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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n 15. 2023

안다는 건

달려오는 부조리를 만날 때

보미와 월명산 등산로를 오르고 있는데, 이상한 기운에 뒤를 돌아보니 목줄이 없는 중형견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으악, 비명을 지르며 보미를 안아 올리고 뛰었는데 근처에서 주인이 개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혼비백산해서 뒤를 돌아보니 방향을 틀어서 가는 개의 궁둥이가 보였다.  

    

당황스러운 정적. 개 주인은 사과 한마디 없이 유유히 사라졌고, 죽을 뻔했던 보미조차 꼬리를 흔들며 땅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모두가 평화로웠다. 나만 가슴이 쿵쾅거린 채 서 있었다.     


이 상황이 더 웃기게 느껴진 건 내가 그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 질주하는 개를 발견하기 전,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바위는 내 것이라니. 나의 고난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돌을 밀어 올리는 연속적인 과정 속에 나는 창조자가 되어 관장하는 이가 된다니.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삶을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구나, 했는데 달려오는 부조리와 맞닥뜨린 거다.      


놀람과 분노, 억울함의 삼중주를 겪으면서 어떤 깨달음이 왔다. 머리로 아는 건 아는 게 아니구나. 이 생각을 한 또 한 가지 일이 있었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학생과의 과외 수업에서다.  

    

정치철학자로 알려진 아렌트 여사는 우리가 보통 ‘일’이라 부르는 활동을 ‘작업’과 ‘고역’으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인간의 노력, 땀과 인내를 수반하는 활동이며, 어떤 결과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전자가 자의적인 활동인데 반해서 후자는 타의에 의해 강요된 활동이다. 전자의 활동을 창조적이라 한다면 후자의 활동은 기계적이다. 창조적 활동의 목적이 작품 창작에 있다면, 후자의 활동 목적은 상품 생산에만 있다.     
전자, 즉 ‘작업’이 인간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물리적 혹은 정신적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고역’은 그 정반대의 조건에서 행해진 ‘일’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박이문, <일>의 일부다.      


이 부분을 읽다가 나는 생각이 교차했다. 17살 학생이 일을 작업과 고역,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까. 삶을 통하지 않고는 안다는 건 불가능한 게 아닐까.     


‘고역’처럼 느껴져서 학원을 폐업하고 글 쓰는 ‘작업’을 하고 있는 내가 이 글을 읽으니 ‘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일을 하는 동안 변화하는 나 자신을 느끼고, 새로운 땅을 밟은 기분이 들 때, 그렇게 내가 더 넓어지고 펼쳐질 가능성을 직감할 때, 그곳을 향해 찾아 나서고 싶을 때, 조금씩 변하고 성장하고, 내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일이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 일에 ‘지금’이 없고, 끝나기를 기다리고, 조금이라도 지체되거나 추가되면 화가 난다면, 끝난 후에 참은 나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면, 고역이다. 또한 일을 해야 하는 내일이 오는 게 두렵다면 고역이다.     


그렇다고 작업하는 시간이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기다려지는 건 아니다. 두세 시간 집중해서 글을 쓰고 나면 기분 좋은 피로감에 필요한 게 없는 상태가 되지만, 다음 글 쓰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건 아니다. 어쩌면 진짜 좋은 건 기다려지지도 두렵지도 않은 일이 아닐까.      


놀이공원, 백화점, 호텔에 가는 것처럼 들뜨는 일이 좋은 것 같지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미지근한 정도가 좋은 게 아닐까. 무덤덤하고 슴슴한 일상이 소중한 것처럼. 신나는 일은 끝나고 나면 공허해지고, 하는 동안 내가 사라진다. 와, 와, 하면서 내가 주체가 아닌 소비하는 객체가 되고 만다.     


쇼핑할 때 내가 특별해진 기분을 느끼지만, 그건 외부의 자극으로 비롯된 감정이다. 나이가 들수록 상실감과 무력감이 생기는 건 필연적이기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지해와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친구, 소비를 통해 나를 인정받고, 인식해 왔는데, 그 자극이 사라지면서 외로워지는 게 아닐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7시가 될 때까지 타닥타닥 자판을 두들기고 글이 술술 풀리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두 시간 집중해서 글을 쓰고, 딸아이 식사를 챙기고 곧장 자리에 앉아 쓰던 글을 이어 쓰거나 고치면 10시. 이제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책을 펼쳐드는 시간이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시간이다.

      

책을 읽다가 어떤 책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 책을 찾아 옆에 두고 다시 읽던 부분에 빠져들면, 도토리를 쟁여둔 행복한 다람쥐가 된 기분이다. 이런 일상이 늘 순조롭게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 가슴이 벅찰 때가 있다.


이렇게 마무리하려다가 이 기쁨도 돌을 밀어 올리는 고역을 했기 때문이라는 걸 또 알게 되었다.

머리로 아는 건 아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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