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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n 24. 2023

소개팅할래?

내가 처음으로 남자를 사귄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유나가 제안을 해왔다.     


“소개팅할래?”     


유나는 팔다리가 길고, 얼굴이 예쁜 데다 옷 입는 센스가 있어서 눈에 띄는 아이였다. 게다가 공부까지 잘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자기 관리 종결자 같은 인물. 유나와 나의 자리는 거리가 멀어서 친할 기회가 없었는데, 수학여행에서 어울리게 되었다. 나로서는 소개해줄 아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나가 대단해 보였다.      


돌아오는 주말, 나는 약속장소인 호프집에서(고등학생이 호프집이라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형이라는 이름의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애를 만났다. 유나와 도형이는 꽤 친한 것 같았다. 둘 다 나한테 신경을 써줬지만, 나는 소개팅은 물론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있는 것도 처음이라 어색해서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뭔가 나한테 질문을 할 때마다 제발 나한테 관심 두지 말고 둘이 편하게 얘기하라며 속으로 기도했다.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밀랍인형 흉내를 내고 있는데, 남자와 장난치고 호탕하게 웃는 유나는 내 눈에 신처럼 보였다. 학교에서보다 밖에서 보는 유나는 더 돋보이고 어른스러웠다. 얘기를 들어보니 남자들 사이에서 유나의 인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고 나 같은 건 아예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남자라도 나보다 유나가 좋을 것 같아서 소개팅한 남자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다음 날 유나가 내 자리로 왔다.


“도형이가 너 마음에 든데. 새끼 눈은 있어가지고. 넌 어때?”

“나야 뭐...”

“에이. 너도 마음 있구나? 그럼 한번 더 만나봐. 약속 잡는다.” 

    

두 번째도 우리 셋이 만났고 분위기는 처음과 비슷했다. 이후에도 도형이와 둘이 만난 적은 없었고, 늘 유나와 셋이거나 도형이 친구들과 함께였다. 그때마다 나는 왜 그랬는지 도형이보다 유나한테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렇게 석 달쯤 지났을 때 유나 짝이 나를 찾아왔다. 


“유나가 소개해준 남자 있지? 유나 전 남자 친구의 친구인데 사귈 때부터 둘이 좋아해서 나한테 얘기했었어. 전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그 친구와도 만날 핑계가 없으니까 너를 소개해 준 거야.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아, 역시 그랬구나. 나를 속였구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유나 짝에게 그 얘기를 듣는 순간만큼은 내가 등신 같았고 머리가 아득해질 만큼 수치스러웠다. 어떤 사실을 나 혼자만 안다고 생각할 때와 다른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그날 도형이한테 전화해서(사실은 삐삐 음성메시지로 집에 전화하라고 해서) 그만 만나자고 했다. 그 말이 도형이한테 아무 동요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도형이는 앞으로 유나를 만날 구실이 없어지는 걸 걱정했을 거다.


도형이가 나한테 반지를 준 게 있었는데(결혼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반지를 줘야 정식으로 사귀는 걸로 인정하는 문화가 있었다) 나는 그걸 유나에게 주었다.     


“도형이한테 네가 돌려줘.”     


유나한테는 도형이와 헤어지기로 했다고만 하고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유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뒤에 유나가 도형이와 사귀었더라도 나는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을 거다.      


한 번은 도형이가 자기가 아르바이트하는 피자가게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한참을 가야 하는 큰 호텔이 몇 개 있는 곳이었다. 유나와 함께 그곳을 찾아 나섰는데 우리가 다른 '피자헛'을 찾아 간 건지 직원에게 도형이 이름을 얘기했지만, 모른다고 했다. 나는 할 수 없다며 유나한테 피자나 먹자고 했지만 유나는 공중전화 부스를 들락거리며 도형이한테 삐삐를 치고 음성(메시지)을 확인했다.      


유나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난처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도형이를 만났다 하더라도 아르바이트생이 피자를 공짜로 줄 수 없을 거고, 거기까지 피자나 얻어먹으러 간 걸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가지고 갔다. 그 지점도 간신히 찾았는데 다른 곳을 찾아가기는 시간이 늦어서 도형이는 일하느라 연락이 안 되는 거라고 그만하고 피자나 먹자고 나는 유나를 설득했다. 친구 앞에서 남자친구한테 바람맞는 모습을 보여서 창피해할 사람은 나였는데 말이다.


유나는 학기 초부터 나와 친하고 싶었다고, 내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유나한테 속마음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말마다 유나와 붙어 다니던 즈음에 학교 아이들은 나와 유나를 단짝으로 보고 둘이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했지만, 나는 우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살갑게 대했던 그 아이를 나는 왜 편하게 대하지 못했을까.    


어반자카파의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노래가 있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데, 그 이유가 나는 특별하지 않고, 나의 감정은 오직 나만의 것일 뿐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서다. 현실은 늘 기대를 빗나가고 나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일 뿐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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