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IVER Nov 01. 2019

"요즘 것들은 참..."

쏟아지는 주관적 끄적끄적, 불편할 수도 있는 글.

어느 점심시간, 불편한 식사

 '건물주'되는 게 꿈이라는 말이 점점 많아진대.

 '공무원'되면 평타 정도 한 거라고 하더라.

 '인터넷 방송 BJ'라는 장래희망도 생겼대.


 면접과 오전 오후 미팅이 허겁지겁 끝난 뒤에야 허겁지겁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20-30대로 보이는 직장인들이 앉더니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혼자 밥 먹을 때 주로 브런치 쓸 글들을 수정하는데 귀에 꽂아둔 블루투스 이어폰에 노래 한곡 조차 나지 않는 덕에 그들의 대화를 반강제적으로 듣게 됐다.

 요지는 첫 문장의 대화를 하면서 "요즘 애들은 참 꿈도 작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고는 주변의 지인이 공무원이 됐는데 안정적인 일 하는 것도 부럽다면서 주변 지인들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불편한 혼자만의 식사시간을 가졌다. 그럼에도 노랫소리라도 크게 틀지 않았던 거라면 그들의 대화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런 게 참 아이러니긴 하다.

 '청소년들이 그런 꿈을 정하는데 보탠 것이나 있었는지'

 '혹여 자녀가 있다면 아이의 부푼 꿈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와 응원을 보낼 수 있는지'

 아이의 입에서 현실적인 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아니야 너는 더 큰 도전도 할 수 있잖아"라고 말해줬는지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지 괜히 따져 물어보고 싶었다. 물론 갑자기 그렇게 대뜸 말을 건다면 미친 사람이 말을 건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알기에 그저 상상만으로 그쳤을 뿐이다.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곧 30대 중반이 되어가는 나도 우리 때 꿈이 '과학자', '대통령', '운동선수' 등이 많았던 걸 기억하고 한 때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의 폭은 제한이 없었다. 심지어 네가 대통령이 되면 나는 전 세계 대통령(그땐 그런 게 있는 줄 알았다.) 될 거라는 말을 하면서 짝꿍과 나름의 신경전을 벌였던 기억도 선명하다. 며칠 전 친구의 12살 된 조카가 가족과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요즘은 공무원이나 안정적인 직업 구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 같이 밥을 먹던 가족들이 어처구니없지만 귀엽다는 듯이 쳐다봤고, 그 조그마한 어린아이 입에서 마치 20대의 청년이 할 법한 말을 했다는 묘한 느낌에 다들 그냥 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말했다. "근데 이건 웃을 일이 아닌 거 같아"

 그 식사자리에서 속으로 웃지 못한 어른들은 몇이나 있었을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대통령, 운동선수, 연예인, 회사 사장 등의 꿈을 갖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교육되었고, 적당히 안정적으로 살면서 소박한 행복을 찾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어른들의 말은 그러했다. "직장 하나 잘 구해서 결혼해서 아파트 하나 장만하고 아이 한 둘 잘 낳아서 기르고 노후를 건강하게 보내면 된다."는 말... 도 이제는 점점 비현실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내 집도, 결혼도 비현실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안정적인 연봉을 희망하는 것도 비정상이 아니고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것도 잘못된 꿈이 아니다. 세상에는 뭐든지 필요한 일이 있기 마련이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다. 내가 꼬집고 싶은 것은 스스로가 무슨 가치관으로 사는지 돌아본 뒤 그것이 정말 떳떳하다면 그때야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섭도록 눈치가 빠르고 스펀지처럼 배운다는 말을 들었다면, 아이들의 입에서 그러한 장래희망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듣고 기대치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른으로서 어떤 말과 행동을 했을까.



 우리도 피해자라면 피해자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 유행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풍자한 유행어다. 즉 흔히 말하는 꼰대들의 서두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영원히 깨어있는 생각을 하며 살 줄 알았던 내 주변 지인들도 자녀를 양육하면서 최근에 말을 듣지 않았던 아이에게 언어적 폭력을 잔뜩 휘두른 뒤에 (그것은 분명 훈계나 교육이 아니었다) "아빠 때는 이럴 때 뺨이며 엉덩이 허벅지며 온갖 구타를 맞으며 컸기 때문에 네가 맞지 않는 건 다행인 줄 알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뭐 이런 예시뿐이랴.

 우리도 억압받았다. 어쩔 때는 사랑하고 싶은 감정, 예술가가 되고 싶은 꿈,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 보고 싶은 꿈이 있다 한들 억압과 부정적인 평가에 심지어 유무형의 폭력을 당했으니까 말이다. 자꾸 타인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게 어쩌면 자연스러울 일이다. 삼삼오오 모인 작은 사회들이 우리에게 옳고 그름의 잣대를 던지고야 말았다.

 아이들이 왜 그런지 따지기 전에 나는 어른으로서 어땠을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이 글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물론 나도 그랬다. 우리는 타인에게 꿈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강요할 자격이 없다. 이를 인지했다면 당장 끊어버리는 것의 중요하다. '감정의 효율을 위한 행동 타협'은 이처럼 우리 일상에서 만연하게 일어난다. 지금의 10대들도 20년 뒤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을 보며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참..." 할 것이다. 

 왜 도전하지 못하냐, 왜 꿈이 작냐고 따져 묻기 전에 스스로에게 한마디 질문을 건네었으면 싶다.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을 때,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배가 직각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말을 듣고 결국 차가운 바닷속에서 꿈을 잃었다.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것은 우리다. 당장 그 부모가 나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부모의 지인이거나 친구다. 


 꿈이 작다고 뭐라 하는 어른이나, 꿈과 현실을 타협하라는 어른이나

 똑같다.

 그리고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따져 묻는 다면 반드시 책임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생각이 복잡한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