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무기들>, 나만의 시그니처를 찾는 여정

트레바리 독서 모임 후기

by 르네

인트로: 왜 무기인가


'브랜드'라는 단어는 항상 내 인생에서 화두였다. 회사 제품의 브랜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세상에 어떤 가치를 남기고 싶은지. 그런 질문들에 답하고 싶은 본질적인 갈망을 품고 산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다양한 궤적을 그려왔다. 나무를 깎고 공간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고, 제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때도 있었다. 음악을 빚어 무대 위에 서기도 했으며, 글과 콘텐츠를 무기로 시장의 니즈를 파악해 나만의 비즈니스를 꾸준히 실험하던 시간들도 거쳐왔다. 누군가에게는 파편화된 이력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매 순간이 '나'라는 브랜드를 실험하고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이었다.


3ae7130d1ae6c9b00a1b92b78d263dba.jpg


최근에는 본업의 경계를 넘어서 여러 가지를 벌이고 있다.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커뮤니티를 만들어 운영하고, 머릿속에만 있던 서비스를 실제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질문은 언제나 같았다. 내가 만드는 이 가치들을 어떻게 하면 더 뾰족하게 세상에 전달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참여한 트레바리 모임, 이번 달의 책은 초인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윤진호 작가의 <마케터의 무기들>이다.


책의 첫 장에서 저자는 나를 멈춰 세우는 질문을 던진다.


"맨손으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들 것인가?" (p.12)


여기서 말하는 '맨손'은 단순히 열심히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남들과 똑같은 판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며 자리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경쟁. 반면 '무기'는 그 싸움의 판 자체를 바꾸는 힘이다.


책은 날카로운 비유를 던진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다. 열심히 뛰어들어 하나씩 잡아낸다. 그런데 어느 날 '무기'를 든 사람이 나타나 단숨에 서너 마리를 낚아챈다. 맨손이들은 놀라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결국엔 따라 하기 시작하고, 판은 완전히 바뀐다.


"맨손으로 싸우는 자는 무기로 싸우는 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가요? 아예 싸움의 개념이 다르죠?"


저자의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열심히'가 아니다. 맨손이들도 충분히 열심히 한다. 문제는 열심히 해봤자 같은 판에서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뿐이라는 것. 무기를 든 사람은 아예 다른 싸움을 한다. 판을 넓히는 싸움.


5939fe8f378fe09e5e8d4890b27a7793.jpg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봤다. 과거의 나는 분명 맨손으로 허우적대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 다 하는 방식으로, 남들 다 가는 길에서, 그저 더 열심히 하면 될 거라 믿었던 때. 그리고 어느 순간 나만의 도구를 손에 쥐었을 때 비로소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날 모임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붙잡고 세 시간 가까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만의 무기는 뭘까?"











각자의 키워드: 무기의 재료들


모임은 각자가 책에서 발견한 키워드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에게 꽂힌 단어, 문장, 개념을 꺼내놓았다.


누군가는 루틴을 꺼냈다. 침대를 아예 없애버리고 생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침대가 있으면 눕고, 눕다 보면 시간이 새어나간다는 거다.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저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책에서 그는 일부러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 글을 쓴다고 했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해야 할 것들에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견뎌야 하죠. 그리고 그 결과 불편한 의자에서 수백 개의 글들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p.48)


편안함은 몰입의 적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루틴을 이렇게 정의한다.


"루틴은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입니다. 어떤 무기가 있다면, 루틴은 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기초 체력과도 같습니다." (p.44)


무기가 있어도 휘두를 체력이 없으면 소용없다. 그 체력을 만드는 게 루틴이라는 것.


빌런이라는 키워드도 나왔다. 직장에서 마주치는 어려운 상사, 힘든 동료, 꼬이는 상황들. 보통은 피하고 싶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한 참가자가 이런 관점을 던졌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 니체의 말로 알려진 문장이다. 영화 주인공에게 빌런이 필요하듯, 내 인생에도 그런 존재가 필요할 수 있다는 거다. 빌런을 만나면 도망가는 게 아니라, 그걸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사고의 전환.


기록도 여러 번 언급됐다. 저자는 자신의 무기를 '기록 과몰입'이라고 말한다.


"저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바일 앱, 직접 적는 노트, 구글 드라이브까지 온갖 곳에 생각을 담는 저장소를 두고 습관적으로 담습니다. 그렇게 담아두면 사라지지 않는 저의 재료가 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잘 쓰게 되죠." (p.24)


무언가를 시작할 때 아이디어를 새로 짜내는 게 아니라, 쌓아둔 것에서 꺼낸다는 말이 와닿았다. 기록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한 재료 창고인 셈이다.


스크린샷 2026-01-14 092805.png


그리고 철학. 책에는 니체의 '어린아이' 개념이 등장한다. 낙타처럼 짐을 지고 순응하며 살다가, 사자처럼 저항하고, 결국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창조하는 단계로 나아간다는 이야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 자체를 즐기는 상태.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도 이 개념을 자신의 무기로 꼽는다.


"어린아이는 상상을 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에 순수한 존재죠.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변화시키는 존재입니다." (p.213)


각자의 키워드를 듣다 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루틴, 빌런, 기록, 철학. 전부 화려한 스킬이 아니다. 남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자기 안에서 묵묵히 쌓이는 것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거다.


"'기술'은 시간이 지나 금방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점'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p.43)


나는 그날 과정의 자산화라는 키워드를 꺼냈다. 결과물 자체보다 그걸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구조화하는 것.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여러 시도들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무기가 필요한 이유


키워드 공유가 끝나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으로 흘러갔다. "왜 하필 지금, 무기가 필요한 걸까?"


누군가 AI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주제다. 코드도 써주고, 글도 써주고, 이미지도 만들어주고, 전략도 짜준다. 예전에는 몇 시간씩 걸리던 일이 몇 분이면 끝난다. 그러면 질문이 생긴다. 이 시대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뭘까? 대체되지 않는 영역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한 참가자가 리더십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AI 시대에 중간관리자는 사라질 거라는 예측이 많다. 단순히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아래로 전달하고,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보고서를 올리는 역할. 그런 건 AI가 훨씬 잘한다. 그래서 리더십이란 결국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것도 사실 AI가 꽤 잘한다. 시장 데이터를 분석해서 "앞으로 이 방향이 유망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AI의 특기다. 방대한 정보를 종합해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는 일. 비전이 리더의 유일한 역할이라면, 그 리더야말로 대체 1순위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대체 불가능한 건 뭘까? 모임에서 여러 의견이 오갔다. 결국 내가 도달한 생각은 두 가지 단어로 압축됐다.


"굳이"와 "리스크".


AI는 효율적이다. 최적의 답을 찾고,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한다. 그런데 인간의 위대한 것들은 대부분 효율과 거리가 멀다. 남들이 "그걸 왜 해?"라고 말릴 때 '굳이' 하는 것.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손해인데 '굳이' 뛰어드는 것. 그게 사랑이고, 예술이고, 장인정신이고, 혁신이다.


그리고 리스크. AI는 확률을 계산할 뿐, 자기 존재를 걸지 않는다. 내가 "이 방향으로 가자"고 말했는데 틀리면, 나는 평판이 깎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 AI는 그런 게 없다. 틀려도 전원만 끄면 된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따르는 건 그 사람의 말이 논리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 말에 인생을 걸고 있다는 진정성을 봤기 때문이다.


이 모든 차이의 근간에는 인간의 유한성이 존재한다. 인간에게 삶은 실존적이다. 실존성이란 결국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무게감에서 비롯되는 개념이다. 언제든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과 달리, 인간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모든 선택은 곧 자기 자신의 일부를 거는 행위가 된다. AI에게 데이터는 언제든 수정 가능한 연산 값이지만, 인간에게 경험은 깎여나가는 생명의 조각이다. 이처럼 실패하면 아프고 사라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그 ‘실재하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를 AI와 구분 짓는 가장 인간다운 무기다. 유한한 생을 살기에 우리는 비효율적인 낭만에 목숨을 걸고, 결과에 책임을 지며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스크린샷 2026-01-14 093722.png



저자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한다. 책 후반부에서 그는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한다.


"주류라는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어느새 다른 누군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과거의 주류에 있던 이들은 하나둘 사라진 채 보이지 않는 세상의 어딘가로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p.220)


주류의 자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계속 바뀐다. 반면 비주류는 정해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 채 버틸 수 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주류는 세상을 키우고, 비주류는 세상을 바꿉니다." (p.226)


효율적인 것, 검증된 것, 안전한 것. 그건 이미 주류의 영역이고, 점점 더 AI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에게 남는 건 비효율을 감수하고도 '굳이' 밀어붙이는 영역이다. 리스크를 지고, 책임을 지고, 그래서 신뢰를 얻는 영역.


결국 무기란 단순한 스킬이 아니다. 나만의 관점, 나만의 철학, 그리고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가는 태도. 저자의 말처럼 기술은 금방 변하지만, 관점은 계속 무기가 된다.





저자의 이야기: 5년의 실패와 하나의 시그니처



대화가 깊어지면서, 우리는 저자가 책 너머로 들려준 실제 커리어의 이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화려한 이력 뒤에는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실패의 궤적'이 있었다. 베트남 유튜브 채널, 수십 번 낙방한 웹툰 공모전, 성장이 멈춰버린 부동산 팟캐스트까지. 당시 저자가 사이드 프로젝트로 벌어들인 수익은 사실상 '0원'에 수렴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어떤 시도는 실패하고, 어떤 시도는 무기가 되는가? 저자는 그 비결을 '본캐와 부캐의 시너지'에서 찾는다.


"부캐와 사이드 프로젝트 영역을 선정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세상이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략) 사이드 프로젝트는 본캐와 함께 이어질 때 더 큰 시너지를 만들 수 있고, 더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p.241)


그의 이력은 화려해 보인다. TVN에서 콘텐츠 마케팅을 했고, 디즈니 코리아를 거쳤고, 노티드와 다운타우너 같은 F&B 브랜드의 마케팅 총괄 디렉터를 지냈다. 하지만 그가 꺼낸 이야기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TVN에서 일할 때, 그는 수많은 콘텐츠를 마케팅했다. 드라마, 예능, 다양한 프로그램들.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이 생겼다고 한다. "나의 콘텐츠는 뭐지?" 회사의 콘텐츠를 열심히 알렸지만, 정작 자기 이름으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디즈니로 옮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블, 픽사, 스타워즈. 세계 최고의 IP들을 다뤘다. 하지만 결국 그건 디즈니의 스토리였지, 자신의 스토리가 아니었다. "내 스토리는 무엇일까?" 질문은 더 선명해졌다.


F&B 브랜드에서 일하면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노티드는 도넛, 다운타우너는 버거. 사람들이 그 브랜드를 떠올릴 때 바로 연상되는 단 하나의 시그니처 메뉴가 있다. BBQ하면 황금올리브, 맘스터치하면 싸이버거. 그렇다면 나에게는? 'GFFG의 마케팅 총괄 디렉터'는 내 시그니처가 아니었다. 회사를 떠나면 사라지는 직함일 뿐.


"나는 '내 콘텐츠, 내 스토리, 내 시그니처'가 없구나. 이게 항상 나에게 불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업 외의 시간에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마케터니까 콘텐츠를 만들 줄 안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베트남 관련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30개 넘는 영상을 올렸다. 반응이 없었다. 웹툰 공모전에 도전했다. 27번 떨어졌다. 네이버 도전만화부터 시작해서 카카오, 레진, 심지어 강원일보 공모전까지. 전부 탈락. 부동산 팟캐스트 '부미붕'을 시작해서 1년간 매주 라이브를 했다. 청취자가 200명에서 더 이상 늘지 않았다.


5년 동안 번 수익은 13,000원. 그마저도 최소 출금액에 미달해서 실제로 손에 쥔 건 0원이었다.


그런데 이 실패담을 듣는 동안 이상하게 희망이 느껴졌다. 지금 저 자리에 앉아서 자기 책을 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5년 동안 13,000원을 벌었다는 거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환점은 글쓰기였다. 그는 실패의 괴로움을 브런치에 익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초인'이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실패 경험과 그 과정에서 얻은 마케팅 인사이트를 담았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쓴 게 아니라, 자기 감정의 독을 빼려고 쓴 글이었다.


스크린샷 2026-01-14 094439.png


그런데 반응이 왔다. 약 10개 매체에서 연재 요청이 들어왔다. 오프라인 강연 제안도 생겼다. 부캐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캐를 무기로 만드는 비결. 그것이 세상이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충분한 수요와 고객이 존재하고, 그 수요와 고객이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거죠." (p.242)


베트남 유튜브, 웹툰, 부동산 팟캐스트. 전부 그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그걸 원한 건 아니었다. 반면 마케팅 인사이트를 담은 글은 달랐다. 그의 본업에서 쌓인 전문성이 있었고, 그걸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본캐와 부캐는 서로 시너지를 만들 때 더 빠르게 커나갈 수 있죠." (p.241)


그는 지금 회사를 나와 '초인 마케팅 랩'을 운영하고 있다.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커뮤니티를 이끈다. 10년에 10권, 1년에 1권씩 책을 내는 게 목표라고 했다.


모임에서 그가 정리해준 핵심은 이거였다.


첫째, 꾸준히 나의 스토리를 콘텐츠로 꺼낼 것. 둘째,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명확히 할 것.


결과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과정을 공유하는 것. 모든 사람에게 말하려 하지 않고, 내가 진짜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 그렇게 쌓인 것들이 결국 나만의 시그니처가 된다.


"나를 찾게 만드는 콘텐츠는 무엇인가? 나만의 스토리는 뭘까? 나의 단 하나의 시그니처는 뭔가?"


저자가 던진 이 질문은 그날 모임이 끝난 후에도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다운로드.jpg








본질: '직업'을 넘어 '업'을 짓는 법


모임의 막바지, 우리는 각자가 하는 일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저자는 책에서 일의 정의가 모든 시작의 앞단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일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과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은 시작부터 다릅니다. (중략) 정의는 달라지지 않는 그 일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p.131-132)


명함에 적힌 타이틀은 사회적 약속일 뿐, 그것이 나의 본질을 온전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직업(Job)'의 단계를 넘어, 내 삶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인 '업(Vocation)'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 역시 엔지니어라는 직군에 몸담고 있지만, 나의 업을 단순히 코드를 짜는 행위로 한정 짓지 않는다. 그동안 거쳐온 수많은 이력 속에서 내가 일관되게 수행해온 역할은 결국 '무질서한 것들에 질서(Structure)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나무를 깎아 공간을 설계하든, 시스템의 아키텍처를 설계하든, 혹은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커리큘럼을 설계하든 그 본질은 같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분해하고, 이를 다시 논리적인 체계로 재구성하는 것. 이 '구조화의 역량'이야말로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만의 진짜 무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구조화는 기록을 통해 자산이 된다. 저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아이디어를 새롭게 떠올리기보다는 기존의 것들을 꺼내는 거죠." (p.24)


결과물 그 자체보다, 그걸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쌓아두는 것. 앞서 내가 꺼낸 키워드 '과정의 자산화'와 맞닿는 지점이다. 쌓인 기록들이 언젠가 꺼내 쓸 수 있는 재료가 되고, 그 재료들이 모여 나만의 패턴을 만든다.


스크린샷 2026-01-14 100425.png


모임원들 역시 각자의 직무를 새롭게 정의했다. 마케터를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닌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기획자를 '문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닌 '가치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재정의할 때, 우리가 휘두르는 무기의 궤적은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 '무엇을 하느냐(What)'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본질을 다루느냐(Value)'이다. 기술적 숙련도는 시간이 지나면 대체될 수 있지만, 나만이 가진 고유한 일의 정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한 아우라를 형성한다. 직업이라는 좁은 바운더리를 넘어 '업'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로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아웃트로: 기억되고 싶은 한 마디


모임의 마지막 순서는 각자의 비전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죽을 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무거운 질문이었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담담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누군가는 촛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밝혀주는 존재. 건강 코칭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문장을 붙잡고 살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저마다의 언어는 달랐지만, 결국 하나로 모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는 것.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변화라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두 단어를 꺼냈다.


"굳이"와 "낭만".


세상은 점점 효율을 말한다. 더 빠르게, 더 적은 비용으로, 더 확실한 결과를. AI는 그 효율의 끝판왕이다. 최적의 경로를 찾고, 가장 합리적인 답을 내놓는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하지 않는 게 맞는 일들이 많다.


그런데 인간의 위대한 것들은 대부분 효율과 거리가 멀다. 남들이 "그걸 왜 해?"라고 물을 때 '굳이' 하는 것. 손해인 줄 알면서도 '굳이' 뛰어드는 것. 사랑이 그렇고, 예술이 그렇고, 장인정신이 그렇다.


나는 그 '굳이'를 '낭만'이라고 부르고 싶다. 계산되지 않는 것. 설명되지 않는 것.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 효율의 시대에 비효율을 감수하면서도 밀어붙이는 태도. 그게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거 아닐까.


저자도 책의 끝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모습, 지금 살아가는 그 순간을 다음 생애에 똑같이, 동일하게 살아도 괜찮을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하죠. 그럼 다음 질문은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동일하게 반복해서 살아도 좋을 순간으로 지금 살아가지 않느냐고." (p.213)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다.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살아도 후회 없을 만큼 살고 있는가. 무거운 질문이지만, 방향은 명확하다. 후회 없이 살려면 결국 내가 진짜 원하는 걸 해야 한다. 효율적인 길이 아니라, 의미 있는 길을.


a24b5eac23ef84856976fe82d8d04793.jpg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내가 꿈꾸는 마지막 모습은 단순히 성공한 기술자나 사업가는 아니다. 그보다 누군가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지피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굳이' 남겨온 기록과 궤적들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할 용기가 되고, 가슴을 태울 열정이 되는 것.


그 낭만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나중에 꼭 도서관을 짓고 싶다. 단순히 책을 쌓아두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무기를 공유하고 스스로의 낭만을 설계할 수 있는 물리적인 성소를 직접 내 손으로 짓는 것. 내가 연마해온 무기들을 기꺼이 내놓아 누군가에게 '유효한 레퍼런스'가 되어주는 공간. 잘 만들어진 오픈소스 라이브러리처럼, 누군가 인생의 벽에 부딪혔을 때 내 궤적을 보며 "이 사람도 이렇게 길을 뚫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힌트를 얻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최소한 이런 사람으로는 기억되고 싶다. 남들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굳이' 자기 길을 간 사람. 효율 따위는 잊고 끝까지 낭만을 놓지 않았던 사람.


책의 첫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무기가 될 것인가, 맨손이 될 것인가."


4d4c2f2c-9223-4674-ab09-5008f884736b.png



매거진의 이전글완벽한 소울메이트와 70점짜리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