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장화 —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검수했을까

사랑의 백엔드 - 관계의 시스템을 설계하는 법: 1화

by 르네

"적당한 상대를 아직 못 만났다."


2025년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결혼 인식 조사 결과는 꽤나 서늘한 지표를 보여준다. 미혼자 중 결혼 의향이 있다고 답한 이는 절반에 못 미치는 44%에 불과했다. 결혼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경제적 여유의 부재(45%)'와 '적당한 상대의 부재(41%)'가 꼽혔다. (* 한국리서치, 「2025 결혼인식조사」, 여론 속의 여론 제336-2호, 2025.6.23. (https://hrcopinion.co.kr/archives/33230)


적당한 상대.


우리는 언제부터 타인을 마주할 때 ‘좋은 사람’이 아닌 ‘적당한 상대’라는 수식어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을까?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개념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 200년도 채 되지 않은 최근의 발명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 결혼은 철저히 다른 논리로 작동했다. 중세 유럽에서 결혼은 가문 간의 동맹이었고, 동아시아에서는 가계 계승과 재산 상속의 문제였다. 사랑은 결혼의 조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혼과 사랑을 연결 짓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비합리적인 발상으로 여겨졌다. 감정 따위에 가문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으니까.


18세기 후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물결 속에서 '낭만적 사랑'이라는 개념이 부상한다. 역사학자 스테파니 쿤츠(Stephanie Coontz)는 저서 《진짜 결혼의 역사(Marriage, a History)》에서 이 전환을 "인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결혼 실험"이라 불렀다. 개인의 감정이 평생의 반려자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해방이었다. 가문도,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오직 '내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할 자유 말이다.


Wedding Day.jpeg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200년 전 우리는 "사랑 없는 거래로서의 결혼"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쟁취했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거래의 언어로 사랑을 말하고 있다. 가문과 재산 대신 연봉과 키와 직업이 들어왔을 뿐, 구조는 놀랍도록 닮아 있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자유로운 선택의 기준이 다시 시장의 논리로 회귀해 버린 것이다.


시스템의 배후(Back-end)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늘날의 연애 시장은, 흡사 거대한 '데이터 검수 시스템'과 닮아 있다. 데이트 앱의 인터페이스를 열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한 인간의 고유한 결이 아니다. 키, 직업, 연봉, 자산 규모, 그리고 부모님의 노후 대비 여부까지. 한 사람의 생애가 수치화된 ‘정적 데이터’로 치환되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서로의 효율을 위해 자세하게 적어볼게요"라는 문장과 함께.


효율.


연애에 효율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만나기 전에 조건을 확인하고, 조건이 맞으면 시간을 투자하고, 맞지 않으면 다음 사람으로 넘어간다. 마치 채용 공고에 지원서를 넣고, 서류 심사를 통과하면 면접을 보는 것처럼.


그런 경험담이 넘쳐난다. 프로필을 쓰다 보면 이력서를 쓰는 것 같고, 첫 만남에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면접을 보는 것 같다고. "어디 다니세요?", "부모님은 뭐 하세요?", "결혼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어쩌면 대화라기보다는 확인, 탐색이라기보다는 검증과 같은 말들.


두 시간을 떠들고 헤어지는 길, 문득 깨닫는다. 상대의 직업과 연봉과 가족 구성은 알게 됐는데, 정작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농담에 웃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하나도 모른다는 걸. 이상하다. 분명 두 시간이나 '대화'를 했는데.


에리히 프롬은 이미 70여 년 전,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1956)에서 이러한 현상을 예견했다. 그는 현대인의 성격 구조를 '시장지향적 성격(Marketing Character)'이라 명명하며, 사랑마저 시장의 논리에 잠식당했다고 진단한다.


프롬의 문장은 날카롭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들이 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을 발견했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 거래에서 상대방의 교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고려된다. 그것이 사회적 가치이든, 물질적 재산이든, 또는 더 숨겨진 심리적 자질이든."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사람을 고른다. 내 가치와 상대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손해 보지 않는 거래를 성사시키려 한다. 프롬은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교환'이라 불렀다.


f497e9a6a549469528d60f958345ae73.jpg


과거의 사랑이 우연한 마주침과 서서히 스며드는 '존재'의 영역이었다면, 현대의 사랑은 철저히 계산된 '소유'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우리는 이제 상대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설정한 필터링 조건을 통과한 결괏값이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러 가는 '검수자'의 태도를 취하곤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찾는 건 '함께할 사람'인데, 정작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조건의 교환'처럼 보인다.


프롬의 통찰을 70년 후의 현실에 적용한 사회학자가 있다. 이스라엘 출신의 에바 일루즈(Eva Illouz)다. 그녀는 2012년 저서 《왜 사랑은 아픈가(Why Love Hurts)》에서 현대 연애가 왜 이토록 고통스러워졌는지를 사회학적으로 해부한다.


일루즈의 핵심 진단은 '선택의 과잉(Abundance of Choice)'이다. 데이팅 앱은 무한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스와이프 한 번이면 수백 명의 프로필이 펼쳐진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녀의 분석이다. 항상 "더 나은 옵션"이 있을 것 같으니까, 지금 눈앞의 사람에게 올인하기 어려워진다.


일루즈는 이렇게 썼다. "선택의 풍요는 특정한 형태의 헌신 공포증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반드시 친밀함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항상 선택지를 열어두도록 위치 지어지기 때문이다."


이 구조 안에서 우리는 '지금 이 사람'보다 '아직 만나지 않은 더 나은 사람'을 상상하게 된다. 눈앞의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프로필을 떠올린다. "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야."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감옥. 우리는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선택하지 못하게 된다.


일루즈에 따르면, 만남을 주선하는 앱과 결혼 정보 시스템은 우리에게 선택의 아키텍처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프로필의 홍수 속에서 인지적 과부하를 겪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검색어 필터링' 전략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검증의 대화'는 단순히 우리가 까다로워졌기 때문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인터넷 만남은 낭만적 만남을 '쇼핑'과 유사한 인지적 과정으로 변환시킨다. 여기서 주체는 자신의 취향을 명확히 정의하고,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며, 가장 효율적인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가 된다."

— 에바 일루즈, 《차가운 친밀성》


즉, 우리가 상대방을 만나자마자 '호구조사'를 하는 건, 시스템이 우리 손에 쇼핑 카트를 쥐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러 들어갔지만,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가장 가성비 좋은 상품을 골라내라"고 속삭인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효율성 속에서, 관계의 온도는 차갑게 식어버린다. 차가운 친밀성이라니. 이토록 적확하면서도 쓰라린 표현이 있을까.


일루즈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감정의 합리화'다. 현대인은 자기감정을 분석하고, 언어화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배운다. "왜 이 사람이 좋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건강한 관계"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 심리 상담, 자기 계발서, 연애 코칭—전부 이 흐름 위에 있다.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게 아니라, 평가와 관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첫 만남은 '탐색'이 아니라 '검증'이 된다. "이 사람이 내 기준에 맞는가?"를 확인하는 면접. 우리는 상대의 데이터를 수집했을 뿐, 그 데이터 뒤에 숨 쉬는 인간을 만나지 않았다.









조건의 역설 - 사랑의 알고리즘: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침입



그런데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이혼 통계를 보면, 이혼 사유 1위는 여전히 '성격 차이'다. 경제적 문제도, 외도도 아닌, 성격 차이. 수십 개의 조건을 확인하고, 수차례의 검증을 거쳐 선택한 상대와의 관계가 결국 '성격이 안 맞아서' 끝난다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키, 직업, 연봉, 자산, 가정환경. 우리가 그토록 꼼꼼히 확인했던 그 모든 조건들은 정작 관계의 지속 여부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는 뜻이다. 마치 서버의 하드웨어 스펙을 아무리 완벽하게 갖춰도, 정작 소프트웨어의 호환성 문제로 시스템이 충돌하는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근본적인 착각을 마주한다. 가격(Price)과 가치(Value)를 동일시하는 오류.


가격은 시장이 매긴 값이다. 연봉, 학력, 키, 외모 등급. 이것들은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다. 데이팅 앱의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종류의 데이터다.


하지만 가치는 다르다. 가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다. 내가 지쳤을 때 건네는 말 한마디의 온도, 내 농담에 웃어주는 타이밍, 싸운 다음 날 아침 먼저 건네는 커피 한 잔. 이런 것들은 프로필에 적을 수 없다.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관계를 지속시키는 건 바로 이렇게 아날로그적이고 사소한 일상이 아닌가.


비싼 레스토랑이 항상 맛있는 건 아니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실망하고, 골목 어귀 작은 식당에서 인생 최고의 한 끼를 만나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높은 가격(스펙)이 높은 가치(좋은 관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혼 사유 1위가 경제적 문제도, 외도도 아닌 '성격 차이'인 이유가 여기 있다. 가격표만 꼼꼼히 확인하고, 정작 가치는 확인하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3d8e60d01f4a02421bd0c86e40c94554.jpg


이 시스템 속에서는 타인만 상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상품으로 전락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다.


상품으로서의 한 개인은, 프롬이 명명한 시장 지향적 성격이라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 유형의 현현이다. 그가 말한 '시장 지향적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얼마나 잘 팔리는가(Exchange Value)로 결정한다.


"현대인에게 사랑은 '자신의 인격 패키지(Personality Package)'와 상대방의 패키지 사이의 공정한 교환이 된다. 거래의 양 당사자가 시장 가치를 고려할 때, 자신이 살 수 있는 최고의 대상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 때만 사랑은 성립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프롬의 통찰은 70년이 지난 지금,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한 예언이 되었다.


우리가 앱 프로필에 적어 넣는 연봉, 직업, 키, 외모 등급. 이것들은 단순한 정보를 넘어 시장에 매물로 나온 나라는 상품의 '가격표'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의 시장 가치는 얼마인가?" 그리고 상대를 보며 계산한다. "이 정도 가격(스펙)을 지불하고 저 사람을 구매해도 손해가 아닌가?"


사랑이 예측 불가능한 '빠짐(Fall in)'의 경험이 아니라, 철저한 손익분기점 계산이 동반된 '거래(Deal)'가 되어버린 기원. 그곳에는 사용 가치(Use Value, 인간적 매력)가 아닌 교환 가치에 매몰된 슬픈 현대인의 자화상이 있다.


엔지니어의 언어로 읽어보면 이렇다. 우리가 프로필에서 확인하는 것들은 대부분 '정적 데이터(Static Data)'다. 한 번 입력되면 쉽게 변하지 않는 값들. 키는 크게 변하지 않고, 학력은 고정되어 있으며, 직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이 값들은 측정하기 쉽고, 비교하기 쉽고, 필터링하기 쉽다.


하지만 관계는 '동적 시스템(Dynamic System)'이다. 두 사람이 만나 상호작용하면서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데이터들. 대화의 리듬, 갈등을 다루는 방식, 침묵이 불편한지 편안한지, 상대의 작은 배려에 감사를 표현하는지, 내 실수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런 것들은 프로필에 적을 수 없다. 아니, 적는다 해도 검증할 방법이 없다.


"배려심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수많은 프로필에서 이 문장을 본다. 그런데 배려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프로필로 알 수 없다. 그건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어떤 말투를 쓰는지, 상대가 음식을 흘렸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계산서가 나왔을 때 '고마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지. 이런 것들은 체크리스트에 적을 수 없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드러나는 값이다. 즉, 그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고, 서로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순간에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는 값이다. 런타임(Runtime)에만 드러나는 데이터라는 얘기다.


1849e1531e29aaec27d641f21a4f399a.jpg


프롬은 이를 '존재(Being) 양식'과 '소유(Having) 양식'의 차이로 설명한다. 소유 양식의 사랑은 상대를 '갖는 것'에 집중한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을 획득하고, 그 관계를 소유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라는 객체가 가진 속성(Properties)을 파싱(Parsing)하고 검증(Validation)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이와 같은 ‘검수자’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도구’로 전락시킨다. 프롬은 소유 양식의 인간관계가 타인을 나의 안정을 지켜줄 물건이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보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내 커리어에 방해되지 않을 사람인가?", "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줄 배경을 가졌는가?", "내 노후를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자산이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의 중심에는 ‘나’의 안온한 성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의 타인만이 존재한다.


반면 존재 양식의 사랑은 상대와 '함께 있는 것' 자체에 집중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변화한다.


문제는 우리의 시스템이 철저히 소유 양식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앱의 알고리즘은 정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매칭하고, 우리의 뇌도 그 데이터를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도록 훈련된다. "이 사람은 내 조건에 맞는가?" 이 질문이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떤 느낌인가?"보다 먼저 떠오른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정교한 필터링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고독하게 만든다. 조건이라는 ‘정적 데이터’는 완벽할지 몰라도, 그 데이터들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 즉 한 인간의 ‘찬란한 궤적’은 모두 걸러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상대의 완벽한 스펙을 확인할 때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틈새에서 비치는 인간적인 온기와 고유한 무늬를 발견할 때다.


하지만 시스템은 효율을 위해 그 ‘소음(Noise)’들을 제거한다.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불확실성과 비효율성을 오류(Error)로 취급하여 차단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장 완벽한 타인과 만나지만, 정작 그 안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내 편’은 찾지 못하는 기이한 버그에 직면한다.






하드웨어라는 최소 사양, 그리고 목적의 전도


그런데, 조건을 무시할 수 있을까?


현실의 연애는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취향과 기준이라는 '필터'를 가지고 있다. 외모를 보고, 경제력을 따지고, 가정환경을 살피는 것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실존적인 과정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짝짓기 전략'이라 부르고, 경제학자들은 '합리적 선택'이라 부른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우리가 상대를 평가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위선에 가깝다.


엔지니어링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아무리 고도화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도, 그것을 구동할 최소한의 하드웨어 스펙은 반드시 필요하다. RAM이 부족하면 프로그램은 멈추고, CPU가 감당하지 못하면 시스템은 과부하로 다운된다. 마찬가지로, 관계에도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인프라는 존재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건 낭만 치사량은 높겠지만, 위선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풀어야 할 문제는 그 '최소 사양'이 어느 순간 시스템의 '목적' 자체가 되어버릴 때 발생하는 현상, 이라고 조금 더 좁혀봐도 될까?


우리가 서버를 구매하는 이유는 그 위에서 돌아갈 서비스 때문이다. 서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서버가 가능하게 할 경험과 가치가 목적이다. 그런데 현대의 연애 시장은 정반대로 작동한다. 어떤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갈지는 관심 밖이고, 오직 '얼마나 높은 스펙의 서버를 소유했는가'를 증명하는 데 모든 에너지가 쏠린다.


즉, 목적이 전도된다.


상대를 향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 대신, "당신은 무엇을 가졌나요?"를 먼저 검수하는 태도. 상대방을 내 인생이라는 시스템을 풍요롭게 할 동반자가 아니라, 나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거나 안온한 생활을 유지해 줄 '부품'으로 바라보는 시선. 우리는 이것을 '현실적'이라 포장하지만, 실상은 관계의 본질을 수단과 목적에서 통째로 뒤집어버린 것이다.


융 심리학자 에스더 하딩은 이러한 태도의 뿌리를 '내면의 공허'에서 찾는다. 스스로 일궈낸 자기 확신과 내적 충만함이 없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줄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외부 조건에 의존할 때, 상대방 역시 그 조건의 일부로 편입된다. 배우자는 내 가치를 증명할 액세서리가 되고, 연인은 내 불안을 잠재울 진정제가 된다.


이런 도구적 시선이 상호적(Reciprocal)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내가 상대를 도구로 바라보는 순간, 상대 역시 나를 도구로 대하는 것이 '합리적'이 된다. 관계는 거울과 같아서, 내가 보내는 시선은 고스란히 반사되어 돌아온다. 첫 만남에서 상대의 직업과 연봉과 자산을 검수하는 사람은, 자신 역시 같은 기준으로 검수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검수를 통과했다 해도, 그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아니라 '거래할 자격'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06ea2fbea3aeffe5ccefb8b73608b4c4.jpg


이 거래적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트랜잭션(Transaction)으로 처리된다.


이 시장에서 남자는 연봉과 직업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여자는 나이와 외모라는 등급표를 단다.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게, 우리는 서로를 진열대 위의 상품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만 가득한 기이한 구조다.


식사 한 끼가 '함께한 시간'이 아니라 '지불한 비용'이 된다. 배려가 '자연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투자 대비 수익'으로 계산된다. "고마워요"라는 말이 정서적 교감이 아니라 영수증 확인이 된다. 스테이크 한 접시의 가격은 상대의 호의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당연한 서비스 비용으로 처리된다. 이런 관계에서 인간적인 결이나 우연한 감동이 설 자리는 없다. 모든 것이 계약서에 명시된 조항처럼 처리되고, 명시되지 않은 것은 '기대할 권리 없음'으로 분류된다.


이 사실이 씁쓸한 이유는, 이 게임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격표가 사랑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 시스템이 건네준 체크리스트를 손에 쥐고, 오늘도 '적당한 상대'를 검색한다.


다른 방식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격표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사람을 바라보는 일? 검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일?







런타임: 예측 불가능한 모험의 시작


한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언젠가 본 어떤 커플. 카페 구석 자리에서 각자 책을 읽고 있었다. 한 사람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상대에게 책을 내밀었고, 상대는 읽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책으로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거기엔 어떤 조건의 확인도, 검증의 시선도 없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잠깐 교차하고, 다시 흘러가는 두 사람의 세계.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결이 맞는다'는 것의 실체를 본 것 같았다.


또 다른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비엔나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그들은 서로의 직업도, 연봉도, 가정환경도 묻지 않는다. 대신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 "죽음이 두려워?", "사랑에 빠진다는 게 뭐라고 생각해?", "만약 이게 우리의 마지막 밤이라면?"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검증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그들은 이름도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대신 6개월 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보장도 없고, 계약도 없다. 그냥 믿음 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만들어낸 하룻밤의 밀도는 영원을 붙잡아 둔다.


08e51cbc6739d5a4148a69447dc4815d.jpg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이런 종류의 용기일지도 모른다. 조건을 확인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볼 용기. 검증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볼 용기. 효율적이지 않다. 합리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나.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그의 저서 《사랑 예찬》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아무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세계에는 더 이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손해 볼 위험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모험이다."


안전한 거래를 원한다. 실패하지 않는 선택, 손해 보지 않는 투자. 확증편향과 손실회피 성향이 기가막히게 작동한다. 하지만 그 안전함 속에서 우리는 정작 사랑이 요구하는 것—Loss 가능성을 안고 뛰어드는 모험—을 통째로 삭제해 버린 건 아닌지 돌아본다.


조건이라는 안전장치 뒤에 숨어버린 이들에게, 바디우는 진짜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모험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이 완벽해 보이는 검수 시스템을 뚫고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그 순간,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사람은 과연 '실재'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즉, 우리가 '첫눈에 반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말 상대방을 본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 있던 어떤 이미지를, 상대방의 얼굴 위에 투사한 것일까?


다음 화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버그, '투사(Projection)'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