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유쾌한

Vive l’amour, Vive la compagnie!

by Christmas Gin

예전에 '남자의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멤버들이 박칼린을 지휘자로 초빙하여 합창단을 조직하고 대회에 나가는 프로젝트를 한 것을 감동적으로 본 기억이 있다. 오디션, 카리스마 있는 지휘자, 오랜 연습, 단원들과의 갈등, 넬라판타지아의 멋진 화음, 대회.. 1년 가까운 프로젝트가 가진 드라마틱한 기승전결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 '합창단'이라는 말이 주는 감회와 울림이 너무 컸다. 과몰입의 이유는 여기에 기록하지 않으면 다시는 생각해 내는 일이 없을 너무 오래된 그러나 강렬한 추억때문이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숭실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그리고 합창단에 입단했다. 숭실남성합창단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가진 우리 합창단(團)은 여느 학교마다 특별활동(CA)으로 하나씩은 있기 마련인 합창부(部)와는 질적으로 한참 달랐다. 연륜도 깊고 고등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실력도 거의 직업 합창단에 버금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엔 윤학원씨가 지휘하던 직업합창단인 대우합창단이 생기기 전이었고 옆동네 Y대학의 글리(Glee)합창단이나 우리를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던 대광고등학교 합창단 등 몇몇 남성합창단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보단 실력이 많이 쳐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서로 대련을 안해봤으니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나 당시 대광고 합창부실에는 '타도숭실'이라는 액자가 걸려있다'카더라'는 선배들의 세뇌때문이었는지 우린 정말 한국에서 제일가는 합창단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꽤 우쭐거리고 다녔다.


사실 숭실남성합창단은 지금처럼 문화 이벤트들이 많지 않고 세련되지 못한 1960년대에 창단된, 그래서 한국 합창사에 아주 중요한 궤적을 가진 유서깊은 합창단이다. 재학생 합창단이 세개의 음반을 내고 동문 OB(Old Boy)합창단도 세개가 넘는 음반을 출시할 정도였고, 전국합창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거나 유럽의 국제합창대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쟁쟁했던 선배들의 얘기다. 나는 합창단의 명성이 많이 흐려지고 사건사고도 많았던 때 입단해서 이런 활동들을 하진 못했지만 당시에도 수 차례 방송출연과 국내 내로라 하는 콘서트홀에서의 무대경험이 적지 않았다.


숭실고등학교가 구한말 미국 선교사에 의해 평양에 설립된 장로교계 미션스쿨이라 그런지 유독 음악 교육에 관심을 많이 두었다. 또 동문 안익태나 윤동주의 초상이 교실마다 걸려있을 정도로 그런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다. 학교 차원에서도 합창단이 중요했다. 합창단원을 선발하기 위해 고1 입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본다거나 합창단이 되면 1,2학년 동안은 수업에 안들어가는 일이 많을 정도로 고된 연습을 시킬 정도였다. 부모들이 나서서 입시교육 외에는 음악교육이나 합창단 같은 과외활동을 폐지시키는 요즘같은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숭실남성합창단을 처음 알게 되었다. 중2때인가 개교기념 행사에 인근에 있던 숭실고등학교 중창단이 찬조를 온 적이 있었다. 당시 중창단 형들이 브람스의 대학축전서곡에 있는 'Gaudeamus Igitur'와 '제비'(조영남이 개사해서 불렀던 번안곡) 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악에 관심도 없고 특히 합창곡은 교회 성가대가 부르는 것을 본 게 전부인 나에게 남성복사중창의 화음은 거의 '벼락' 수준이었다. 여덟 명으로 구성된 복사중창이라 베이스가 단 두명이었는데도 발성과 성량이 너무 좋아서 마이크를 대지 않았는데도 강당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의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다른 세상을 본 듯했다. 문화적으로 향유할 것도 없고 정서적으로 메말라서 기껏해야 교회에서 기타들고 띵가띵가 하던 중학생들의 메마른 영혼에 그것은 마치 천상의 화음같았다.


그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당시 2집까지 나와 있던 숭실남성합창단 테이프를 사와서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꼭 숭실고에 입학해서 합창단원이 되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더랬다. 대부분 충암고나 명지고에 진학한 내 친구들과 달리 숭실고에 배정이 되자 당장에라도 단원이 될 것같은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이 기대는 합창단의 무지막지한 규율을 목격한 첫날 거의 공포로 바뀌었지만.


합창단은 신입생 전체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봐서 선발했다. 입학하자마자 첫 음악시간에 음악선생님(당시 합창단 지휘자이셨던 김인호 선생님)이 우리 반 모든 학생들에게 자신있는 노래를 하나씩 해보라고 했다. 전체 신입생 중 50명 정도를 추려서 합창부실로 집합하라고 한 뒤, 이번에는 눈을 감게 하고 피아노 건반을 눌러 계이름을 알아맞추게 하는 소위 청음이란 것을 하고, 음색을 살펴 파트를 정하여 주었다. 그 뒤에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희망하면 단원으로 선발하였다.


당시 숭실고 하면 합창단이 생각날 정도로 유명하기도 했고 갓 변성기를 끝낸 남학생들에게 남성합창이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선발된 50명 모두가 합창단에 입단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합창단에 들어가면 공부는 거의 포기해야 하고 무엇보다 합창단의 규율이 무시무시했었기 때문이었다. 난 오래전부터 합창단에 들어가는 꿈을 꿔왔고 또 당시 공부에 뜻이 별로 없었으므로 30명 정도 되는 동기들과 같이 남성합창단 17기가 되었다. 동기들 중에는 소리가 좋은 아이들이 꽤 있었다. 음대 진학을 목표로 해서 레슨을 받고 있는 넘들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당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곡들을 연주회를 통해서 발표하곤 했는데 이 곡들과 악보는 이후에 다른 합창단들이나 교회 성가대, 중창단들에 의해 유행이 되곤 했다. 우리 합창단의 화려한 레파토리에는 미국 민요 '애니 로리'를 개사한 '주의 크신 은혜'나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도 있었지만 그 중 백미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로 시작되는 「평화의 기도」였다. 이 노래는 성프란체스코의 기도문에 박영근 교수(한양음대)가 곡을 붙인 것으로 70년대 말 우리 합창단에 의해 소개된 뒤 교회 성가대 등에서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초창기 지휘자로 계셨던 이영두 선생님이 펴낸 합창곡집은 합창계에서 일종의 바이블 역할을 했을 정도였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낸 고등학생들이 남성합창단을 구성해서 전국최고의 수준에 오르려면 얼마나 연습을 해야 할지 상상에 맡긴다. 남들처럼 수업하고 남들처럼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할 수는 없다. 점심시간 종이 치면 3분 안에 합창부실에 올라가서 한시간동안 발성연습을 한다. 방과후부터 저녁까지 매일 너다섯시간 파트연습과 전체연습을 한다. 여름방학부터 연주회가 있는 10월 전까지는 아침시간에도 연습을 하거나 오후 수업을 안들어가기도 했다. 연습 외에도 개인적으로 발성연습이나 호흡연습을 하곤 했다. 목소리가 탁한것같은 아이들은 소금물을 가져와서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뱉는 고행을 하기도 하는 등 거의 '음악폐인' 수준이었다.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갈 때도 모두 모여 노래를 부르면서 가곤했다. 지휘자 형이 피치를 불어 첫음을 잡으면 바로 화음이 나온다. 캄캄한 밤에 길거리에서 4~50명의 남자들이 부르는 노래니 소리도 컸지만 박수를 받으면 받았지 욕을 들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학교 근처 동네사람들에겐 십수년 계속된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고 또 괜찮은 음악을 쌩으로 들을 수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거리음악회가 아니었나싶다.


지금 이순간도 16세부터 18세까지, 즉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때를 기억하면 오로지 이 합창단 생활만 떠오를 정도로 나 역시 합창단에 몰입했었다. 당시 '숭실고등학교 학생'이라기 보다 '숭실남성합창단 단원'으로 기억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공부를 한 시간보다 합창단 단원으로서 시간을 보낸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추억과 기억의 편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부터 교회에서 성가대도 하고 학생회 활동도 하고 했지만, 합창단의 기억만큼 강하지는 않다. 그만큼 합창단의 기억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2년 넘도록 하루도 안빠지고 매일 대여섯 시간동안 연습하고 같이 몰려다니고 하는 바람에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이렇게 연습에 매진하다가 3학년이 되면 많은 친구들이 음대 입학을 준비했다. 음악만 가지고 학창시절을 보내다보니 음대에 진학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인문계 고등학교인데 음대에 진학하는 친구들이 많아 '숭실예고'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로 옆동네 Y대학의 성악과나 종교음악과는 '숭실합창단 동문회'라는 소리도 있었다. 나 역시 3학년으로 진학하고 나서 연습에 더이상 참여하지 않게 되자 갑자기 시간이 남아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시간이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많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합창단의 규율은 명불허전, 무시무시했다. 부채꼴 계단식의 합창단실이 따로 있었다. 오선지가 인쇄된 칠판과 높은 지휘자단, 그리고 처음보는 검은색 그랜드피아노의 아우라가 대단했다. 교련복이나 체육복을 입고는 합창단실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아무도 없어도 목례를 하고 들어가야 했다. 악보책은 거의 '경전'이었다. 비닐로 표지를 감싸 3년 내내 들고 다녀야 했다. 악보책 맨 뒤에는 노래할 때 입모양을 확인하라고 거울을 달아놓았다. 그 해 합창제용 악보와 선배들의 레파토리들은 당연히 복사해두어야 했다. 오선지에 펜으로 연주기법을 써놓은 악보들은 십 수 년간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서 나중에는 콩나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거기에다가 선배들이나 지휘자 선생님의 곡에 대한 코멘트를 성실하게 적어놓아야 했다. 2년 넘게 노래를 하다보면 악보책이 백과사전만큼 두꺼워진다. 그래도 가방에 넣고 다녀야 했다. 한번은 악보책에 도시락 김치국물이 새서 밤새 닦아야 했던 적도 있다.


점심시간 종이치고 3분 안에 집합하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지휘자 선생님은 20분 정도 지나서 오셨는데 그동안 선배들이 기율을 잡았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은 구타가 있었다. 파트당 두 명씩 있는 중창단, 지휘자는 리더십 부족으로 가슴을 맞았다. 학년 반장은 열외. 열중쉬엇 자세로 눈을 감고 서있으면, 자기파트 선배가 주먹에 요대(교련복 허리에 차는 굵은 벨트)를 감아 오락실 펀치를 치듯 달려오면서 가슴을 때렸다. 베이스 형들은 몸집이 큰 만큼 주먹도 묵직했다. 헉하고 숨이 막히는 그 느낌. 같은 베이스 파트였던 N은 체구가 작았었는데 몇 차례 기절을 하기도 했었다.밤에 불을 다 끈 어두운 교실로 파트별로 흩어져서 눈을 감고 있으면 선배가 달려드는 소리에 정말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곤 했다. 플랫(♭)된다고 맞고 호흡이 짧다고 맞고 악보검사해서 맞고 인사 안한다고 또 맞았다.


이런 연습과 구타가 싫어서 탈퇴하려고 하는 단원은 모든 불량서클(?)이 그러하듯 빳다 100대를 맞고 나가야 했다. 동기 중에는 나간다고 하고 빳다를 맞다가 거의 다 맞고나서 더는 못견디고 '나 안나갈래요' 한 넘도 있었다. 나도 사실 나가고 싶은 때가 많았으나 이 빳다 맞는 게 무서워 결국은 그냥 남았다. 개인별로 하는 호흡검사는 자신있었는데, 네 파트 모두 합창을 하는 노래검사는 정말 무시무시 했다. 이 날은 1,2학년 전체가 3학년들에게 매를 맞기로 정해진 날이었다. 선배들도 그냥 때릴 수 없으니 우리 레파토리나 연주회용 신곡을 점검한다는 핑게로 며칠전부터 분위기를 잡았다. 그날은 노래를 잘하건 못하건 매를 맞는 날이었다. 공사장 각목으로 허벅지를 맞았다. 맞는 것도 두려웠지만, 더 공포스러운 것은 내내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선생들도 잘 오지 않는 구석진 합창반실에 합창단원 모두 발을 11자로 모으고 힙과 아랫배에 힘을 주고 등을 의자에서 뗀 상태로 선배들을 기다린다. 눈을 감은 채이므로 모든 신경은 귀에 집중된다.


이윽고 바깥 복도에서 선배들이 우당탕탕 공사장 각목을 굴리며 온갖 욕설을 쏟아내며 합창반실로 들어온다. 공포심은 극대가 된다. 이순간만은 20년 전통의 전국최고의 남성합창단 어쩌구는 다 잊고 당직 선생님한테 걸려서 선배들은 정학 먹고 합창단이 해체되기만을 꿈꾼다.


음이 플랫(♭)되면 맞기로 합의(?)를 하고 노래를 시작한다. 선배 지휘자 형이 노래를 하나 선택하고 첫 음정을 때려주고 나서 무반주로 끝까지 노래를 부르게 한 뒤에 피아노 마지막 음정과 우리 노래 끝음을 맞추어 본다. 중간에 이미 플랫된 걸 느끼지만 이 때에는 아무리 음을 끌어올려보려고 애를 써도 위축되고 긴장된 상태에서 노래를 마치면 여지없이 반음 어쩔땐 한음씩 플랫(♭)이 되곤 했다.


웃긴건 맞고 나서다. 퍼스트 테너부터 세컨 테너, 바리톤, 베이스 순으로 한바탕 폭력의 회오리가 지나가고 나면, 이제 선배들은 얼마나 아팠니 하는 눈으로 피멍이 든 허벅지를 주물러 주면서 우리 18번인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함께 합창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이제 한동안 안맞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평화의 도구' 선배들이 미리 준비해 온 복숭아맛 눈깔사탕때문인지, 도파민 탓인지.. 감성지수가 높은 퍼스트 테너 쪽에서부터 훌쩍거리는가싶더니 바로 눈물바다. 노래는 한음이 넘게 샾(#)이 된다.




쌍십절(개교기념일이었던 10월 10일을 우린 이렇게 불렀다) 합창 연주회는 우리 합창단에게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받은 새 악보를 가지고 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려가며 연습에 몰입했다. 연주회 직전에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얻어 맞았다. 10일 저녁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 막이 오르기 직전에 선배들이 무대 뒤에서 구두에 광약을 발라주었다. 단복이었던 검은색 기지바지에 쓱쓱 문지르고 무대에 올랐다. 눈앞에서 비추는 강렬한 조명 때문에 지휘자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땀은 비오듯이 나고 못하면 또 맞는다는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1부 스테이지가 끝나고 찬조출연자가 공연하는 동안 무대 뒤에선 훈계를 듣는다. 1부를 조지기라도 하면 그 막간에 선배들에게 매를 맞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 노래를 하고 청중들이 앵콜을 외치면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다. 내가 특히 좋아했던 쇼팽의 이별의 노래(Etude No. 10)를 부를 때는 매맞으며 여름부터 애써온 기억들과 뭔지모를 북받침에 눈물이 났다. 연주회는 끝났지만 아쉬웠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YB들, OB들이 이화여고 운동장 미루나무 밑에 모였다. 밤이 늦도록 화음을 맞추어 우리 합창단 레파토리들을 불렀다. 긴장이 풀리니 너무 즐거웠다. 그렇게 무섭던 선배 형들도 같이 노래하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 좋았다.


합창은 듣고 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뭔가가 있다. 거기다가 노래가 포르티시모에서 피아니시모를 넘나드는 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베이스와 바리톤의 엄청난 저음으로 앉은 자리가 부르르 떨리다가 갑자기 여성 성부와도 같은 테너의 간드러진 곡조가 시작되면 오금이 저린다. 오래전 공연에서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이 바로 이순간 오줌을 싸는 바람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일어나지 못했다는, 지금 생각하니 1000% 구라였을 이야기를 선배들로부터 영웅담처럼 전해 듣기도 했다.


이런 스토리는 선배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직을 장기간 지탱하고 내부통제를 하기 위해선 창업자의 신화나 전설 같은 게 필요하다. 지휘자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장치들을 쓰셨다. 선생님도 학창시절 숭실남성합창단원이셨는데 당시 합창단실에 있던 그랜드피아노를 복식호흡으로 밀어냈다거나 발성이 좋아 물잔 속의 물도 흔들렸다거나 한창 땐 Nessun Dorma를 부르면서 하이C를 찍었다거나 하는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마리오 란자, 마리오 델 모나코, 엔리코 카루소.. 그리고 3대 테너들 얘기들도 자주 하셨는데 이런 얘길 할라치면 성대문제로 성악도로서 꿈을 접고 음악선생을 하고 있는 자신을 동정하기라도 하는 듯 슬픈 눈이 되곤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 몇 주 후인가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날이었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니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뭔가 이상했다. 간밤에 바로 옆 반에서 학생 한 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잠시 후 합창단 동기들로부터 어젯밤에 바리톤 파트장이었던 S가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형사들인지 기자들인지 일단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선생님들도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교무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셨다. 합창단 동기들 모두가 넋이 나갔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합창단엔 각 기수마다 파트당 두 명씩 따로 뽑아 복사중창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이 파트 리더까지 겸하는지라 연습도 더 하고 맞기도 더 맞았다. S는 전날 밤 요대를 감은 주먹으로 가슴을 맞고 사망했다. 사건이 있고 이틀 뒤엔가 학교 전체 추모예배가 열렸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교목께서 울부짖으며 통회의 기도를 했다. 목사가 되고 싶었다던 S는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교목의 입을 통해 친구들에게 남겼지만 그땐 선배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가해자였던 바리톤 파트장과 세컨드 테너 파트장 두 선배는 집행유예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진 않았지만 자퇴를 했다. 합창단 지휘자 선생님께서는 사직을 청하셨다. 당시 신문에 S고등학교 교내 폭력사태 정도로 단신으로 소개되었는데, 그 일로 우리는 두어달 정도 연습을 중지했다. 모두들 당장이라도 합창단이 없어질 것처럼 말들을 했지만 결국 지휘자 선생님도 돌아 오시고 합창단은 존속했다. 방송국이나 각종 합창제, 교회, 학교들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활동을 하여 학교의 명예를 높여서 그랬는지, 돈을 벌어다 줘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 선생님들 중엔 합창단의 오랜 팬들이 꽤 계셨다. 정년퇴임한 후에도 물질적으로 후원해 주시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자기한텐 인사안하고 선배들한텐 깍듯이 인사하고 뻑하면 수업을 째고 종만 치면 연습실로 내닫는 합창단 학생들을 좋아하지 않은 선생님들도 물론 계셨다. 한번은 구타현장을 목격한 당직 선생님 한분이 자기 교사직을 걸고 합창단을 폐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합창단은 없어지지 않았다. 숭실남성합창단 없는 숭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다시 연습을 시작하고 똑같은 나날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우린 서서히 잊었다.


1년인가 후에 힘든 시간을 보냈을 두 형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듬해 합창제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에 두 형들이 합창단실을 찾아왔는데 세컨드 테너 파트장 형은 그 동안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내었다며 부끄러운 얼굴로 시집을 건네었고 바리톤 파트장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군가 무슨 염치로 왔냐고 소릴 지르는 바람에 두 형이 말없이 돌아갔던 것으로 기어난다. 나는 그 시집에서 [주다스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 가룟 유다)]라는 시를 읽고 세컨드 테너 파트장 형을 용서하기로 했다. 3년이 지나 대학을 간 뒤 바리톤 파트장형을 학교에서 우연하게 만났다. 검정고시를 봐서 들어왔다는데 나는 그냥 인사를 하기가 싫었다. 같은 공대라 자주 마주쳤는데, 내가 학교를 옮길 때까지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 형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는 지금은 때늦은 후회를 한다.



매가 두려워서 노래한 적이 많았을 정도로 나는 합창을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합창단 생활을 하면 할 수록 성량이 작고 허스키한 내 목소리에 대한 열등감이 깊어졌다. 들어올 땐 모두 비슷했지만 2년이 넘자 기량 차이가 확연해졌다. 타고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3학년이 되어도 합창단실에서 계속 살고 있던 음대 준비를 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합창단실을 거의 올라가지 않았다. 졸업한 뒤 OB 연습실에 몇 차례 나가기도 했고 한참 지난 후 서른이 넘어서도 OB 미국공연을 같이 준비하기도 했지만 일을 핑게로 곧 그만두어 버렸다.


고3 이후로 합창단실을 올라갈 일이 없어지자 대신 우리 합창단과 음색이 꽤 비슷하다고 여긴 러시아 민요에 빠졌다. 한국에 출시된 러시아 민요 음반을 모두 사모았다. 돈코자크 합창단과 모스크바 방송합창단 음반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고3인 87년은 노태우대통령이 북방정책을 하면서 러시아와의 수교가 막 시작되었던 때였다. 그래서 볼쇼이 합창단같은 러시아의 유명 합창단들 공연이 꽤 있었다. 러시아赤軍합창단(Red Army Chorus)도 들어와 러시아 군복을 입은 채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공연을 다니면서 귀명창(?)이 되었다. 돈코자크 합창단이 부른 카츄샤나 칼린카, 저녁종, 자작나무는 들에 섰도다... 등의 레파토리를 외우고 다녔다. 그뿐만아니라 미국의 로버트쇼 합창단이나 태버나클합창단, 독일의 피셔합창단 등 합창곡이라면 빼놓지 않고 음반을 사모았다. 그레고리안이나 암브로시안 찬트의 아카펠라에 푹 빠지기도 했다. 이 음악들과 함께 고교시절이 끝났다.




2016년 여름인가 한국에 들렀을 때 본가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가본 곳이 바로 숭실고등학교였다. 동기, 선배들과 화음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서 내려오던 은행나무 길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돌아가신 교장선생님, 퇴임하여 기념식수에나마 이름을 남기신 담임선생님들,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사 두 동과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 26년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전에 구 교사의 현관 서무실 앞엔 ‘但求神國之義’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는데 난 그 예서체로 된 그 글씨가 좋아서 교과서 앞장에 베껴 써놓곤 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궁리하면서.



S가 죽던 해 우리가 이화여고 운동장 미루나무 밑에서 부른 노래는 vive l'amor 였다.

사랑만세(Vive l’amour), 친구만세(Vive la compagnie)~!


Let every good fellow now join the song. Vive la compagnie! Success to each other and pass it along. Vive la compagnie!Vive la, Vive la, Vive l’amour. Vive la compag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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