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똑똑한 줄 알았어요. 영어를 너무 잘해서 초등학교 때 학원선생님이 하버드대 가라고까지 했는데, 지금은 평범해졌어요. 하버드대는커녕 인서울도 못해요. 망했어요."
이렇게 말한 학생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영어에 한참 재미를 붙인 아이를 보고, 선생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칭찬을 한다는 게 하버드대라는 말이 나왔겠지만, 이런 칭찬은 아이에게 객관적인 성공이 있다고 믿게 할지 모른다. 돌아보면 나도 이와 비슷한 칭찬을 숱하게 했다.
예전에 심리학과를 가고 싶다고 한 학생에게 나는 의대를 가서 정신과를 전공하면 어떻겠냐고 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 일을 떠올리면 학생에게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흥미 있는 점을 물어보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나는 왜 학생의 경험과 기분을 그냥 들어주지 못했을까. 그 시절 나는 다수가 선망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데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학생들이 힘든 이유 중에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수의 사교육 선생님을 경험하는 것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찍부터 어른들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고, 내 마음보다 부모와 교사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는 일이 자율성을 떨어뜨리고, 자의식 과잉을 불러온 게 아닐까 하고. 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 스스로 시도하기를 주저하게 된 건 아닌지, 오랜 시간 사교육에 종사해 온 나에게 정작 아이들이 배운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자책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아이들의 심리적 긴장이 커진 또 하나의 원인으로 예전보다 친밀해진 부모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친구나 형제자매, 사촌들과 어울리는 일이 과거보다 줄어들었는데, 이는 상호소통 관계에서 갈등, 조율, 협력, 화해의 경험이 감소하는 걸 뜻한다. 대신 늘어난 부모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이 성과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보답하고 자신의 효용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 성적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딸아이가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그 이유 중에 하나에 부모에 대한 부채감과 낮은 자존감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부모에게 되갚을 수도 없고, 그만큼 자식에게 줄 수 없다는 체념이 아이들의 마음 깊이 깔려있는 게 아닐까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은 필성슈퍼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할머니, 세 자매의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성공과 실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머리를 또 굴려봐야지.”
엄마는 슈퍼가 위기를 맞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며 시든 채소로 반찬을 만들고, 절임배추, 갑오징어를 팔면서 고비를 넘긴다. 마치 새로운 기회를 받아 든 사람처럼 다음을 생각한다. 소설 속 엄마를 보고 나는 실패와 성공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전에 했던 실패는 내가 스스로 순순히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둘째 딸 은동은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용돈을 받는다. 연기학원비를 내기 위해 그 돈을 차곡차곡 모은다. 귀찮지만 용돈 때문에 시작한 일에서 은동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손에 힘이 없어서 열필도 제대로 쥐지 못한 할머니가 자기 이름 석자를 쓰고, 가족의 이름, 내가 살고 있는 지역, 반찬 이름을 써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버스 행선지를 읽을 수 없어서 매년 누군가와 동행해야만 했던 고창나들이를 혼자 해내고, 가슴 벅차하는 할머니를 보고, 은동은 한 사람의 내면에 무언가 자라고 커나가는 것, 그것이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지 느끼게 된다. 할머니 덕분인지 은동도 포기하지 않는다. 연기학원 원장에게 재능 없다는 말을 들어도 실패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성공은 주저앉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 일어선 그 모든 순간이 아닐까. 나를 그만둘 수 없게 한 어둠 속 작은 빛, 차마 버릴 수 없는 빛을 향해 내딛는 그 한 발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작은 빛'을 품고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실패라고 해도, 단 한 사람만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