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일보 총수 유쾌한
어린시절 소소한 추억들이 담긴 나의 부끄러운 연대기를 미리 읽어본 사람은 내가 딴짓거리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내 기억들을 편년체(?)로 주욱 나열해 놓고 보니 내 인생은 마치 딴짓거리 콜렉션 정도로 정의될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인생의 중요한 국면에서 항상 남들보다 몇 년 씩 뒤처지거나 목표달성에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딴짓거리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지금도 와이프는 매번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딴짓거리를 찾아와 거기 몰두하고 있는 나를 참으로 한심하게 바라본다. 성인 ADHD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혀를 끌끌 찬다.
고3이 되자마자 1, 2학년 동안 합창단 생활을 하느라 못다했던 공부를 서둘러 시작했다. 게으름뱅이는 저녁에 바쁘다는 속담처럼 그 동안 놓친 진도와 매월 치뤄지는 모의고사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합창단실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남보다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했다. 전년도 겨울방학부터 시간표를 짜서 수학과 영어에 올인했기때문에 어느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 자신감은 3학년이 되어 치룬 첫 전국모의고사에서 처참하게 박살났다.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 이래서는 목표한 대학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계획을 수정하거나 공부에 더 몰두했어야 할 그 상황에서 나는 반대로 하루종일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강렬한 허세에 사로잡혀 두꺼운 책을 사서 읽거나 하였다. 이것은 나에게 정신적인 불안과 다른 한편의 안식을 동시에 주었다.
우리 학교엔 큰 도서관이 별관으로 있었는데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했고 당직 선생님이 저녁에 한번 정도 들러 살펴보는 정도였으므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늦은 밤까지 책을 읽었다. 친구들과 모여 공부한답시고 사설 독서실을 끊기도 했으나 10시가 넘는 늦은 밤에 가서 비몽사몽 앉아 있다가 동이트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이마저도 공부가 하기 싫어지면 대학순례(?)를 했다. 집앞에서 143번 버스를 집어타고 뒷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졸거나 하면서 상도동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상도동이 종점인 이 버스는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중앙대, 총신대, 숭실대 등의 대학들과 서대문, 서울역, 남영동, 노량진 등의 학원가를 지나느라 늘 대학생과 학원생들로 만원이었다. 고3이던 해는 그 유명한 1987년이었으므로 도중에 시위로 막혀 한참을 돌아가거나 최루탄 냄새가 밴 학생들이 우루루 타는 바람에 함께 눈물콧물을 흘리곤 했다. 그럴라치면 아예 명동과 롯데백화점을 돌아 인사동 앞으로 돌아오는 152번을 탔다. 물론 이 버스도 명동성당과 조계사를 거치느라 시위대와 전경들 사이에서 꼼짝달싹을 못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내가 최고의 노선으로 평가하는 136-1번도 자주 탔는데, 그 노선은 세검정 상명여대 앞에서 부암동 자하문쪽으로 좌회전하여 청와대 뒤 북악산길로 내려온다. 나는 당시 한식집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오래전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다는 석파랑 앞에서 차를 내려 부암동사무소까지 걸어 올라간 다음 자하문 앞에서 한참을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청와대 뒤 북악산 정상이 위로 보이는 자하문은 아래로는 서울 안쪽 빌딩들과 남산을 두고 있어서 땅거미가 질 때면 조용히 사색에 잠기기에 좋았다. 그 옛날 김신조가 '청와대를 까려고' 넘어와서 싸우다가 종로경찰서 서장과 경사 한명이 전사했다고 그들의 동상도 세워두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저 사람은 왜 서장인데 앞에서 싸우다 죽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곳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사색을 하고 있자면 오래잖아 총을 든 수방사 군인아저씨들이 와서 여기 있으면 안된다고 쫒아냈다. 그러면 자리를 옆동네 환기미술관으로 옮겨 그림도 보고 낮잠도 자고 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언젠가부터 부암동이 주목받고 서울성곽 투어가 만들어지면서 그 곳이 예전의 느낌을 잃어버렸지만 마치 어린시절의 나를 위해 보존된 장소인 것 같아서 지금도 한국에 가게 되면 가끔 들러본다.
한번은 안개비가 내리는 날 계동 현대사옥 뒤 북촌을 정처없이 거닐다가 교정이 너무 예쁜 중앙고등학교를 우연히 발견한 적도 있었는데, 오래 전에 이곳에 와 본것 같은 호기심에 무작정 들어가 보았다. 교정 뒤쪽과 창덕궁의 어느 후원 끝자락이 맞닿아 있었다. 이 후원은 오랜동안 출입을 통제했던 모양으로 이끼가 낀 선돌과 낡은 추녀가 그윽한 안개속에 자리한 게 마치 왕궁의 비밀의 정원처럼 보였다. 나중에 TV 드라마 겨울연가 주인공들의 학창시절로 이 학교가 나왔는데 (줄거리상으론 춘천의 어느 학교임에도) 아마도 장소가 너무 아름다워서 로케이션을 하지 않았나싶다. 그리고 나중에 알 게 된 것인데 고려대학교 본관과 인촌상이 있는 본관앞 잔디밭이 모두 크기만 달랐지 중앙고등학교의 본관, 인촌상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고려대학교와 중앙고등학교가 같은 재단이고 식민지 시절 동일한 일본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겼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런 장소에 짱박혀 이런 저런 책을 읽어내려갔는데 칼 야스퍼스의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모하메드]와 콜링우드의 [역사철학],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리고 조성기의 [야훼의 밤] 등의 책 등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서 간행한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에수, 마호메트]라는 책은 윤리를 가르쳤던 김집중 선생님이 내준 독서과제 책이었는데 고통스럽게 읽었던 책을 객기로 다시 집어 든 것이었다. '고통스럽게' 읽었다는 것은 당시엔 내가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읽기 어려웠지만 그저 '목표달성'하듯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끝 페이지를 닫으면서 나는 대학생들과 같은 교양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하튼 이런 같잖은 허세를 부리느라 당연히 그 해 입시에 실패하고 올림픽이 있던 1988년 용산에서 재수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산 해가 아니었나싶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좋아하던 잠을 포기하고 새벽 다섯 시에 학원에 도착하는 미친 짓을 1년 동안 했다. 좋지 않은 머리로 모의고사 1등은 못할 터이니 출석 1등이라도 하자 싶어서 아직 어두운 새벽 첫 차를 탔다. 학원은 후암동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교인 숭실고등학교가 평양에서 이남한 뒤에 이 곳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의 교사를 학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남영동 숙명여대 입구에서 하차하여 용산고등학교를 지나 뛰다시피 해서 후암동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온 몸에 땀이 배고 턱에 숨이 찼다. 막 정문을 열고 있는 수위아저씨와 눈인사를 하고 강의실에 들어가 가방을 풀고 나서 밖으로 나와 평행봉을 했다.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다 보면 싸한 남산 아침 공기와 적막감이 너무 좋았다.
백이십 명이 들어가는 강의실은 여름을 나기엔 지옥 같은 곳이었다. 천정에 돌아가는 선풍기도 옆자리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놈들의 뜨거운 몸의 열기를 식혀주지 못했다. 학원에서는 급기야 고무다라에 얼음덩어리를 채워 교실마다 두어 개씩 놓아주었다. 더위 먹은 학생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얼음덩어리에 발을 넣고 수건을 빨아서 방과후엔 녹은 얼음물이 구정물이 될 정도였다. ‘어름팝니다’라고 써 붙여 놓은 동네 석유집에서 얼음을 톱으로 썰어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하던 시절이 지나도 한참 지났는데 어디서 그런 얼음을 매일 공수해 왔는지, 아무튼 시설이 후진 것에 대한 불평도 않고 그렇게라도 해 준 학원이 그저 고마웠다.
그 해 내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 당구와 이성교제로 재수를 망친다고 악명이 높은 이 학원에서도 이번엔 아무 딴짓거리 없이 일년을 잘 견뎌냈다. 다행히 이과반인데다 물리,화학 선택이라 우리 반에 여학생이 별로 없었고 복도에서 만나는 여학생들도 모두 이과생이다보니 그닥 끌리지 않았다. 바로 옆 동에 예체능계반 여학생들에게 잠시 한눈을 팔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참아 냈다. 이 기간 중 유일한 탈선(?)이 가을 어느날 성인영화를 한 편 본 것이 다였다. 그날은 추석이라 집에 있으라는 걸 뿌리치고 학원에 나가는 미련을 떨었는데 우리 반에 마침 나 같은 미련한 친구들이 몇몇 더 있었다. 서로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까짓거 오늘 하루만 삐뚤어져 버리자고 했다. 기껏 공모한 게 명동에 있는 중앙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영화표를 사고 극장 옆 골목에 주저앉아 도시락을 까먹었다. 당시 나영희가 주연한 ‘매춘’이란 영화였는데 서라운드 사운드에 총천연색 화면 가득히 찬 나영희의 가슴을 보고 일주일 가까이 심난해서 공부를 못했다. 하지만 이내 열공모드로 전환하여 88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 때가 되자 이 정도면 합격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원을 하고 학력고사를 보고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