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의 업그레이드
병을 얻으신 아버지를 뵈러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이 병원, 저 병원 모시고 다니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짬을 내 다큐PD로 있는 친구 C를 연희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정도를 미리 가서 약속장소 부근을 배회했다. 연희동에서 동교동방향으로 가는 연희로와 수색에서 신촌으로 가는 성산로가 교차하는 연희입체교차로(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지 모르겠으나)까지 걸어 나왔다. 길은 그대로였지만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팬시하게 꾸며져 과거와는 다른 뭔가 세련된 분위기가 들었다. 입체교차로 아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문득 눈을 들어보니 놀랍게도 그 목공소가 30년 전 모습을 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을 그 시간동안 마치 이 목공소만 박제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 모습 그대로였다.
봄 부터 시작되어 십 여 명이 목숨을 잃던가 버리던가 할 때까지 지루하게 이어가던 시위 정국이 최고조에 달했다. 1991년 여름 어느날이었다. 신촌에서 3수를 하고 있던 친구와 점심을 먹고 나와 걷다가 어쩌다 시위 인파에 묻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심정적으로 동조는 했으나 한번도 시위에 참여해 본적이 없었다.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런 시국에 청년이 왜 현장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느냐'고 주일학교 목사님께 꾸지람을 받았던 터라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 객기하면 내로라하는 친구와 나는 어쩌다 보니 맨 앞에서 돌을 던지게 되었고 내가 던진 보도블록 조각 하나가 공중을 날라 한 전경의 헬멧을 강타한 것을 보았다.
블록 조각이 크지 않아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보도에 있는 일단의 사람들 속에서 카메라 하나가 내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경찰 채증조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쭈뼛 섰다. 일단은 도망가기로 하고 탈출할 기회를 찾다가 이 곳 입체교차로까지 오게 되었다. 주변을 보니 연희로나 성산로 모두 전경들로 포위되어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포기하고 그 날 불온서적이라 할 만한 책을 가방에 넣고 있었기 때문에 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이 교차로 한가운데 있던 목공소로 무작정 뛰어 들어갔다.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좀 맡아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마 하셨고, 나는 다시 시위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날의 시위는 경찰이 먼저 물러나는 바람에 잡히지 않고 귀가할 수 있었는데, 다음날 다시 가보니 그 분이 책을 돌려주면서 이런 거 가지고다니지 말고 몸 조심하라고 하셨다.
학력고사가 끝나고 어찌어찌 합격통지를 받고나서, 그러니까 89년 3월 입학하기도 전 겨우내내 친구들과 서대문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소위 교양서라는 것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같은 학교에 합격한 J는 프로이드의『정신분석학입문』을 읽기 시작했고 대학에 낙방한 H는 함께 와서 3수 준비를 했다. 대학생이 되기도 전에 이 책을 '겁도 없이' 선택한 이유는 고3때 조정래의 『태백산맥』 읽은 뒤라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기도 했고『태백산맥』맨 뒷장에 한길사에서 출간한 책들을 소개한 광고지를 같이 껴주었는데 그 곳에 권장도서로 소개되어 있기도 해서였다. 또한 공대 입학생이 의례 가질 수 있는 사회인문학에 대한 경도 등의 이유로 이 책을 읽은 것 같다. 두툼한 노트 한권이 넘게 빽빽히 요약을 해가며 꽤 열심히 읽었는데, 이 책을 6편까지 읽고나니 근현대사에 대한 어줍잖은 지식과 더불어 누구의 힘 없이 스스로를 의식화하였다는 일종의 자만이 생겼다.
내 전공은 건축공학이었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지만 미술에 대한 그리움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취직걱정 없고 동시에 미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보인 건축공학을 선택한 것이었다. '단순무식한 공대생'으로 살고싶지 않아 우리 학과에서 뜻이 맞는 친구들 몇몇과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책을 정해 읽고 토론을 했다. 쌩떽쥐뻬리의 『야간비행』을 시작으로 까뮈의『이방인』과『시지프스의 신화』, 싸르뜨르의『구토』, 막심 고리키의『어머니』, 헤르만 헷세의『싯다르타』나『유리알유희』등의 문학책들을 읽었다. 고3 때 그나마 독서로 딴짓거리를 해서 나름 책을 좀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자유교양'이라는 동아리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을 공부하며 사회과학적 사고와 논리에 익숙하던 Y나 영화광으로 당시 거의 모든 영화비디오테잎을 섭렵하여 재미있는 얘길 들려주던 W의 관점은 내가 얼마나 단순하고 무식한지를 일깨워 주었다.
토론회의 첫 책이 쌩떽쥐뻬리의 『야간비행』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야간비행'이라고 불렀다. 건축공학과의 다른 친구들은 '야비'라고 줄여서 불렀다. 책보다는 당구치고 술마시고 디스코장가고 여행가고 하던 우리 모임에 대한 조롱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방인』을 읽을 땐 태양이 뜨거워 아랍인에게 총을 쏘았다는 뫼르소의 살해 장면을 두고 Y와 설전을 했다. 정확히 어떤 논점을 가지고 논쟁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 논쟁에 관심이 없었다. 모두 따분하다는 듯이 보고만 있었다. 우리 둘 다 ‘부조리’를 옳게 해석했는지 아님 그냥 지기 싫었는지 잘 모르겠다. 스무 살짜리가 어찌 부조리를 알겠는가. 『시지프스의 신화』 에서도 『구토』에서도, 심지어 별 논점이 있을 리 없는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에서도 왠지 모르겠지만 Y와는 계속 논쟁을 했다. 생각이 깊고 논리가 제법이던 Y에게 지고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앞선 해 재수생활이 막바지에 이르자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지도 않고 친구와 함께 을지로에 있는 한국체육관에 등록을 했다. 이 체육관 출신인 김광선이 당시 세계 권투 챔피언이었을 때였다. 한국체육관은 3층짜리 건물에 층별로 복싱, 태권도, 유도를 가르쳤는데 친구는 권투를, 나는 태권도를 배웠다. 대학생이 된 나는 매일 새벽 체육관에서 수련을 한 뒤 등교했고 3수생이던 친구는 매일 심형래처럼 췻췻 하며 잽을 뻗으며 학원으로 향했다. 헐렁한 도복을 입고 다리를 찢으며 벨트의 색깔이 몇차례 바뀌자 조금씩 대련을 시켰다. 이번엔 선린상고 태권도 특기생과 겨루기를 하다가 회축에 맞아 뒤로 넘어지는 바람에 허리병을 얻었다. 관장이 왜 나를 이 대련에 넣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병이 심하여 학교를 휴학하고 세브란스병원 재활원에서 치료를 받느라 1년을 보냈다.
1991년. 1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동기들은 3학년이 되어 박물관과 종교건축 설계를 배우고 있었고 혼자가 된 나는 이제 막 주택설계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주택설계에서 나는 역촌동의 어느 나대지를 택하여 지적도를 뽑고 대지모양에 맞추어 집을 하나 설계하였는데 그 땅에 앉아있어 보면 알맞는 집의 모양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교수 말을 그대로 믿고 아무것도 없는 나대지에 하염없이 앉아있어보기도 했다. 지나가는 행인이 날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하여 설계를 배우는 학생이라고 했더니 바로 옆집에서 최진실이 어릴 적에 살았다며 멋있게 잘 지어보라고 했다. 다른 학생들은 끼리 끼리 모여 설계실에서 밤을 새며 과제를 했는데 성격이 모난 나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홀로 과제를 마쳤다. 전혀 실용적이지도, 아카데믹 하지도 않던 그 첫 설계에 몇 권 읽은 변증법 지식과 한 줌도 안되는 독일어 실력을 뽐내려 'Aufhebung(지양)'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지금 생각해도 낯이 다 뜨겁지만 이 주택설계로 A를 받았는데 이는 나의 건축과 실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교양수업에서도 모두가 듣는 유명한 강의는 일부러 피했기때문에 나는 늘 혼자서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라틴아메리카 정치경제]라는 정치학과 강의에 구미가 당겨 3학년이 된 야간비행 멤버들한테 같이 선택과목으로 함께 듣자고 했다. 그런데 1학년 때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양을 함께 듣다가 쓴맛을 본 멤버들이 모두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공대생이 한명도 없는 정치학과 강의를 혼자서 외롭게 들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 [라틴아메리카 정치경제]를 굳이 택해서 공부했던 이유는 당시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칼 바르트에서부터 본회퍼, 몰트만, 불트만의 신학서적들을 추천받아 읽어내려가다가 자연스럽게 아니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레오나르도 보프, 구스타보 구띠에레즈 등의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까지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한 학기동안 이 강의를 외롭게 들으며 라틴아메리카 군사정부들이 추진한 경제개발모형과 사회사상,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 이 군사정부들과 대립각을 세운 라틴아메리카 카톨릭 교회들의 저항에 관해 공부하다가 모종의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또!)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봐야겠다고 작정했다. 일제시대에 지었다고 사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본관 옆에 신학대학부가 있었다. 이 건물의 꼭대기엔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아주 자리를 잡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안병무의 민중신학, 오강남의 비교신학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여 화우회라는 미술 써클에 들어갔다. 써클룸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이젤과 물감과 기름으로 범벅이 된 빠레트며 몇 번이고 덧칠이 된 캔버스들 무더기에 푹 묻혀서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세상이 어찌되든 좋았었다. 송진냄새 비슷한 테레빈유 냄새와 나무 냄새. 잉크냄새 들이 시위대를 쫒아 백양로 안쪽까지 들어와 쏘아댄 최루탄 냄새에 압도되어 콜록거리면서도 아무도 없는 화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냄새들을 미술관에 가면 고스란히 되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인사동과 관철동의 미술관 순례도 잊지 않았다. 미술관은 언제나 따뜻한 할로겐 조명을 받는 하얀 회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나 여기있소 하고 말하는 그림들과 부드러운 음향이 아늑한 둥지처럼 여겨졌다. 그때 내가 작품들을 보는 방식은, 지금은 약간 달라졌지만, '내 마음속의 원근법대로'라는 한 건축가의 지침대로였다. 나는 어린아이가 되어 각각의 전시실로 들어서는 순간의 체험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참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화실과 신학대 도서관 외에 내가 좋아하던 장소는 학생회관과 세브란스 병원 사이에 있던 루스채플이었는데, 역시 아무도 오지 않는 그 곳에 하루 종일 앉아 책을 읽거나 스케치북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루스채플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라는 것과 이 학교 졸업생 누구도 알아채거나 기억하지 못할 어떤 그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루스채플엔 작은 예배당이 있고 그 곳으로 들어가는 로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벤트별로 그린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그림이 특이한 점은 모두 한국화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작가는 2천 년 전 유대에서 태어난 예수에게 갓을 씌우고 도포를 입혀 조선시대 민중들 안으로 데려와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화선지에 전통 한국화 기법으로 예수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여러 이벤트를 그린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어느 채플시간에 초빙되어 한시간이 넘도록 판소리로 예수전을 읊은 박동진 명창의 모습처럼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충격을 받았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아버지는 '데모하지 말아라. 너 데모하는 순간 공무원인 아버지는 바로 짤린다'며 단도리를 하셨다. 등하교 하면서 매일 주욱 늘어선 전경들 사이로 가방을 열어 보여주면서 정문을 통과하는 시대였다. 가방 안에 어쩌다가 사회과학 냄새가 나는 책이라도 있으면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뱉던 전경들이 닭장차라고 불리던 전경버스로 연행(?)하여 매질을 하던 때였다. 한번은 해방신학 책때문에, 또 한번은 당시에 합법적으로 출간되어 교보문고에서 '정식으로' 구입했던 북한서적 『조선통사』때문에 끌려가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데모는 하지 않았지만 독서를 통한 의식화는 조금씩 깊어져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화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전시회를 다니는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이 느껴졌다. 어느날 야학 교사가 되었다.
나중에 회사에서 HR 업무를 하면서 전문성을 고양하여 사측을 기쁘게 해줄 요량으로 심화 학습했던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을 이 때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 야학은 노동야학, 생활야학, 검정고시야학으로 3분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이나 노조법을 가르치는 일이 있었고, 검정고시 야학이라도 근로기준법 내용을 익혀 신문을 만들거나 방과후 특별활동으로 사물놀이같은 걸 했으니 노동이니 생활이니 검정고시니 하는 구분이 사실 의미가 없었다. 거기다가 교사들(교사들은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강학, 학생들은 배우면서 가르친다고 학강이라고도 했는데) 중 상당수가 운동권 출신들이어서 어느 야학을 막론하고 교과과정은 다소 정치색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D야학(정식명칭은 D중고등학교)은 송파의 마천동성당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에 공수부대가 있던 거여동과 마천동 일대를 거마지구라고 불렀는데 연립주택 지하에 작은 공장들이 가동되고 있었고 이곳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 직업청소년들이 많았다. 우리 학교는 대외적으로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 근로자들로 하여금 검정고시를 보고 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도록 국영수 과목 위주로 편성된 야학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근로기준법 강의도 있었고 정치현안을 신문으로 만들어 벽에 붙이거나 사물놀이를 가르치거나 하기도 했으므로 노동야학 비슷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사회운동 차원에서 야학 교사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학교 교감이나 선생들이 가진 정치색에 약간 거부감 같은 게 있었던게 사실이었으나 어찌어찌하여 함께 근기법도 학습하고 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있었다. 편안한 환경에서 빈둥거리다 온 새파란 공대생놈이 나보다 어리지만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까지 하는 아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이 가르친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기는 일이었지만 나름 꽤나 열심히 학습에도 참여하고 재미있게 강의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동료 선생들도 이 노동법 과정을 만들어 학생들이 사업장에 노조를 만들도록 지원하겠다거나 하는 어마어마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직장에서 약자인 근로자로서 불이익을 받지 말아라 하는 차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집단적노사관계법인 노조법보다 개별적근로관계인 근기법 위주로 과정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당시 어리디 어린 근로청소년들의 얼굴을 보면서 과연 이런 수업들이 기획한 대로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로 밤새 쓴 소주를 들이키기도 했다.
그 때 학습자료로 장명국氏가 쓴 『노동법해설』이란 책을 봤는데 이분은 나중에 N신문을 창간하고 Y방송 사장을 지냈던 분으로 1997년인가에 내가 신촌 로타리 아태재단 근처의 N신문 사무실에서 취재기자 면접으로 처음 뵙게 된 인연이 있는 분이다. 각설하고 D야학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하루는 우리가 교무실로 쓰던 곳과 복도에 학생들과 교사들이 함께 만들어 게시한 신문의 내용을 마뜩찮게 여기고 있던 마천동성당의 주임신부가 우리 교사들을 소집하였다. 당시 성당의 주임신부는 P 마르띠노라는 신부님이었는데 야학 교과과정을 근로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과정에서 성당 신도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과정으로 바꾸라고 했다. 사실 나가라는 소리였다.
그날 교사들과 P 마르띠노 신부가 만난 곳은 그 분이 거주하는 사목회실이었는데 서재 가득 꽉꽉 들어찬 양주며 그분이 면담 내내 내리 피워대는 줄담배로 천주교 사제가 금욕을 하는 사람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접했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남미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의 모습과 그 분이 소장한 양주 캐비넷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아무튼 결국 학교에 대한 후원이 어려워지고 성당측에서 더이상 장소제공을 거부하여 우리는 전교조 송파지부의 도움으로 그 옆 거여동에 작은 지하실을 세를 얻어 학교를 이전하게 되었다. 나도 어찌어찌하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고 다시 입시공부를 하느라 야학교사도 그만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