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캐나다의 배는 이렇게 생겼다. 바틀렛(Bartlett), 보스크(Bosc), 당쥬(d'Anjou) 같은 변종을 팔고 있는데 맛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배먹고 이닦는다'는 속담은 우리 배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우리 배는 달콤한 과즙이 풍부하고 베어 먹을 때 거칠거칠한 느낌이 나서 먹고나면 잇속이 깔깔하고 개운한데, 이 서양배는 석세포(Stone cell, 돌세포)가 거의 없는지 전혀 사각거리는 느낌이 없다. 마치 좀 단 사과를 먹는 느낌 정도?
이 곳 사람들은 배를 그냥 먹기도 하고 익혀 먹기도 한다. 배라는 게 사실 명절과 젯상 단골이라 아주 한국적인 과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중국이 세계 최대 배 생산국이고 우리가 먹는 배는 일본배란다. 신고배, 신고배 해서 신고가 우리나라 어느 지방 쯤 되나보다 했었는데 일본종(新高, Niitaka)이란다.
중학교 1학년 입학을 앞둔 마지막 겨울방학, 친구와 『English Penmanship』과 『영어첫걸음』이라는 책을 사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이 펜맨십에서 연습한 필기체는 이후로 거의 쓸 일이 없었지만, 『영어첫걸음』에 나오는 단어들을 외우고 중학교에 입학한 덕택에 영어에 관한 한은 적어도 소프트랜딩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영어첫걸음』에 배(Pear)가 나오는 데, 표주박처럼 생긴 그 사진을 보고 미국놈 배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했다. 중학생이 된 유쾌한은 이 곳에 와서 영어를 쓰며 살 게 될 지 꿈에도 몰랐다.
중학생이 되자 1학년 영어는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난 왕히스테리 노처녀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잉크를 찍어 쓰는 펜으로 알파벳용 4선 노트에 교과서 내용을 반복해서 쓰게 했다. 첫시험 후 영어선생님이 100점 맞은 넘만 빼고 90점에서 98점까지 모두 나오라고 했다. 90점 이상 맞은 넘들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100점을 맞을 수 있는데 집중을 하지 않은 죄로 2점에 한 대 씩 매를 때리겠다고 했다. 90점 밑으론 매를 들 가치도 없다고 했다. 나는 90점을 맞아서 다섯대를 맞았다. 매를 맞으면서 우리는 그 여선생이 싸이코라고 생각했다. 졸업할 때까지 이 첫 점수를 넘는 영어점수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중학교 입학 후 얼마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야외에서 봄 풍경을 그리게 되었다. 화폭에 담을 상춘의 정서로 치자면야 진달래랑 벗꽂이랑 흐드러진 4~5월경이어야 맞겠으나 성급하신 우리 선생님은 그 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아직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교정에 우리를 내보냈다.
3월 중순 봄 풍경이래봤자 교정에 목련꽃 정도가 고작이었겠고 '봄 풍경'은 그저 목련꽃 몇 송이를 그리는게 전부였다. 예능교육과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금같으면 '목련을 그려라'라던지 '수채화로 그려라'라는 식으로 미술교육을 하지는 않을것이다. 35년이나 지난 일이니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을 그리라는 것이 말 그대로 주입식 교육인것같지만, 막 국민학교를 졸업한 소년들이 무슨 생각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목련을 그리라는 명령(?)이 없이 그저 봄에 대한 그림을 그리라 했었더라면 더 막연했을 것이다.
미술선생님이 내 그림을 유심히 보다가, 미술학원 얼마나 다녔냐고 하시길래 다닌 적 없다고 했더니 방과후에 미술실로 오라고 하셨다. 그날로 미술반에 들어갔고 졸업할 때까지 활동을 했다. 미술반 반장이랍시고 대표로 맞은 적도 많지만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중 선생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던 때가 아닌가싶다. 그 선생님은 기독교 화단에서 몇차례 수상도 하셨던 김호창 선생님이다.
미술반 아이들은 대체로 퉁퉁하게 생겼다. 공부도 곧잘했고 그림도 아주 잘 그렸다. 어릴때부터 미술학원을 다녀서들 그런지 그림이 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지금까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붓과 모나미 물감만 썼는데, 아이들이 쓰는 붓과 물감은 굉장히 좋아보여 슬쩍 보니 붓은 화홍(Hwahong)이었고 물감은 신한이었다. 처음으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1학년 여름 방학 때는 국어를 가르친 J 선생님께서 노트 한권에 단편소설을 써오라는 방학 숙제를 내 주셨는데 여느 학생놈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개학에 임박해서야 아버지 책장에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럴싸한 현대 소설 하나를 꺼내어 중간중간 나오는 글귀들을 베끼고 몇가지 스토리를 앞뒤 맞추어가며 적당히 둘러대 쓰고 제출했다.
개학하고 며칠 뒤 국어시간에 J선생님은 1학년 중에서 제일 잘 쓴 작품이라고 칭찬을 하시면서 노트를 돌려주셨다. 노트를 다시 열어보니 몇 몇 단어들(예를 들면 군용트럭, 소사, 야상 같은)에 빨간 동그라미를 치고 '좋은 표현'이라고 써주셨는데 노트 맨 마지막에는 '모방하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된다'는 요지의 코멘트가 있었다. 부끄러웠다.
2학년 때는 미술에 진심이었으므로 대외 미전에 가끔씩 출품하기 위해 며칠씩 수업을 째고 미술실에 틀어박혀 작업을 하곤 했다. 서울예고에서 있던 미술경시대회 출전 하루 전날, 다음날 있을 대회를 위해 습작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15호짜리 화홍붓을 하나 주셨다. 끝이 갈라지는 문방구 붓과는 달리 둥글게 감싸주는 부드러운 붓털 때문에 터치가 색다르고 좋았다. 미술학원 다녔단 애들 솜씨가 결국 이 붓 하나 차이구나 짜식들 별거 아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고에서의 실전때도 느낌이 전날보다 더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입선. 개나 소나 받는 상이 입선,가작이므로 다소 실망했지만 스스로 예술고등학교 주최 대회에 참가했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게다가 북한산 자락에 자리잡은 세검정 서울예고의 독특한 분위기와 머리를 뒤로 동그랗게 쪽지고 짙은회색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은 하나같이 잘 사는 집 영애일것처럼 이뻤다. 갑자기 서울예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 뒤 시상식이 있던 날, 최우수상을 받은 3학년 선배의 갑작스러운 집안일로 내가 대리수상자가 되었다. 서울예고 교정에 전시해 놓은 우수작들을 보면서 그동안 그림께나 그린다는 자부심이 한순간 바닥으로 추락했다. 특히 3학년 선배가 그린 한국화를 보곤 정말 기가 질려버렸다. 한국화로 그렇게 그릴 수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색감이나 구도같은 것들은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같았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건은 그 뒤에 있었다. 아마 이 사건으로 내가 대중공포증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시상식이 열리는 강당에는 수많은 학생, 학부모로 가득찼다. 나는 최우수상의 대리수상자로 예정이 되어 있었으므로 호명을 기다렸다. 이윽고 3학년 선배의 이름이 불리워졌고 나는 강당 앞쪽 단상으로 걸어나갔다. 수많은 사람의 눈이 날 보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앞만 보고 걸어나가느라 누군가가 같이 따라나오는 것도 모른 채 올라가 시상자(아마도 서울예고 교장이었을 것) 앞에 섰다. 시상대에 선 두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 하는 시상자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우수상을 받은 그 3학년 선배가 어찌어찌하여 온 것이었다. 그 선배는 대리수상자가 있을거란 생각도 못하고 자기 이름이 불리우자 단상위로 올라간것이고 아마 날 보고 그 형도 어리둥절해 있었을터였다. 우리 두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수상자는 내가 왜 거기있는지는 여전히 영문을 모른채 트로피는 그 선배에게 꽃다발은 나에게 수여하였다. 그 뒤로 행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날로 서울예고는 내 머리에서 지워졌다는 것이다.
가을 즈음엔 '드디어' 판화를 접했다. 이 것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전기가 된 일이었는데, 아무튼 첫 판화작품으로 미술 교과서에 있던 작품을 살짜기 변형시켜 보았다. 원작은 사과 두개와 작은 꽃들이 가득 꽂힌 달항아리가 있는 정물이었는데 나는 여기에 책 한무더기를 추가로 쌓아놓고 뒷 배경을 바꾸어 버렸다.
당시 비싼 목판 대신 중학생들이 실습할 판으로 적합한 것은 합성수지판인 리놀륨판이었다. 합성수지판이 나무처럼 잘 파지지 않자 머릴 쓴다고 둥근칼 조각도를 손에 쥐고 손목을 좌우로 비틀어가며 판각을 했는데, 이 것이 마치 의도적으로 그런 것처럼 톱니모양의 꽤 그럴듯하고 의도한 듯한 효과가 나왔다. 교과서를 베낀 그림이었음에도 개교 기념일 전시회에 걸리게 된 이유가 이런 독특한 효과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쨋든 부모님을 모시고 감상을 하고 있을 때 교감선생님이 다가오셔서 '이게 전시된 작품 중 제일 잘되었습니다' 하고 말씀하셔서 부모님의 어깨는 으쓱하셨겠으나 나는 약간 뭐랄까.. 베낀 그림으로 상을 탄 것이었으므로 그 자리가 그렇게 계면쩍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