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여름휴가로 깨달은 것은

별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의 힘에 대하여

by 지수

아침에 눈을 뜨는데 벌써 체감 30도가 넘는다. 창 밖 매미들이 전, 후방 스테레오로 맹렬히 울어대는 통에 여름의 한 복판이라는 게 실감 난다. 땀에 끈적거려 깬 날은 끼니고 뭐고 다 생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런 날 뭔가를 데우고, 익히느라 불 옆에 서 있다가는 슬며시 오르는 짜증에 '사람은 어쩌다 하루 세끼를 먹게 되었나?'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몰두하기도 한다.


여행이라도 며칠 나서야 폭염 속 끼니 챙기기와 잡다한 집안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될 텐데, 온 가족이 짐 싸들고 돌아다니는 일에 시들해진 지 오래다. 코로나도 걱정이지만, 가족들이 원하는 여행 스타일이 제각각이라 모두의 개성을 맞추기도 어렵고, 애들도 클 만큼 커서 잘 따라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여름도 잠자코 집에서 지내려는데, 변수가 생겨버렸다.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이, 집이 지겹다는 하소연을 시작한 것이다. 집, 그중에서도 특히 '자기 방'이 너무 싫단다. 자꾸 눕고 싶게 만드는 침대와, 문제집들이 쌓여있는 책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끝없는 내적 갈등이 지긋지긋하다며 제발 집이 아닌 어디든 떠나자고 성화다.


숨 막히는 현실을 잠시라도 도피해보려는 하소연이지만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옥죄는 입시경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보겠다고 울며불며 학기 내내 안간힘을 써 온 녀석이 가여웠기 때문이다. 딸의 바람을 들어주는 김에 집돌이인 큰 애도 꼬셔 보았다. 숙소에만 머물러도 된다고, 같이 가서 잠만 자고 오자고 설득한 끝에 드디어 갑작스러운 가족 여행이 성사되었다. 부랴부랴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시골의 어느 호텔을 예약했다.


하와이라도 가는 듯 하늘하늘 원피스에 하얀 챙 모자를 쓰고 나서는 딸은 오랜만에 생기발랄했다. 차에 앉아 선명하게 파란 하늘과 흰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하늘이 너무 예쁘다고 연신 감탄이다. 분명 집 베란다에서 늘 보는 것들인데, 이제야 파란 하늘이 마음에 담기나 보다. 딱하다.


차가 안 막혀 금방 숙소 근처에 도착해 손님 없는 식당에서 서둘러 점심을 해결하고, 남편이 알려주는 사과나무 밭 옆 한옥 카페로 향했다. 통나무 기둥과 천장, 격자 창문은 분명 한옥인데, 크리스털 유리잔들을 걸어놓은 천장과 현대적 주방기기들의 주문대는 도시적 분위기이다. 다행히 필로티가 있는 벽 쪽을 전면 개방해 환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올해 처음 먹는 팥빙수에 감동하며 카페의 이쪽, 저쪽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포즈를 취하고, 필로티에서 보이는 사과나무들을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면서 "그래, 이런 게 여행이지!"같은 감회를 나누었다. 하지만,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의견 차이와 불편함들을 곧 마주하며 즐거움과 만족감이 급격히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저녁식사 장소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뭔가를 포장해 와서 안전하게 객실에서 먹어야 한다는 주장과 그래도 여행까지 왔는데, 오늘만큼은 외식다운 외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저녁 손님이 아직 없을 것 같은 이른 시간에 식당에 갔다. 오후 5시, 정말 우리밖에 없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막상 펼쳐진 긴 저녁시간이 지루했다. 코로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숙소의 사우나나 수영장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TV 시청으로 킬링타임만 하고 있자니 태만해지고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서라면 얼른 저녁식사와 집안일을 치우고, 개운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에 빠져들어 주체적으로 시간을 보냈을 텐데 말이다.


네 명이 한 객실을 이용하면서 서로 맞춰야 할 것들이 많은 점도 잊고 있었다. 잠자는 시간이 다 달라서 몇 시에 방 불을 꺼야 할지, 에어컨은 밤새 켤 건지 말 건지, 기상시간은 언제로 할지 모두 논의해야 했다. 그날 밤을 보내며 네 사람이 한 방에서 함께 자는 건 이제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게다가 숙소의 베개마저 푹신하기만 해서 목을 받치지 못해 고개가 자꾸 앞으로 꺾이는 바람에 밤새 거북했다.


다음 날, 다들 잠자리가 불편했는지 집으로 일찌감치 귀가하자는 의견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단 하룻밤의 외출에 그새 집을, 해방되고 싶다던 일상을 그리워하게 되다니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방이 지긋지긋하다던 딸마저도 역시 집이 최고라며, 편안한 침구들이 있는 자기 방이 그립다 한다. 다행이다. 이번 여행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끼니를 준비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청소를 했다. 분명 폭염에 귀찮고 짜증만 나던 집안일이었는데 돌아와서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가치를 두지 않았던 사소한 일들, 그저 꾸준히 해야 하는 일들이었을 뿐인데, 혹시 그 일들이 지금껏 나를 살리고 있었던 게 아닌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자에 두세 시간만 앉아있어도 엉덩이와 허리가 굳어져 슬슬 아파온다. 이럴 때 필요한 집안일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움직거리면 서서히 근육이 풀린다. 확실히 몸을 움직이면 생각도 환기된다. 무심히 청소를 하다가 꽉 막힌 생각이, 불쑥 전혀 다른 관점으로 새롭게 보일 때가 있으니 말이다. 결국, 귀찮아하던 사소한 일들이 나도 모르게 몸과 생각을 유연하게 잡아주고, 자칫 태만과 무기력으로 빠질 수 있는 일상을 꼿꼿이 세워주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 별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와, 너무 익숙해진 자신의 일에 대해 다시금 의미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삶에 대한 의욕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도, 지금 나의 일상을 반듯하고 맑게 꾸려가는 것으로부터 다시 샘솟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금 있는 곳, 나의 충실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깊은지 베란다 파란 하늘을 내다보며 천천히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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