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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03. 2024

눈병으로 알게 된 세상, 노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닌듯

2, 3년 전부터 자꾸 왼쪽 눈이 불편했다. 컴퓨터 화면을 띄워놓고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글줄이 삐뚤빼뚤 보였고, 한낮에 밖에선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뜨기가 점점 부담스러웠다. 나이 듦과 노화때문이려니 세월을 보내다 문득 겁이 나 올해 초에 부랴 부랴 안과에 들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왼쪽 눈 황반에 주름이 생겨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것이다.


병명은 '망막전막'이라는 것. 시력저하는 물론 시야에 변형과 왜곡이 심해지다 방치하면 실명에 이르는 병이었다. 일단 증상이 시작된 후엔 병의 진전을 막기 위한 치료약이나 처치가 없고, 적정한 시점에 유리체 절제술이라는 수술로 전막을 걷어내는 방법이 유일하다고 했다. 수술 시기는 개인차가 있다는데, 수술이 무서운 나는 아직 직선이 휘어보이는 '변형시'가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핑계로 미루고 있는 중이다.


하여, 침침하고 사물이 뭉그러지게 보이는 왼쪽 눈 대신 요즘엔 거의 오른쪽 눈에 의지해 세상을 본다. 글자든 사람 얼굴이든 또렷하지 않으니 노상 갑갑하다. 짜증과 우울이 파도처럼 밀려와 차라리 땅바닥만 보고 걸을 때가 많다. 일찍부터 눈을 잘 돌보지 않은 점도 절절히 후회스럽다. 건조한 눈을 방치하고, 자외선에 대한 방비도 없이 안일하게 대처한 과거 행동들 말이다. 눈에 좋다는 영양제라도 일찍 챙겨 먹을 걸...


늦었지만, 사달이 나서야 눈을 과로케하는 일들을 접었다. 글쓰기와 독서를 대폭 줄이고, 잠자리 같은 어두운 곳에서 핸드폰 영상 보기도 끊었다. 하지만 자책과 한탄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선글라스 끼고 지팡이로 이리저리 훑어가며 보행하는 시각 장애인들에게 관심이 갔다. 한 눈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이렇게 절망적인데, 도대체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내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마침 중년에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분의 기사를 접했고,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상에 익숙해지려 하루하루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포자기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발판으로 새 삶을 개척하고 있는 그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도 충분히 닥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자연스레 나도 늦기 전에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든, 혹시 모를 미래의 나를 위해서든 뭐든 행동하고 싶었다. 마침 한국 장애인 재단과 알라딘이 협업으로 기획, 운영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 녹음 프로그램이 눈에 띄었다.  "소리소리 마소리 지니 서포터즈"라는 명칭으로 벌써 4기째 지원자들을 선발, 운영 중이었다.


부랴부랴 정해진 대본을 녹음해 파일로 보냈고, 심사를 거쳐 정말 정말 운이 좋게도 지니 서포터즈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게 배정된 책은 박완서 님의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란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에세이이다. 이 에세이는 1977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제목으로 초판 출간된 박완서 님의 첫 산문집이자 대표작의 전면 개정판이라고 한다.


낯설지 않은 작가의 에세이라 반가웠기에 낭랑하게 잘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굴뚝같았는데, 문제는 내 목소리였다. 마이크 녹음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떨리기만 할 뿐 맘먹은 대로 표현되지 않아 걱정되었다. 다행히 장애인 재단에서는 나 같은 참여자를 위해 낭독 교육을 2회 차 준비해 주었고, 현직 아나운서와 라디오 PD를 섭외해 강의를 진행해 주었다.


강의에 가보니, 50여 명이 넘는 녹음 참여자들 중 20대가 대부분이었고, 아마도 50대는 나포함 두, 세명 정도인 듯했다. 의미 깊은 봉사에 청년들의 관심이 높다는 점에 고무되는 한편 나도 그들 못지않게 잘 해내야겠다고 마음먹어졌다. 강사님들은 녹음에 필요한 발성과 연습법, 중요낭독 팁들을 성의 있게 전달해 주셨고, 참여자들 전원에게 개인적 피드백을 주신 점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잘 안 보이는 왼쪽 눈이지만, 잠을 푹 자고 컨디션을 살펴가며 배정된 책을 조금씩 예독하고 있다. 7월부터 본격적으로 녹음이 시작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부디 녹음이 끝나는 연말까지 왼쪽 눈이 그나마 잘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문득 여기까지 온 과정을 되돌아보니 참 놀랍다. 갑자기 선고받은 눈병에서 비롯되어 지금껏 무지했던 시각장애인들의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오디오북 녹음까지 시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가히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 셈이다. 침침한 눈을 생각하면 여전히 때때로 침울해지지만, 갑갑하고 무거웠던 마음은 확실히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나이 들면서 만나는 반갑지 않은 병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게 해주는 열쇠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어쩌면, 나이 듦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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