박제된다. 하지만 그 사진은 '그 순간'만을 담을 뿐, 그 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친구가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고 해서 그 친구가 항상 행복한 건 아니다. 바로 직전까지 울고 있었을 수도 있고, 사진 찍는 순간만 억지로 웃었을 수도 있다.
"나쁜 일이 존재한다"는 스냅샷이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는 굶주리고 있고, 누군가는 부당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현재의 상태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포착되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전체적으로 좋아지고 있다"는 동영상이다.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을 압축해서 재생하면 보이는 변화의 방향(Vector)이다. 영아 사망률이 떨어지고, 문맹률이 낮아지고, 극빈층이 줄어드는 추세. 한 장의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프레임을 이어 붙이면 드러나는 움직임이다.
스냅샷과 동영상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둘 다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스냅샷만 보면서 동영상을 부정하거나, 동영상만 보면서 스냅샷을 무시할 때 발생한다.
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보자.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있다. 지금 체온은 38도다. 이 환자는 아픈가? 당연히 아프다. 38도는 정상 체온이 아니다. 하지만 주치의가 차트를 보니, 어제는 39.5도였다. 열이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환자가 아프다"는 사실과 "환자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공존한다. 이 둘을 동시에 인식해야 올바른 판단이 가능하다. 만약 38도라는 현재 체온만 보고 "여전히 열이 있으니 치료가 실패한 거야"라고 결론 내리면, 우리는 개선의 방향을 놓친다. 반대로 "어제보다 열이 내렸으니 이제 괜찮아"라고 안심하면, 여전히 아픈 환자를 방치하게 된다.
로슬링이 비판하는 건 전자의 태도다. 세상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스냅샷만 보고, 전체 방향이 개선되고 있다는 동영상을 무시하는 것. 하지만 모임에서 나온 비판은 후자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동영상만 강조하다가 스냅샷 속의 고통을 "어차피 나아질 거니까"라고 경시하는 것.
모임에서 한 멤버가 흥미로운 프레임을 제안했다.
"같은 상황을 의사 입장에서 보면 '아직 열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가 맞고, 환자 보호자 입장에서 보면 '어제보다 나아졌으니 희망이 있다'가 맞잖아요. 둘 다 사실인데,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죠."
정확한 지적이었다. 로슬링은 철저히 '보호자 프레임'으로 이야기한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데이터를 봐, 나아지고 있어, 희망을 가져"라고 말한다. 이건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다. 세상이 어차피 망해가고 있다고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의사 프레임'도 필요하다.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를 직시하고 대비하는 태도. 이 책이 출간된 게 2018년이고, 바로 2년 뒤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다. 과거 데이터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이 미래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프레임 충돌이 발생한다. 세상이 좋아지는 속도와 우리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속도의 불일치다.
100년 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용납되지 않는다. 아동 노동, 여성 참정권 부재, 일상적인 체벌. 그때는 "원래 그런 거"였지만,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면 뉴스에 나고 분노가 터진다. 이건 세상이 나빠진 게 아니다. 우리의 도덕적 해상도가 높아진 것이다.
예전에는 100픽셀짜리 흑백 사진으로 세상을 봤다면, 지금은 4K 컬러 영상으로 보고 있다. 당연히 더 많은 결점이 보인다. 먼지 하나, 주름 하나까지 선명하게 포착된다. 세상은 실제로 더 깨끗해졌는데, 우리 눈이 더 예민해져서 오히려 더 더럽게 느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개발자로서 비유하자면 이렇다. 우리 팀이 서비스 버전 1.0을 출시했다. 버그가 100개 있었다. 버전 2.0에서 버그를 50개로 줄였다. 객관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는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버전 1.0 시절에는 버그 리포트 시스템이 없었는데, 버전 2.0에서는 원클릭으로 버그 신고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신고가 더 쉬워지니 불만이 더 많이 보인다. 버그는 줄었는데 버그 리포트는 늘어난 것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SNS와 실시간 뉴스 덕분에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부당함도 내 손바닥 안에 날아온다. 100년 전에는 알지도 못했을 일들이 지금은 실시간으로 분노를 자극한다. 세상의 문제가 늘어난 게 아니라, 문제를 인식하는 채널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냅샷만 보며 절망할 것인가, 동영상만 보며 안주할 것인가?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건 줌인과 줌아웃을 오가는 능력이다.
줌인은 스냅샷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문제, 해결해야 할 과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 이걸 외면하면 안 된다. "통계적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으니까"라는 말로 눈앞의 고통을 무시하는 건 냉소이자 방관이다.
줌아웃은 동영상이다. 내가 지금 해결하려는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 100년 전 선배들의 노력이 오늘의 개선을 만들었듯이, 오늘 나의 노력이 내일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감각. 이걸 잃으면 무기력에 빠진다.
모임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 책이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어차피 망해간다고 믿으면 뭘 해도 소용없다고 느끼잖아요. 최소한 '방향은 맞다'는 감각이 있어야 움직일 힘이 생기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었다. "다만, '방향이 맞다'는 믿음이 '지금 당장 안 움직여도 된다'는 변명이 되면 안 될 것 같아요. 동영상이 좋다고 스냅샷을 무시하면, 그 동영상 속에서 나는 구경꾼일 뿐이니까요."
결국 "나쁨"과 "좋아짐"은 동시에 존재한다. 이 둘을 양립시키는 게 불편하다면, 그건 우리 뇌가 이분법적 서랍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비 덴트의 동전처럼, '좋다' 아니면 '나쁘다'로 결론 내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동전의 앞면도 뒷면도 아닌, 그 옆면의 두께 위에서 굴러가고 있다.
부정적인 것은 가까이 있어 쉽게 보인다. 전체 방향을 보려면 멀리서 봐야 한다. 하지만 멀리서만 보면 눈앞의 사람이 안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렌즈를 자주 바꿔 끼워야 한다. 줌인해서 현실을 직시하고, 줌아웃해서 방향을 확인하고, 다시 줌인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게 내가 이 책에서 가져가고 싶은 태도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데이터를 맹신하지도, 냉소하지도 않기. 대신 그 데이터 속에서 나의 역할을 찾기. 스냅샷에 갇히지 않으면서, 동영상의 방향에 기여하는 한 프레임이 되기.
열이 38도에서 37도로 내려가려면, 누군가는 해열제를 건네고, 누군가는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줘야 한다. 그 '누군가'가 나일 수 있다는 감각. 그게 이 책이 주는 진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나눈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둥둥 떠다녔다. 침팬지보다 못한 정답률, 하비 덴트의 동전, 만 박사의 조작된 데이터, 콜로세움의 관중들, 스냅샷과 동영상.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모임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나왔다. "오늘 이후로 당신은 어떻게 바뀔까요?"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세상을 마주하는 '포지션'만큼은 확실히 바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현상을 심판하는 판사가 아니라, 현상을 분석하고 개선하는 엔지니어의 자리에 서기로 했다.
우리는 종종 시스템에 에러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리며 법봉을 두드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유능한 엔지니어는 에러를 마주했을 때 비난할 대상을 찾기보다 '로그'를 먼저 읽는다. <팩트풀니스>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삶의 태도 또한 이와 같다.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사회적 갈등을 마주할 때, "저 사람은 원래 저래"라고 단정 짓는 것은 가장 손쉬운 판결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게으른 태도이기도 하다. 대신 나는 "어떤 컨텍스트와 예외 상황이 이 에러를 발생시켰을까?"를 먼저 묻기로 했다. 비난 본능이라는 레거시 코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사실충실성이라는 예외 처리 로직을 심는 것. 이것이 내가 정의한 '지적인 디버깅'의 시작이다.
문득 10년 전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코드 한 줄 짤 줄 몰랐고, 개발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주변에서는 "문과는 문과 일을 해야지"라고 했다. 문과/이과라는 간극 본능이 진로까지 규정하려 했다.
지금의 나는 월 5억 건 이상의 트랜잭션을 처리하는 결제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 동시에 작은 스타트업을 세우고 작지만 확실한 영향력을 위해 노력하고, 독서모임에서는 학부 시절 눈을 비벼가며 읽던 토니 모리슨을 떠올린다. 문과와 이과 사이, 개발자와 사업가 사이, 분석과 직관 사이. 나는 그 '사이'에서 산다. 하비 덴트의 동전이라면 앞면도 뒷면도 아닌, 옆면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셈이다.
이 삶이 가능하다는 걸, 10년 전의 나는 몰랐다. "넌 문과니까"라는 스냅샷에 갇혀 있었다면, 지금의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사람을, 세상을, 한 장의 스냅샷으로 판결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하라리가 경고한 정보의 홍수와 로슬링이 지적한 다급함 본능은 우리를 끊임없이 '판결의 자리'로 밀어 올린다. 세상은 자꾸 우리에게 "지금 당장 분노하라"고 재촉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일시정지(Pause) 버튼을 누르려 한다.
자극적인 뉴스가 낡은 OS 위로 버그 패치를 덧씌우려 할 때, 3초간 숨을 고르며 데이터 너머의 지향점을 묻는 행위. 이것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시스템의 오작동을 막으려는 엔지니어의 기술적 신중함에 가깝다.
이게 정말 앞면/뒷면밖에 없는 문제인가? 내가 지금 스냅샷만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분노가 정보인가, 정크푸드인가? 그 질문을 던지는 3초의 간격. 그것이 내가 오늘 내 삶에 설치한 패치다.
결국 팩트풀니스는 침팬지보다 똑똑해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특유의 편향이라는 노이즈를 제거하기 위한 장치다. <인터스텔라>의 주인공들이 얼음 행성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데이터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팩트들 사이에서도 기어이 길을 찾아내겠다는 태도 때문이었다.
"우린 답을 찾을 거야, 늘 그랬듯이."
이 대사에서 '늘 그랬듯이'는 낙관이 아니라 태도다. 데이터의 힘을 신뢰하되 그 한계를 잊지 않는 것. 차가운 수치를 분석하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인간적 가치와 신뢰를 함께 저울질하는 것. 만 박사의 완벽한 데이터가 아니라 브랜드의 떨리는 직관을 함께 들을 줄 아는 것. 낡은 지도를 접고 오늘이라는 생생한 데이터를 마주하며 한 뼘씩 회색지대를 넓혀가는 일.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말이 내 삶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아니다. 통계적 평균의 개선이 개인의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 뇌가 자동으로 그리는 재앙 시뮬레이션보다는 세상이 덜 망해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해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