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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09. 2020

선뜻 쓰지 못하는 글감들에 대하여

  쓰자고 맘먹으면 쓸 수도 있겠지만 용기가 없어 선뜻 쓰지 못하는 글감들이 더러 있다. '오늘은 쓸 수 있겠니?.'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아니, 아직도 좀 힘들어...' 그런다. 그러다가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를 보았고, 신형철 님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저서에서 이 영화를 더욱 깊게 음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평을 만났다. 자고로 영화비평이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줘야 할 텐데, 그분의 지식과 감수성에 연신 감탄하다가 내 글들을 보니 참 부끄럽다. 진지하게 공부할 겸 학위라도 하나 따 볼까 싶기도 하고...


  영화 내용은 간단히 말하면, 파이라는 한 소년이 바다에서 난파되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다 살아난 이야기이다. 구명보트에 뱅골 호랑이와 함께 표류하며 호랑이 덕분에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영화의 의도가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같이 배에 탔던 동물들이 사실은 진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간에 죽고 죽이는 비극이 있었고, 파이도 자신의 어머니를 살인한 요리사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진실인 것이다. 몇십 년이 지난 뒤, 이런 두 버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미국 소설가에게 현재의 파이는 묻는다. 어떤 스토리가 더 좋은지, 그리고 소설가는 동물들 이야기가 더 나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아, 파이가 동물 이야기를 지어냈구나!...' 정도에서 끝나가는 나의 1차원적 감상이 너무나 부끄럽게, 신형철 님은 '믿음과 해석'이라는 키워드로 영화를 사려 깊게 재해석한다. 그의 평 중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파이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체험을 허구적으로 재창조한 것은 그가 남은 생을 살아가는 데에 그 해석이 더 낫기 때문에 선택했다는 설명 부분이다. 즉, 우리는 과거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든 서사화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는 없지만, 그 해석은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 사건을 창조적으로 '재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소년 파이가 두 이야기 모두에서 배는 난파되었고,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은 바꿀 수 없지만 자신이 남은 생을 살아가기 위해 사실을 재서술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내가 선뜻 쓰지 못하는 글감 문제로 돌아와 보면, 내가 쓰지 못하다 보니 자꾸 제 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다는 말이고, 어떻게든 써서 나름의 재서술을 마쳐야 훌훌 털어 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렸다. 그러고 보니, 한 번의 거짓말로 이제 막 사랑을 피우려던 언니와 그 연인을 파멸로 이르게 한 브리오니라는 소녀 이야기의 영화, 조 라이트 감독의 <속죄 Atonement>도 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녀가 현실과는 다르게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건,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녀도 그녀의 남겨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해보면 그녀를 매정하게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브리오니가 정작 자신이 쓴 소설이 허구임을 밝힌 때는 그녀 나이 77세였다. 13세에 있었던 일을 77세에나 고백했다는 건, 평생 그 고통을 짊어지고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진실을 밝히는 데에 그만큼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측은하면서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과거의 고통이든 현재의 고통이든 이를 마주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언어로 재해석, 재서술하는 일인 것이다. 파이는 이를 창조적으로 해내었고, 브리오니도 결국은 해내었다. 재해석, 재서술이 안된 나는 그저 있던 일을 머릿속에서 replay만 하며 주구장창 같은 장면, 같은 감정만 되풀이할 뿐이다. 왜? 재서술 할 용기가 없어서... 어쩌면 진행 중인 괴로움이라 더욱 꺼내기 힘들어서 그럴까? 그럼 고통이 끝난 뒤에나 쓸 수 있을까? 어디가 끝인지 알 수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려는 용기는 언젠가는 솟으려나? 어쩌면 그 과거를 재서술하는 데에 에세이라는 형식이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브리오니처럼 소설을 써야 하나...


 오늘도 망설임에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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