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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19. 2023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 뱀의 머리가 되자!

나이트클럽의 집중 마스터기간이 지나 바야흐로 내 나이 28세가 되었을 때다. 예전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벌떼의 흥이 오르면 간간이 출동하고는 했는데 하루는 B클럽에 들어설 때부터 낯선 기운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부킹 한 남자의 나이는 스무 살, 그 신사분은 나를 ‘이모’라고 불렀다. 조카가 생겼다는 사실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나는 그날 B클럽 졸업장을 가슴에 새겼다.          


지난 8년간의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기본이 45,000원인데 5만 원을 받아간 웨이터에게 거스름돈 5,000원을 달라고 하지 못한 내가 어엿한 죽순이로 성장했고, 몇몇 죽돌이와 친해져서 출근하면 ‘오늘의 수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정든 동료(웨이터, 죽돌이)와 함께 배우고 성장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였다. (아! 디제이도 있었다. 하다 하다 디제이 한 명을 좋아해서 ‘나의 디제이, 영원한 디제이’라고 노래를 부르던 일이 떠오름) 


B클럽은 소위 물관리라는 걸 해서 스무 살의 나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부단히 문을 두드린 끝에 B클럽은 세상은 용기 있는 자들의 것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B클럽의 귀한 가르침을 받들어 나는 이렇게 외쳤다.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 뱀의 머리가 되자!”          


나는 벌떼에게 이 말로 축사를 대신하고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나섰다. 어느 정도 수질이 보장되면서 편하게 놀 수 있는 곳을 향해 ‘나이트 원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즈음 원정대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멤버 다섯 중 둘이 결혼해 버렸고 한 명은 대구시민이 아닌 관계로 주말에만 합류할 수 있었다. 그때 내 옆을 지킨 사람은 다름 아닌 나와 이인조였던 주의 언니였다. 30대인 그녀는 나이트클럽에 나보다 진심이었고 경험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언니 또한 “네가 내 동생이었어야 한다”며 우리가 한 팀이 되는데 이견이 없었다. 언니가 보고 싶다. 언젠가 정 많고 흥 많은, 그래서 떠오르면 더 안타까운 언니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있을 거다.   

   

원정기간 동안 나는 나이트의 현주소를 쓴다는 학구적인 태도로 임했다. 위치와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고 매주 새로운 곳을 방문했는데, 이 업계에도 예외 없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있었다. B클럽처럼 수질관리 명목으로 손님을 가려 받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오일장을 연상시키는 곳도 있었다. 다니다 보니 마치 암행어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곳은 대구 방촌동에 위치한 동0클럽이었는데, 경영난에 시달리는지 무대 바닥에 청테이프가 붙어있어서 보기에도 사정이 딱해 보였다. 그런데 클럽 지배인 같은 분이 오더니 되려 술값을 받지 않고 VIP초대권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또 와달라며 문 앞까지 나와 인사를 하는 모습에 절실함이 담겨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쓰다 보니 쓸데없이 집중했는데,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얼마 전 전화통화에서 동동맘이 한숨을 쉬면서 한 말 때문이다.     


“우리 나이가 젊은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늙은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것 같아. 찬바람 부니까 이렇게 또 한 해가 간다 싶은 게 허망한 거 있지.”          


왜 아니겠는가, 나도 늘어가는 나이가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나이를 만으로 세어서 한 살이 줄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기왕이면 열 살쯤 팍 줄여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이트 원정을 떠났던 때를 떠올리고 아연해졌다. 그 시절 나는 의심할 것도 없이 나이가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28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였는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십 대에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데 대한 불안이 있었다. 작년과 다르게 피부톤이 어두워졌다던가 눈가에 실금이 생겼다던가 하는 지금 생각하면 가소로운 문제로 고민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은 속한 집단과 보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상대적인 것 같다. 스무 살 신사분이 나한테 이모라고 한 것처럼. 크흑. 

          

뉴스에 인천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노인이 많다는 보도를 봤다. 기자가 공항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한 70대인 분에게 노인정은 안 가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정색하면서 거기는 노인들만 가는데라고 딱 잘라 말했다. 나이에 대한 상대적 기준은 노년에도 예외가 아닌가 보다.  


다 소용없다. 아무리 그래봐도 거울을 볼 때마다 생기는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십 대의 모습을 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다. 결코 나일 수가 없다. 




얼갈이배추 한 단을 2,500원에 사 왔다. 경상도에서 '재래기'라고 부르는 생채를 한번 만들어 먹고도 많이 남아서 저걸 시들기 전에 먹어야 할 텐데 하다가 얼갈이배추된장국을 끓였다. 얼갈이배추를 데쳐서 된장, 마늘, 국간장을 넣고 재어두었다가 멸치육수와 함께 끓였다. 청양고추, 파를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맛을 봤더니 크... 가을의 맛이었다. 된장만이 아니라 채수가 섞인, 무의 깊은 맛처럼 담백하고 그윽한 맛이었다. 


부쩍 아침 공기가 쌀쌀해졌는데 뜨끈한 된장국 덕분에 속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고기 한 점, 조미료 하나 들어가지 않아도 진한 국물에 마음이 느긋해지는 아침이었다.       


“한 숟가락 들어보지 그래?”

연신 후루룩 거리는 내 앞에서 얼갈이 된장국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초밥이한테 말했다. 초밥이는 마지못해 국물 한 수저를 먹었다.

“윽...”

“나도 어릴 때는 이런 거 상에 올라도 안보였거든? 근데 지금은 너무 맛있는 거 있지?”

“어.”
감히 공감은 바라지도 않았다.

이제 크게 보이는 얼갈이배추된장국


얼갈이배추된장국은 이번에 처음 만들어봤다. 마트에 원래도 저렴한 돼지등뼈가 할인해서 3,500원이길래 사 와서 김치찜을 했다. 돼지등뼈의 핏물을 빼고 잡내를 없애기 위해 데치는 과정이 번거로워서 자주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해보니 국물도 진하고 살도 많았다. 그렇게 잘 먹고 났더니 등뼈로 해장국을 끓여볼까 하고 유튜브로 요리법을 검색하다가 얼갈이배추된장국도 알게 된 거다. 


적은 돈으로 사 온 식재료로 만든 음식에 흡족해하고, 이전에 해보지 않은 요리에서 새로운 맛을 발견하면 아직 내가 해볼 만한 일은 많이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40대의 희로애락을 20대의 나는 몰랐다. 모르기 때문에 40대가 되면 별로 재미없을 거라고 내 멋대로 짐작했다. 지금 내가 얼갈이배추된장국의 맛을 안 것처럼, 70대도 그만의 맛과 흥이 있을 거다.        

 

동동맘이 요즘 공부하고 있는 잡초학에 이런 말이 있다고 했다.      


“잡초는 생명력이 끈질겨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변화에 적응을 잘해서 살아남은 거래.”     


내게서 사라졌다고 여긴 건 어쩌면 변화한 것일지 모른다. 즐거움을 얻는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특별한 것에서 일상적인 것으로, 화려한 것에서 잔잔한 것으로, 단속적인 것에서 지속적인 것으로. 그렇게 생각해야지 어떡하겠는가. 남은 우거지로 등뼈해장국을 끓여봐야지.          

얼갈이배추생채로 차린 점심상


등뼈해장국에 들어갈 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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