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의 죽음을 겪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
작은 이모가 돌아가셨다. 향년 67세. 췌장암으로 일 년 반을 고생하다 항암치료를 이기지 못하고 소천하셨다고, 엄마가 전화로 알려왔다.
"엄마, 어떡해. 이모 불쌍해서 어떡해."
"그래 말이다. 아까버서 우예 보내꼬. 아이고."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왔고 꾹 참고 있던 엄마도 통곡을 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은파호수공원에 와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엄마한테 전화를 받았다. 걷는 동안 이모, 엄마,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모에게 다녀왔더니
▲ 설 명절 부모님과 산책
내 기억 속 작은 이모는 지금 내 나이의 중년 여성이다. 한세대 전 여성인 이모를 보고 나는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했다. 큰 이모, 작은 이모, 막내이모까지 총 3명의 이모들은 내게 엄마의 일부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분들이다. 오랜 인연과의 작별로 어린 시절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마트에서 산 섬초는 흑색으로 보일만큼 진한 초록이었다. 뿌리째 데쳐 매실액을 넣어 무쳤다. 매실액은 작은 이모가 준 거다. 이모들이 간장, 된장, 매실진액을 담가서 주면 엄마는 나한테 나눠준다. 그걸 아는 이모들이 내 몫까지 넉넉히 준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모를 보면 엄마가 생각나는 건 이런 식재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이모가 손수 깐 도라지가 아직 냉동실에 있는데 저걸 어떻게 먹을지 모르겠다.
나는 이모한테 무얼 했나. 손 한번 잡고 고맙다는 말이라도 했나. 정을 준 사람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사는 게 산다고 할 수 있나.
다음날 새벽, 콩나물국밥을 한 그릇 사 먹고 대구 가는 버스에 올랐다. 펄펄 끓는 국밥이 한 사람의 죽음과 대비되었다. 언제부턴가 부고 소식을 듣고 대구에 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람의 부고는 막연해 보이는 죽음을 내 앞으로 당겨놓는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지하철을 탔고 빈소가 차려진 칠곡경대병원은 마지막역이었다. 앞선 학정역에서 같은 칸에 있던 승객이 모두 내리고 나만 남았다. 정신없이 가다 보면 어느새 종착역에 도착하는 건 삶이나 지하철이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이모는 설 명절 2주 전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우리 식구들도 이번 명절은 기분이 가라앉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모부와 사촌동생들이 엄마 없는 명절을 어떻게 보내는지, 남은 이모들 이야기로 돌아오고는 했다.
"이렇게 십 년을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노?"
막내 이모가 한 말을 엄마가 전했다. 가까이 살면서 의지하던 언니를 잃은 동생이 느꼈을 허망함과 삶의 무상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아빠가 슬픔 때문에 삶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모의 죽음 앞에서 내 부모의 안위만 챙기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전에는 자식들 키워서 출가하면 할 일을 다 했다고 환갑잔치를 하고 다음은 여생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각자 사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삶이 지루하고 권태로울 수밖에 없어요."
내가 말했고 아빠가 말을 이었다.
"텔레비전에 대기업 이사로 퇴직하고 제빵사가 된 사람이 나왔어. 오래전부터 빵 만드는 일이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좋아 보이더라고."
"사무직이었던 사람이 퇴직하고 몸 쓰는 일을 하면 만족도가 높대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아빠는 고향에 내려가서 동네 사람들의 기계를 고쳐주면서 살까 생각해 봤고, 도시 외곽에 하천이 흐르고 낮은 산이 있는 동네의 단독주택을 알아본 이야기를 했다. 말 나온 김에 아빠가 말한 대구에서 가창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지역에 가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내 의견보다 아빠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들어주는데 나는 신경 썼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가는 대화
하지만 가족과의 대화는 잘 되는가 싶다가도 잠시 방심하면 특정 어느 시기로 돌아가버린다. 세를 살고 있던 집이 구입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평당 100만 원이 일 년 반 만에 650만 원으로 올라 이후 십 년 동안 집을 사지 못했다는 익숙하고도 반갑지 않은 이야기. 아빠는 사지 못했던 원인이 엄마한테 있다며 40년 전 일을 어제일처럼 따지고 들더니 급기야 안방에서 낡은 수첩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전화요금 21,000
선교원 25,000
연탄 175,000
치과 70,000
금전출납부였다. 내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선교원을 다녔던 시절이니 39년 전, 지금의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36세 아빠가 쓴 깨알 같은 글씨가 있었다.
"연탄 진짜 비쌌네요?"
"한꺼번에 넣어서 그랬겠지 뭐."
"치과 비용 정말 부담스러웠겠다."
나는 한 장 한 장 읽으며 아빠에게 질문했고 화제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장강명 작가 강연에서 내가 질문한 얘기를 꺼냈다.
"아빠, 장강명 작가는 대기업 퇴사, 신문사 입사, 신문사 퇴사하고 소설가가 되었는데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계기나 용기가 있었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장강명 작가는 욱해서 결정한 거라고 당시에는 망했다고 생각했다면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북극성을 향해 가다 보면 북서풍이 불어와 바람을 타고 갈 때가 있는가 하면 남풍이 불어 한참 뒤로 밀려나가기도 하지만 다시 돛을 정비해서 북쪽으로 가는 게 삶이 아닐까요?'
나는 이 말이 내가 노력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게 인생이라면, 결과가 내 뜻대로 될 거라는 믿음은 버려야 지치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말로 들렸어요."
삶의 근원적인 부분은 놔두고 사건만 이야기하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어떤 것이 옳은가에 대해 판단하며 살아온 아빠는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고, 우리는 다시 과거가 아닌 미래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 기사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