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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n 19. 2023

공기로 세팅해 주는 60만 원짜리 고데기

돈 안 드는 상상력이 솟아나길

공기로 세팅해 주는 60만 원짜리 고데기가 있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사고 싶어서다. 이십 대부터 컬있는 단발머리였던 나는 머리 손질을 잘하는 편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머리뿌리에 힘이 빠지고, 부스스해서 화창한 날씨에도 빗속을 걷다 온 여자 같았다. 그 처량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당장 미용실로 달려가고 싶지만, ‘누가 봐준다고’ 돈과 시간을 쓰나 하는 생각에 어느새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돈없이도 이장이 60만 원짜리 고데기라니 말이 되나. 석 달 전에 놀러 온 동동맘도 돈없이도 이장 변절했다고 했다고 했는데, 정말 내가 초심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동맘이 방문한 2박 3일 동안 외식만 했다. 첫날 이자카야에서 사시미, 하이볼을 먹고 십만 원 넘게 나온 술값을 동동맘이 내는 걸 시작으로 해장국, 커피 등 비싼 건 아니지만 밖에서만 먹었다. 동동맘을 보내고 나서야 집에서 밥 한번 못해준 게 마음이 걸렸다.      


동동맘이 돈을 쓰는데 내가 왜 아까운지 모르겠다. 동동맘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이제는 니돈도 아깝고 내 돈도 아까운 나이가 되었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아이들과 살림에 들어가는 돈이 많다 보니 헛돈을 쓰고 싶지 않다. 돈을 쓰고도 허기가 느끼느니 필요한 곳에 잘 쓰고 싶다.     


지인의 결혼식을 앞두고 가격이 제법 나가는 정장풍의 옷을 살까 하다가 이걸 내가 몇 번이나 입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였다. 결혼식에 한 번 입고 묵혀두겠지. 예전에 학원에 출근할 때 입던 옷들과 함께.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이 옷을 입고 과시할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누가 봐준다고’     


그러면서도 왜 고데기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가. 갑자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선생님이 공기고데기가 있을 거라는 확신에 톡으로 물어봤더니 얼리어답터답게 일 년 전에 샀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빌려달라고 했다. (<돈 없이도> 책을 낸 이후에 이런 일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상했다. 유튜브로 사용법을 보고 따라 했는데 영상처럼 컬이 나오지 않았다. 연습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았다. 고데기는 다음날 반납했다. 지선생님이 말했다.     


“어때요? 좋죠?”

“손에 익으면 편리할 것 같기는 해요.”     


결론은 안 사기로 했다. 유튜브 영상에서는 고데기로 빗기만 해도 머리에 윤기가 났는데, 내가 해보니 별 차이가 없었다. 드라기빗으로 땡겼을 때 잔머리가 제거되어 매끈해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공기 고데기 사용법 영상에서 배운 건 있었다. 머리카락은 캐러멜과 같아서 컬을 잡은 뒤 굳히는 단계를 거쳐야 유지력이 커진다는 것. 드라이할 때 열풍으로 컬을 잡고, (생각보다 오래) 냉풍으로 굳히면 머릿결 손상은 줄이면서 컬을 만들 수 있었다.     


동동맘이 한 말이 생각났다.      


“건조기를 사면 편할 줄 알았는데 일이 더 많아진 것 같아. 예전에는 빨래를 널고 개는 게 당연했는데 지금은 건조기에서 빨래를 빼서 개는 게 귀찮아졌거든. 요즘 식구들이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 입고 있다니까.”  

   

편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가전제품이 가사를 더 복잡하게 하는 건 아닐까. 휴대폰, 믹서기, 텔레비전 등 신형이라는 말이 붙은 제품을 사면 사용법을 익힐 생각에 머리부터 아픈 건 나만 그런 걸까?   

   

내 머리카락이 빗속을 걷다 온 여자 같은 것과 가사노동은 고데기와 건조기가 해결해 줄 수 없다. 해결해 줄 것 같은 환상만 심어줄 뿐.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면 지갑을 열지 않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나는 거실에서 글을 쓰는데, 5월이라도 몸이 차가워서 잠깐이라도 보일러를 돌려야 한다. 혼자 있는데 보일러를 틀자니 아까워서 방법을 생각하다가 등산 물통에 뜨거운 물을 담아 무릎 위에 올렸다. 금세 훈훈한 기운이 돌았고, 무릎 위에 함께 있던 보미도 물통에 허리를 지지면서 크르릉, 기분 좋다는 소리를 냈다. 계속 이런 돈 안 드는 상상력이 퐁퐁 솟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보일러 대신 따뜻한 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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