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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왈 Feb 15. 2020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그만

우리는 모두 별의 먼지였다 03


나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문장도 누가 볼까 봐 수줍게 글자 크기를 줄인다. 한때 그 시선이 신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떨어뜨린 휴지조각이 휴지통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때, 괜스레 신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그것을 주워 담았다. 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신 앞에 착하게 보이고 싶어서.


지금은 그 시선이 특정 대상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는 불특정 다수, 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 시선을 느끼는 게 몸에 배어버렸다. ‘누가 볼라,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다녀야 한다.’라는 부모의 말씀이 무의식에 꼿꼿이 박혀버렸다. 보이지 않는 감시관의 시선을 항상 느끼며 시선들에 둘러싸인 나는 판옵티콘의 죄수다. 언제부터 죄수 신세가 되었을까? 처음 감옥에 들어가게 된 날은 기억이 잘 나지가 않는다. 사람들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들도 나의 존재를 알기 시작하면서일까? 지난 그곳에서 일 년이 그랬다. 거기서 머문 시간 동안 관계 맺었던 직장 상사, 단체원, 친구, 지인의 지인이랑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니까. 실제로도 우연히 뜻밖의 공간과 시간에서 그들을 마주쳐 멋쩍음과 반가움의 복잡한 심경을 겪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저녁 약속 이전에 시간이 남아 들어간 지하철 역 주변 책방에서 대학교 동기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여름밤 아는 언니와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을 때, 그 많던 사람들 중에 갑자기 예전에 알던 동생이 나타나 내게 인사했을 때. 그렇게 우연성으로 가득한 일상 속에서 좀 더 아름다운 재회를 위해 그렇게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존재의 시선은 무엇일까? 일부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아름답게 (괜찮은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는 욕구가 창조한 가상의 시선들이다. 그때의 내 모습과 행위가 상대방이 인식하는 나를 규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심스러워진다. 그때 한번 던진 휴지가 휴지통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인데 그 한 번으로 나에 대한 평가가 결정 날까 봐 두려워서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죄수의 신세가 되었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욕망이 계속되고, 그곳에 소속되지 않은 이방인인 신분을 즐긴다. 어디에 정착하지 않고 또 어디론가 떠난다. 이는 결국 탈옥 심리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싫어서 하는 도피 행각이 아니다. 나 스스로의 감옥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가 적극적인 행동이 되었을 때다.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느냐라는, 그렇게 여행을 했는데도 또 그렇게 떠나기를 좋아하느냐라는 주위의 물음에 나는 자유를 외치겠다. 몇 가지 특징에 자신이 규정당하고 싶지 않다. 최대한 적은 범위에 소속되고자 한다. 그렇게 섬을 떠났지만 잠깐 가족의 얼굴을 보러 들어온 섬에서 나는 다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떠남으로써 스스로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마주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렇게도 떠나려고 안달이 났다.


물론 새로운 곳에서도 관계들이 성립된다. 잘 알지도 모르는 존재들의 시선들을 느끼며 나 자신은 또 하나의 판옵티콘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은 덜 단단하다. 또한 나는 그것을 탈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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