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옆 마을에서 점찍어 두셨다는 어머니와 결혼한 아버지는 곡성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시다가 군대를 가버리셨다. 제대한 뒤 다시 중앙직 시험을 보신 뒤에야 서울로 발령을 받으셨다. 쥐꼬리만한 공무원 월급으론 서울에서 삼남매를 키우기가 버거우셨다. 둘째이자 아들인 나를 다시 곡성으로 내려보내기로 하셨다. 장씨 집성촌이던 그 촌구석에서 1년 정도를 보내고 나서 동생과 바톤터치를 했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여동생이 곡성으로 내려갔다.
곡성에 있을 때 매일 밭에서 일을 하시는 할머니께서 집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내가 보기 싫으셨는지 옆 마을에 있는 도상국민학교로 입학을 시켜 버리셨다. 취학통지서도 안나온 일곱 살이었지만 할아버지께서 일찌기 학교에 찬조를 한 적이 있다고 해서 어찌어찌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일찌감치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서울로 올라가 버리신 뒤였다. 나보다 한살 많은 동네 삼촌들과 함께 1학년을 다녔는데 아침 일찍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앞에서 모여 학교까지 뜀박질을 했다. 공부한 기억은 없고 여기저기 도랑치고 가재잡고 물뱀 잡아서 패대기 치면서 놀았던 기억 밖에 없다.
1학기가 끝난 뒤 받아온 통신표는 온통 '미' 투성이었다. 공부 못한다고 삼촌과 고모로부터 놀림을 받았다. 사실 자기들도 공부를 잘 하지 못했으면서 어린 나를 놀려먹는 게 재미있었을 것이다. 1년이 못되게 시골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을 땐 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뒤였다. 서울로 올라온 첫 날, 새로운 동네를 살펴보러 나갔다가 응암동 골목에서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채 원시성을 잃지 않은 시골소년답게 옆으로 슬쩍 다가가서 고무줄을 끊고 훼방을 놨다. 심하게 개기는 여자 애 둘이 있어 돌멩이를 들어 머릴 찍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애들이 엉엉 울면서 따라 들어왔다. 놀란 엄마가 누가 그랬냐고 하니 눈을 흘기며 나를 가리켰다. 누나와 동생은 1년 동안 많이 변했고 나는 너무 새카맸다. 1년 동안 떨어져 지내고 있던 어린 아이들이 서로 몰라보는 게 당연했다.
이듬해부터인가 응암동엔 온통 재건축 붐이 불었다. 정부에서 기존 주택을 허물고 연립주택을 새로 짓는 가구에게 보조금을 주었다.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 재건축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야트막했던 기존 집을 철거하고 2·3층 연립으로 건축하느라 4,5년간은 응암동 전체가 공사현장이었다. 가는 곳마다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였고 길목마다 벽돌무더기, 판넬, 시멘트 푸대 등 건축 자재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동네에서 뛰어 놀다가 판넬 위로 삐죽이 나온 못을 두 번 밟았다. 엄마는 병원에 대려가는 대신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에 발바닥을 대고 뜨거우면 소독이 된다고 했다. 신발 밑창을 뚫고 들어와 발바닥에 박힌 못을 손으로 대충 잡아 쑥 뽑았는데, 상처가 꽤 깊어서 어린 나도 파상풍을 걱정했다. 그럴때면 엄마는 그렇게 난로에 지지고 아까징끼 발라주는 게 다였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주어온 아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엄마는 연희동으로 훼미리 주스 배달을 다니셨고 옆 동네 사시던 외할머니는 주단학 화장품 외판을 하셨다. 무거운 구루마를 끌고 하루종일 돌아 다니시다가 집에 돌아오시면 피곤에 지쳐 웃음기가 거의 없으셨다. 가끔씩 집안 청소를 하는 것으로 엄마를 웃게 해드렸지만 그보다 말썽을 피우는 날이 더 많았다.
1979년이니 초등학교 4학년때였을 것이다. 우리 학교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당시 서부에서도 규모가 큰 국민학교 중 하나였기 때문에 학교는 학생들로 끓었다. 한 반에 일흔명씩 한 학년이 17개 반이어서 전학년이 7천명이 넘었다. 점심시간에는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 놀다가 국민체조 음악이 나오면 전교생이 그자리에서 체조를 한 뒤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운동장이 꽤 컸는데도 학생들로 꽉꽉 들어찼다. 서부지구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다고 했다. 어느날 학교에 가니 담임선생님 대신 교감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담임 선생님이 폐렴이 걸려서 당분간 못나오신다고, 이제부터 우리반은 분반을 해서 16개 반으로 흩어져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선생님 병이 분필가루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도 했다. 학년이 거의 끝나가는 가을이라 우리 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몇 명씩 다른 반으로 들어갔다. 한 학기 내내 다른 반에 셋방살이를 하느라 제멋대로 삐뚤어졌다. 선생님은 결국 학교로 못돌아오셨다.
당시엔 응암동 전체가 집을 짓느라 난리여서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써줬을 것이다. 설령 집을 짓지 않았어도 아이들 교육에 신경을 많이 쏟을 만큼 여유가 있는 동네가 아니었다. 우리 집 역시 새로 건축을 하고 있었는데 목수이셨던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모두 달라붙어 공사를 하느라 부모님도 정신이 없으셨던 것 같다. 이 틈을 타서 나는 종일 싸돌아 다녔다. 삐뚤어지기 딱 좋은 때였다.
어는날 옆 집 공사 현장 담벼락에 걸려 있는 인부의 겉옷 호주머니에 시퍼런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이 삐죽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콩닥거렸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과감하게 손을 넣었다. 당시 만원은 너무 큰 돈이었다. 다음날부터 학교를 가지 않았다. 일주일이 넘도록 옆 동네 만화가게로 출석을 했다. 사이다 하나와 보름달 빵을 사고 하루 종일을 길창덕과 윤승훈 작가의 만화를 보며 지냈다. 당시 유행하던 인디언과 보안관 로봇시리즈를 모두 사서 본드로 조립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해가 뉘엇뉘엇 질때 쯤에 만화가게를 나오면 주머니 속엔 쓰다 남은 동전이 짤그락 거렸다. 써도 써도 돈이 줄지를 않았다. 지폐만 남기고 주머니 속 남은 동전들을 골목 담벼락 회색 쓰레기통에 모두 버렸다.
가끔씩은 침침한 만화가게에서 나와 모두 학교 가고 아무도 없는 길목에서 햇볕을 쬐기도 했는데 늦게 등교하던 같은 반 여자애 하나가 날 보고는 급기야 선생님께 일렀다. 일주일이 더 지나 학교에 등교하니 아이들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책에 머릴 박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중간고사라고 했다. 오랜만에 등교한 나에게 선생님이 가방을 들고 교단으로 나오라고 했다. 내 가방을 뒤적이다가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도덕책 하나가 툭 떨어졌다. 부끄러웠다. 그동안 결석한 것에 대해 엄마의 확인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당시 집 건축 막바지라 거할 곳이 없어서 나는 옆동네 엄마 친구댁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분께 대신 확인서를 써달라고 하니 왜 엄마에게 얘길 하지 않냐고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일이 커지겠다싶어서 한살터울 누나에게 어른 글씨를 흉내내서 써달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엄마친구가 이 사실을 엄마에게 고해버렸다. 엄마는 바로 내 귀를 잡고 우체국 옆 응암 파출소로 끌고 가셨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어머니에게 울며 불며 매달리고 사정해서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아버지에게도 훔씬 얻어맞고 나서야 그렇게 절도행각은 끝이 났다.
공사가 한참이던 서리 내린 어느 날이었다. 2층을 올리고 슬라브를 치고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철거하지 않은 기존 집 한 모퉁이를 합판과 홑이불로 대충 막아 식구들이 거기서 옹기종기 기거하고 있었다. 당연히 웃풍이 심했다. 아침에 오들오들 떨면서 부스스 일어났더니 엄마가 TV를 보면서 울고 계셨다.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고 했다. TV에는 대통령 각하 유고.. 어쩌구 하는 검은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죽었다니 나도 눈물이 났다.
한번은 학교 교내 방송에서 보이스카웃이 하고 싶은 학생들은 방과후에 과학실로 모이라고 했다. 견장이 달린 멋진 보이스카웃 옷과 손가락 두개를 모아 경례하는 게 멋져보여서 엄마한테 얘기도 안하고 무작정 가보았다. 과학실 앞 복도에서 만난 반장이 날 보더니 공부못하는 아이는 보이스카웃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깐죽거리는게 보기가 싫었지만 공부를 못한 것은 사실이어서 그냥 돌아왔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5학년때는 옆 신사동에 신사국민학교가 생겨서 응암국민학교의 아이들 1/3이 그리로 갔다. 6학년 때는 옆 응암2동에 연은국민학교가 생겨 또 몇분지 일이 갔다. 가는 아이들, 보내는 아이들.. 이별의 연속이었다. 남녀를 가려 분반을 한 5학년을 보내고 6학년이 되자 다시 남녀를 합쳐 반을 나누었다. 1년 만에 본 여자 아이들의 몸은 몰라보게 성숙해 있었다. 몇몇 조숙한 애들은 키가 남자애들보다 컸고, 여자애들은 가슴이 어른 가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우리들은 서서히 성에 눈이 뜨기 시작했다. 껄렁한 몇몇 놈들은 여자애들 가슴을 만지고 다니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몇번씩 우는 여자애들이 속출했다. 의협심에 불타올라 못된 녀석들을 응징하고 싶었지만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체격때문에 용기가 안났다.
이번엔 불장난에 빠졌다. 허구한 날 불장난을 했다. 새로 지은 집은 연탄 보일러를 썼는데, 그 보일러실에서 매일 불장난을 했다. 번개탄 밑면에 묻어 있는 쏘시개용 화약을 긁어 모아 사제폭탄을 만들기도 했다. 추석때면 받은 돈을 모두 검은 심지가 있는 폭죽이나 콩알탄, 빨간 종이화약을 사는 데 다 썼다. 중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사촌들과 이 화약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팔렸다. 한번은 사촌동생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 장총에 이 폭죽을 넣고 공중에다 쐈는데 심지에 불이 붙은 폭죽이 슝하고 날다가 어떤 여자애 머리위에 떨어져서 터져버렸다. 아이들용 폭죽이라 다친 데는 없었지만 혼이 많이 났다.
머리가 좀 돌아가자 이번엔 총을 만들었다. 지붕위로 올라가 TV 안테나 알루미늄 대롱 하나를 빼 총신을 만들고 나무판을 썰어 개머리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무밴드를 칭칭 감은 격발장치를 달아 적색 화약을 넣고 못을 넣어 쏘면 이 총알 못이 사과궤짝에 팍팍 박히곤 했다. 망치로 못을 두드려 화살촉을 만들고 대나무로 화살과 활을 만들어 쏘는 일도 있었는데, 한번은 행주산성에서 임진왜란인지 병자호란인지 신기전으로 적을 물리치는 그림을 보고 와선 이 대나무 화살에 폭죽을 달아 날아가다가 터뜨리게도 만들었다.
5학년 겨울방학 때인가엔 시골 작은아버지 댁 뒷산에서 화약놀이를 하다가 선산을 홀라당 태워먹은 적이 있었다. 바람이 꽤 부는 날이었는데 화약 불티가 묘의 마른 잔듸에 옮겨 붙었다. 바람때문인지 어!어!어! 하는 새 불이 엄청난 기세로 번져갔다. 새로 산 운동화가 다 끄슬리도록 이리 저리 밟아 끄다가 계속 되살아나곤 하는 불씨에 겁이 덜컥 나서 도망쳐 버렸다. 불은 선산의 반을 태우다가 절로 꺼져버렸는데 선산 뒤 형제봉까지 번지는 대형 산불이 될뻔 했다. 하마터면 소년원 갈 뻔했다. 찬 겨울 땅속에 계시던 증조할아버지 내외께선 증손 덕에 그날 좀 따뜻하셨을거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매일 마지막 시간엔 동요 하나씩을 칠판에 적어 외우게 하셨다. 그리고 한 명씩 노래를 시켰다. 노래를 마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지명을 해서 노래를 계속하게 했는데 자연스럽게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지명했다. 여자애들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맨 발성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나는 매번 부반장에게 지명을 당했는데 그럴때마다 나가서 섬집아이를 불렀다. 부반장이 나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매일 붓글씨를 써야 했다. 몇차례 서예 개인전도 했던 교장은 아이들 글씨체를 교정한다며 샤프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붓글씨에 올인했다. 먹물이 스며든 싸구려 붓은 잘 씻어두지 않으면 딱딱하게 굳어서 매번 화장실에 가 붓털이 부숴지도록 헹궈내야만 했다. 그런데 노르스름한 족제비털 붓을 가진 수현이는 몇달이 지나자 제법 잘 쓰기 시작했다. 노란 족제비털 붓을 갖는게 꿈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응암동 주택건축 붐이 거의 끝나갈 때 즈음해서 드디어 졸업을 했다. 4학년때 도벽으로 며칠 땡땡이 친 것때문에 남들 다 받는 개근상을 못받고 정근상을 받았다. 졸업장과 정근상장을 돌돌 말아 빨간색 졸업장통에 넣어 한손에 들고 다른 한손엔 꽃다발을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버지와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배경으로 졸업사진을 찍는 것으로 나의 유소년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