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라디오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는데
때로는 음악보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편이다.
물론 음악 듣는 시간도 너무 좋지만,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좋아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 사람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곳, 라디오는 라디오만의 매력이 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일기장 속에 남아있어 끄집어내어 본다.
눈 앞에 벽이 있을 때
인간은 그 벽 앞에서 절망하고 낙담하기 쉽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벽은 다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벽을 뛰어넘었을 때 그 벽은 나를 지키는 담장이 되고 방어막이 된다고 한다.
어쩌면 벽이 다음 인생길로 향하는 다리가 되어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하는 또 다른 기회가 된다는 말...
눈 앞에 닥친 난관이 벽이 될지, 다리가 될지는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말을 들었다.
라디오에서 소개된 한 사연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나는 어떤 학부형인가.
눈이 보이지 않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첫 학교에 부임하셨다.
많은 친구들이 "네가 어떻게 선생님을 할 수 있겠냐"라고 걱정하는데
어느 학부형의 말에 그 선생님이 용기가 났다고 한다.
"잘됐구나. 책에서만 보았던 헬렌 켈러를 교실에서 만날 수 있다니..."
그렇게 라디오를 통해서 전해 들은 사연에서 나는 잠시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쿵 놓이는 것 같았다.
만약, 내 아이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엄마, 우리 반에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래?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을 하셔?)
(그래? 전혀 볼 수 없으시데?)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하시고, 케어하시고, 돌발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실지,
아이들이 싸우거나, 밀치거나, 누군가 잠깐의 눈속임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 하실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온갖 상황들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잘됐구나, 책에서만 보았던 헬렌 켈러를 교실에서 만날 수 있다니"라고 말할 수 있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나는 숙연해졌다.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나쁘다고 옳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고
(우선, 그렇게 말하신 학부모에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구체적인 정황이나 신상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돌아보고자 한다.
나의 양심에 가책으로 느껴질 때, 내 양심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판단의 옳고 그름, 바름과 치우침, 명쾌하고 명확한 정리, 이해, 성숙함,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에 대한 판단은 최소한 나의 양심은 알고 있다.
나는 응원한다. 그때 그 선생님,
용기 내어서 세상으로, 교직으로 나아오신 만큼
그 선생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수많은 다리들이 이어져서 선생님이 교육자로서 곧은길을 묵묵히 잘 걸어가실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눈 앞의 벽이 때론 다리가 되어, 나를 지키는 담장이 되어 세상 속에서 바른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담장으로 아름답게 담쟁이넝쿨이 뻗어나가고 들장미도 피어나면 좋겠다. 민들레가 뿌리내린 담장길 따라 민들레 홀씨가 날아오를 때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가들이 손을 뻗으며 달려가고, 바람결에 더 많은 민들레 홀씨들이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나를 둘러싼 벽들이 나를 지키는 담장이기를
나를 둘러싼 담장이 다른 이들에게도 길이 되기를
나를 향한 다리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벗이 될 수 있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