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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17. 2020

글쓰기에 대한 푸념

  코로나 덕분에 유래 없이 긴 겨울방학을 보내는 요즘 돌연 바뀐 일상에 익숙해지느라 나름 애쓰고 있다. 아침만 되면 집 나서기에 바빠 일주일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붙박이처럼 집에만 있으려니 달라진 일상에 몸이며 마음이 개운치 않다. 모임이며, 회의며, 각종 활동들의 사회적 관계들이 모두 걷히고 나자 남은 일은 집 안에서 뱅뱅 도는 빨래, 청소, 세 끼 준비등의 살림뿐이다. 살림이란 그야말로 '남을 살리는 귀한 일'이라는 말에 동의도 하고, 정성껏 지은 식사를 가족들과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것도 행복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한 걸 외면할 수 없다. 남을 살리는 재생산 역할만 말고, 내가 생기 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뱃속에서 자꾸 꿈틀거린다. 늘어난 뱃살이 꾸물거리는 걸 오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느 날 아침도 멍하니 먹고 난 설거지를 하는데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가 한 말이 떠올랐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 그러니 인간에게 세 가지 부류가 있을 수밖에요...." 사람에 대한 참으로 간명한 분류이다. 그러니까 나는 조르바의 말대로라면 요즘 하염없이 비계와 똥만 만들고 있는 거다. 먹은 걸 하느님께 돌리는 데 쓰는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좋은 일과 좋은 유머에는 써야 할 텐데... 뭔가를 생산해내는 일, 몰입할 일을 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을 뿐 어쩌지 못하고 있는 내가 답답하다. 왜 어쩌지 못하는가? 요즘 나에게 일이란 글쓰기인데, 이게 참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신형철 님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는 영화평론집을 읽었다. 그의 방대한 문학적, 철학적 지식과 깊은 감수성에서 우러나온 논리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는 관점과 해석이 놀라웠다. '글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싶었다. 자연스레 나의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확 떨어졌다. 어떤 지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없고, 삶에 대한 깊거나 새로운 통찰도 없으면서 경험에 대한 자의적 서술 일색인 글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너무 오만한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줄 비로소 조금 알겠다.


  글쓰기가 만만치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글을 쓸만한 자질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 집에 틀어박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 그런지 모르겠지만, 생각 없이 사는 데에 자꾸 익숙해진다. 그저 살던 대로 어제도 살고, 오늘을 산다. 은유님의 <쓰기의 말들>을 보면, 최승자 시인이 어느 인터뷰에서 그랬단다.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지, 즐거움의 축적은 아니거든요...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나는 딱 보통사람이다. 세상에 아프고 탄식할 일이 셀 수 없이 많을 텐데도 안온하게만 사는 나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고, 비판적 사고도 어렵다. 느낀 감정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버거우니 무얼 글로 내놓을 수가 있겠나... 과연 나 같은 사람도 좋은 글을 쓸 수가 있을지...


  글을 쓰고 싶다는 의욕만 앞세우다가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었다고나 할까? 상황 파악하고 나니 한 번 움츠러든 어깨가 생각보다 쉽게 펴지지 않는다. 우스운 건 그런 마음 상태를 또 이렇게 글로 써내고 있다는 거다. 쓰면서 정리하고 싶어서. 글은 쓰고 싶은데, 자질도 의심되고, 쓴 글도 마뜩잖고... 괴로운 날들이다. 이런 생각들로 고민스러운 나날 중에도 작은 기쁨이 있다. 브런치에 써놓은 글들에 공감하는 라이킷이 올라온다거나 구독자수가 늘어날 때이다. 나 자신을 조금 알고 나니 그럼에도 공감해주시는 분들이 더욱 반갑고 감사하다.


  <쓰기의 말들>의 은유 작가는 말한다. "세상과 부딪치면서 마주한 자기 한계들, 남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얻은 생각들, 세상은 어떤 것이고 사람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수정해 가며 다진 인식들. 그러한 자기 삶의 맥락이 있을 때 글쓰기로서의 공부가 는다."라고.

그렇담, 나의 많은 한계들 중 이제 한 번 마주쳤을 뿐이라 치고, 글쓰기 공부로 더 나아가 볼까? 괴롭고 어렵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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