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풍성해지는 딴짓거리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김광균, 와사등(瓦斯燈) 中)
이 번엔 고대생이 되었다. 공부를 안하고 딴짓거리를 한다는 이유로 연대에서 퇴학당하자 기왕 이렇게 된 거 책이라도 원없이 많이 읽을 수 있는 인문학을 전공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공대생으로 지낸 시간 내내 부딪힌 우여곡절이 결국 이렇게 날 인도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사실 나는 이과보다는 문과가 맞다고 정신승리를 했다. 날 버린 학교와 여러가지로 대척점에 있던 고대에 입학하니 연대 다니던 뺀질이가 전향했다고 신기해 했다. 고대생 욕하던 응원가를 버리고 연대생 욕하는 응원가를 새롭게 배웠다. 연고전이란 말이 입에붙어 고연전이라고 하면 어색했다.
고대에서는 철학을 전공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뭘 전공했다고 말하는 게 참 쑥스러운 이유는 학교 공부엔 그닥 흥미가 없었다는 것 때문이다. 아무튼 이 무쓸모의 학문을 전공한 이유는 시험 준비를 하면서 읽은 『미학에세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이 책은 약간 유물론적 미학의 관점이었는데, 중국의 주균도가 쓰고 유홍준 당시 영남대 교수가 번역하였다. 이후 진중권이 쓴 『미학에세이』도 읽어봤지만 그 책은 내용보다는 오히려 그 안에 나오는 M.C.에셔의 그림에 더 관심이 갔던 책이다. 공교롭게도 책의 저자들이 이후 한국 시민사회에서 꽤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게 재미있다.
어쨋든 철학과에 가서도 미학에 관심이 많아 독일철학 교수가 개설한 미학과목에서 칸트와 헤겔의 미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당시 내 마음을 더 사로잡은 것은 동양철학이었다. 이택후가 쓴 『중국미학입문』을 읽으며 중국 철학 입장에서 서술한 중국 미학의 특색을 찾아보고자 했지만 서양 미학과는 달리 동양에서 미에 대한 사고를 별개로 전개하는 것은 좀 억지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철학과는 동양철학 쪽이 강했는데, 작고하신 김충렬 선생님의 노장철학 강의가 인기가 있었다. 강의 첫 시간에 선생님께서 당신의 스승인 대만대 방동미(方東美) 교수가 도덕경을 상고하는 모습이 이랬다며 눈을 지긋이 감고 도덕경 첫머리를 중국어로 외셨다. "따오~ 커~따오, 페이창~따오.. "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도道는 영구 불변의 도道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名이란 것도 사실 영구 불변의 이름名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구절. 이 장면은 나중에 EBS에서 김용옥 교수가 도덕경 강의를 할 때 예의 그 쇼맨십을 곁들여 관객들 앞에서 똑같이 중국어로 읊던 대목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깐깐한 조선 선비같으시고 또 한편으로는 병마용의 진시황의 장군처럼 생기신 김충렬 선생님에게 반하여 그날로 바로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앞 제기시장엔 고갈비 집이 많았다. 철학과 동기들 중엔 그나마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함께 막걸리와 고갈비를 먹으러 다녔다. 우리가 입학하던 해는 학번이 나이순으로 매겨졌는데 1번부터 6번까지가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다가 다시 시험 쳐서 들어온, 소위 뜨내기들이었다. 경력과 나이들이 비슷해서 끼리끼리 잘 어울려 다니고 방과후엔 전철역까지 같이 걸어가곤 했었다. 하루는 그 중 몇이 앞으로 공부에 전념해 보겠다며 철학대사전을 구입하기로 하고 인당 7~8만원씩인가를 들고 왔다. 대사전 구입하기로 한 사람, 대사전 구경한번 해보겠다고 한 사람.. 이렇게 우루루 시내 서점 가던 길에 누군가 시장통에 들러 고갈비에 막걸리로 간단히 요기만 하고 가자고 했다. 마시다가 당연히 발동이 걸렸다. 술이 먼저 떨어지면 남은 고갈비가 아까워 한 병만 더하자고, 안주가 떨어지면 남은 술이 아까워 고갈비 하나 더 시키자고 하다가 새벽녘까지 마셨다. 철학대사전 값 십 수 만원은 막걸리에 고갈비, 그리고 취해서 떠드는 개똥철학에 탕진한 셈이었지만, 나중에 두고두고 그 철학대사전 안 사길 잘했다고들 했다.
막걸리와 고갈비를 먹으러 종로 피맛골까지 진출했다. 파고다공원 있는 종로 2가 네거리에서 인사동 쪽으로 가다가 왼편 안쪽에 있는 골목에 와사등이라는 막걸리 집이 있었다. 나무판자로 벽을 세운 좁디 좁은 술집에 문 안쪽인지 아님 문 바로 바깥쪽인지 전봇대가 하나 가로막고 있었다. 막걸리에 고갈비를 파는 유명한 집이라고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그래선지 벽면이 온통 낙서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일단 그 골목이 지저분하고 이 막걸리집에 들어서면 퀴퀴하고 눅눅한 냄새가 나서 그닥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으나 양은사발에 주는 막걸리와 고갈비(사실은 고등어 구이가 아니고 이면수 배갈라 구워 내놓지만)가 제법 운치가 그럴싸해서 자주 들렀다. 물론 갈 때마다 더 안시킬꺼냐고 눈치주던 주인 아주머니 성화에 금새 일어서곤 했다. 문앞에 조그맣게 와사등(瓦斯燈)이라고 조그맣게 상호가 쓰여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그 곳을 와사등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보질 못했다. 와사(瓦斯)는 가스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중국어로 가스를 瓦斯[와쓰]라고 한다. 피맛골 정비한다고 한 지 꽤 되었으니 지금은 아마도 없어졌을 수도 있겠다.
그 땐 정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건축과 미술에서 미학으로, 철학으로, 기호학으로.. 그러다가 정치와 경제로.. 종교로.. 머릿속엔 온통 여러가지 분야의 개념들이 난마처럼 얽히고 섥혀 지들끼리 충돌하고 결합하고 재생산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한번은 김영삼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발표하고 난 뒤에 제도의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아 『금융실명제 해설』이라는 책을 사서 읽다가 어머니께서 니가 왜 그런 책을 읽고 있냐고 핀잔을 주신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내 방 책장에 쌓여있는 책들을 보시면 항상 '금새 낡은 지식이 될 책 쌓아둬서 뭐하냐 좀 버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이 무렵 나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을 고르라면 당연히 송영배 교수의 『중국사회사상사』이다. 고등학교 때 독서를 시작한 이후로 이 책은 아마도 가장 여러번 읽은 책이 될 것이다. 『야훼의 밤』 같은 소설류야 서너번도 넘게 읽었지만 인문서 중에서 두번 이상 읽은것이 거의 없으므로 이 책은 거의 암기수준으로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노신과 진독수 등의 사상가를 알게 된 것을 비롯해서 중국의 사상사, 제도, 시스템에 대한 많은 이해를 도와준 책이다. 당시 김충렬 선생님의 중국어에 반하기도 했지만 이 책의 영향도 내가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이유였다.
이 시점에서 딴짓거리 연대기의 또 다른 축인 외국어 공부 편력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상업과 제2외국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차변·대변 구분이 어렵던 나는 제2외국어를 선택했다. 그리고 3년간 독일어를 배웠다. 사실 독일어는 격변화를 외우고 몇가지 문법만 정리하면 20점 만점을 받기가 수월한 과목이었지만 독일에서 유학하고 오신 선생님이 마음에 들어서 독일어를 좋아하게 되었고 몇가지 회화 문장도 제법 외우고 다녔다. 철학과 1학년때는 중급독일어를 배웠고 어린 시절 독일에서 살 다 온 H와 죽이 맞아 겁도 없이 [독일철학원전강독]이라는 강의를 들었다. 한글로도 이해가 안되는 칸트, 헤겔의 저작(중 극히 일부)을 독일어 원전으로 '읽었다'는 성취감만 남았다.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고나서 적어도 동북아의 지식인으로 살려면 중국어와 일본어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어 학원을 다니면서 학교 시청각실에서 일본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대사를 외웠다. 학교는 빠져도 학원은 개근을 했다. 일본어는 이 정도면 됐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 때 즈음 중국어를 시작했다. 왜 진작 배우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다른 어떤 외국어보다 멋이 있다고 생각했다. 졸업을 앞두고 토익에 집중하라는 조언들을 무시하고 일본어능력시험과 한어수평고시를 준비했다.
4학년 여름학기 땐 중국 하얼빈공업대학으로 단기어학연수를 가기도 했다. 중문과 학생들이 대부분인 이 연수에 철학과 학생은 나뿐이었다. 무더운 여름 강의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흑룡강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숙사 앞 뜰로 나가 앉아 있으면 남한에서 온 우리가 신기했는지 중국 학생들이 말을 걸어왔다. 얼굴을 익히고 친구가 되면 함께 白酒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들로 북만주의 밤을 보내곤 했었다. 그 친구들은 술이 들어가면 눈을 반쯤 감고 나즈막히, 예의 그 음악같은 성조로 당시(唐詩)를 외워주곤 했다. 시도 시였지만 중국어의 그 운율에 넋이 녹아버릴 듯 했다. 그 중에는 북한에서 유학온 박사과정생 A가 있었다. 아직 90년대 중반이었기때문에 연수를 오기 전 학교당국에선 중국에 가게되면 북한에서 온 학생들과 대화하지 말라고 단도리를 했었다. 이런 지침들은 어기라고 있는거지 하면서 겁없게도 그와 자주 어울렸다. 그는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정을 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금새 술친구가 되었다. 함께 독한 백주에 거나하게 취기가 돌 때 쯤이면 서로 마음 속 이야기를 했다.
연수과정이 한참일 때 한번은 버스를 대절하여 백두산에 가게 되었다. 북한과 중국이 국경으로 절반씩 나눠가진 백두산을 중국에선 장백산이라 했다. 동행하는 중국 학생들도 몇 있었기 때문에 A에게도 함께 가자고 했다. 북한에서도 백두산까지는 못가봤다는 A에게 중국쪽에서라도 함께 보자고 졸랐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역에서 길림성 연길까지 기차를 탔고 연길시내에서부터는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라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내리 십 여 시간을 버스로 달렸는데, 이도백하에 도착하기 전이었는지 이도백하에서 천지로 갈때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나 이 곳 로키의 침엽수림과 같은 검은 숲이 4시간 동안 끊임없이 펼쳐졌다.
아마도 그것이 전나무 숲이었던 것 같다. 버스가 달릴 만한 비포장도로가 하나 뚫려 있고 좌우로 아름드리 키높은 침엽수들이 낮에도 컴컴한 밀림숲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새카만 숲 사이로 새하얀 나무가 한 두 그루 씩, 또는 군락으로 서있는게 보였다. 자작나무인지 사시나무인지 모르겠지만 나무의 그 허연 몸뚱이가 마치 여자 의 하얀 허벅지처럼 보였다. A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냐고 했더니 키득거리며 동의했다. 나무껍질이 새하얗기 때문에 아마도 나 아닌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봤을 것인데, 남과 북에서 온 이십대 청년 둘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로 한국에서도 가끔 기차를 타고 달릴 때면 캄캄한 숲 가운데 허연 나무가 문득문득 지나가기도 했는데 자작나무의 남방한계선이 어디까진지 몰라서 그게 자작나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마다 A를 생각했다.
귀국할 때가 되자 기숙사로 A가 찾아왔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서로 편지조차 할 수 없는 주소를 교환했다. 그는 내게 아버지께 드리라며 백주 한병을 선물했다. 흙으로 빚어 구운 주머니처럼 생긴 병에 주귀(酒鬼)라는 라벨을 달고 있었다. 중국어로 '술고래'라고 했다. 2천년 전 옛 무덤들 안에서 이 술이 발굴되었고 그걸 복원했다고 했다. 진시황제가 즐겨 마셨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 병의 마개가 부실했는지 비행기 압력을 못견디고 터져버렸다. 백주 특유의 향이 기내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