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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an 01. 2024

딸과 함께 노고단 산행

시암재~성삼재~노고단정상~성삼재~시암재. 9.1km. 소요시간 4시간(AM 9시~PM1시)     

한 줄 소감: 체감은 지리산 종주한 것 같았음.     


원래 계획은 성삼재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 가서 일박을 하고, 1월 1일 일출을 형제봉에서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선생님이 겨울산을 연습도 안 해본 애를 데리고 가는 건 위험하다고 해서 계획을 바꿨다. 구례에 있는 펜션에서 자고 다음날 노고단 정상까지 가는 것으로.     


노고단을 가기로 한 날 새벽 6시, 내가 일어나서 준비를 하자 초밥이도 몸을 일으키더니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 심란함이 흘러넘쳤지만, 나는 모른척하고 아침밥을 차렸다.      


초밥이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내가 권하는 등산복을(내 거) 모두 거절했다. 오늘(12월 31일) 최저기온이 영상 4도라고 하고, 노고단 정도야 고속도로인데 괜찮겠지 하고 나도 초밥이가 입겠다는 대로 내버려 뒀다.



  

한 주 내내 영상을 웃도는 푸근한 날씨라 성삼재 휴게소까지 가는 도로가(12km) 얼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보슬보슬 내리던 비가 성삼재 5km 남은 지점부터 함박눈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성삼재 휴게소는 고도(1,100m)가 높고 기온이 낮아서 산 아래에서는 비가 와도 그곳에서는 눈이 내렸다. 고난이 눈앞에 닥친 줄도 모르고 초밥이는 온열시트에 몸을 지지며 자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야? 날씨 왜 이래? 눈이야?”

잠에서 깬 초밥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시암재부터 도로가 통제되어 있어서 나는 시암재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댔다. 애를 데리고 노고단 정상을 가는 것도 걱정이지만, 눈이 계속 오면 이따 눈길을 어떻게 내려가나, 여기까지 차를 끌고 온 게 무모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에미된 자가 불안해하면 초밥이가 무서워할 수 있으니 태연한 척 산행 준비를 시작했다.      


나: 안 추워?
초밥: 추워 죽을 것 같아. 바람이 숭숭 들어와.


그러게 추리링 바지는 안된다고 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초밥이한테 추리링 바지 안에 등산복 바지를 입으라고 하고, 나의 무적 후리스를 벗어주었다. 그리고 바람이 새어 들지 않게 버프와 모자, 우의로 몸을 꽁꽁 싸매주었다. 콧물도 닦아주고 머리카락을 쓸어서 비니 안에 넣어주고 버프를 눈 밑까지 올려주는데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는 초밥이를 보니 내 손을 일일이 거쳐야 했던 꼬맹이 시절이 생각났다. "괜찮아, 안 추워"하며 겨울에도 여름 교복에 후드티만 달랑 입고 가는 녀석이 살겠다고 고분고분한 걸 보니 놀리고 싶었다.


나: 요새 니가 빠짝 기어올랐는데, 오늘 역전됐다. 그지?     

초밥:...


얼마 전에도 피부화장을 하는 쿠션을 사려고 초밥이한테 쓰는 거 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얼굴에 검버섯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거는 커버 안돼.”     

하지만 오늘 초밥이는 나의 구역에서 순한 양이 되었다. 


복장과 장비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성삼재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살겠다고 고분고분해진 초밥




초밥: 왜 계속 오르막이야?


3분이나 지났나? 아직 산길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도로를 걷고 있는데 초밥이가 3분에 한 번씩 물어서 내려가자고 할까 봐 나는 뒤에서 밀어주며 눈치를 살폈다.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하자 초밥이가 라면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육개장이 필요한 것 같아서 얼른 편의점에 뛰어들어가서 육개장에 뜨거운 물을 부어왔다. 초밥이가 라면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노고단을 향해 길을 나섰다.


초밥이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늦게 와서 나는 저만큼 가서 기다렸다가 초밥이가 보이면 또 뭐라고 할까 봐 냉큼 도망가기를 거듭했다. 


초밥: 어떻게 이런 데를 오자고 할 수 있어?

나:...


이러니 도망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점



드디어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초밥: 뭐야? 끝난 거 아니야? 나 정상 안가. 못가!


나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포기하려던 찰나, 지원군이 등장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정상은 무조건 가야 합니다.”     


국립공원 직원이 안내소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나한테 투정을 부리던 초밥이는 그분의 말 한마디에 아무 소리 안 하더니 정상으로 몸을 틀었다.          


노고단 정상을 가는 길은 상상초월의 바람이 싸라기 눈과 함께 강타해서 초밥이 16년 인생에 최대 위기를 선사했다. 운무와 눈보라 때문에 보이는 것도 하나도 없는 정상을 찍고, 우박에 온몸을 두들겨 맞아서 얼얼해져서 내려왔더니 노고단 고개에 방금 도착한 사람들이 정상을 간다만다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초밥이가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     

     

초밥: 여기까지 왔으면 정상은 무조건 가야 해요. 안 가면 후회해요.

         

그 말에 내가 빵 터졌는데 아까 그 국립공원 직원이 또 끼어들었다.     

  

“혼자만 죽을 순 없지.”    

 

나: 저 아저씨 뭐냐? 난로 틀어놓고 들어앉아서 사람들 놀리는 것 같지 않냐?

초밥: 그니까.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

나: 정상에 뭐 볼 것도 없는데 넌 뭐 후회하긴 뭘 후회한다고 하냐?


크크크, 올라갈 때의 삭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내려갈 때는 농담이 절로 나왔다.



구례 펜션에서의 아침밥


추신: 일출산행을 하고 오느라 글 발행이 늦었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소원을 빌려고 했더니 지난 한 해 같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간 내가 바라는 게 없어졌다는 걸 알고 기분이 좋았지 뭡니까. 처음인 것 같아요. 바라는 게 없는 건. 독자님들께서도 바라는 게 없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겨울에 성삼재휴게소를 가신다면 차는 화엄사나 천은사에 안전하게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가는 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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