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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07. 2020

여자는 그저 참고 살라는 그 질긴 잡초 같은 말

고루한 인습에서 벗어나 품위있는 예술을

부부관계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분명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그만큼 친밀한 관계인 것도 맞는데, 갈등이 있을 때는 세상 그 누구보다 밉고, 실망스럽다. 못살겠다, 못살겠다 하면서도 또 계속 함께 사는 건 그저 지난 세월의 관성 때문만은 아닐 텐데 말이다. 살아온 모든 날이 불행한 건 아니었지만,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가끔 친정엄마에게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꼭 돌아오는 정해진 답이 있다. 그래도 네 아버지보다는 낫다는 말. 남자가 바람 안 피우고, 도박 안 하고, 폭력 안 쓴다면 여자는 그저 참고 사는 게 신상에 좋다는 그 말이다. 세대를 아무리 넘어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질긴 잡초 같은 그 말을 어째야 할까?


실제로 엄마는 평생 참고 사는 법을 몸소 보여 주셨다. 주사가 심했던 아버지를 평생 견디면서 말이다. 기억도 어렴풋한 예닐 곱살 시절부터 대학 졸업 후 부모님을 떠날 때까지 겪었던 아버지의 주사는 공포스럽고 불안에 떨며 가슴 졸였던 기억들로 지금도 나의 머릿속을 꽉 채운다.


엄마는 아버지가 술 약속이 있는 날이면 한밤중이라도 꼭 찾아 나서곤 했다. 주량과 비례해서 주사의 강도와 시간도 더해진다고 믿었던 엄마는 조금이라도 일찍 아버지를 술자리에서 빼 내 오는 게 그나마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엄마는 어떻게 아버지를 매번 그 많은 동네 술집들 가운데 용케 찾아냈는지 모른다.


집에 와서는 씻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면 오죽 좋으련만 라면을 끓이라는 둥, 왜 아버지가 왔는데 애들이 인사를 안 하냐는 둥, 별별 트집을 잡았다. 뒤치다꺼리 다 하고 엄마가 잠자리에 들면 출근 때문에 고작 두세 시간 간신히 눈이나 붙이셨나.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엄마의 빨갛게 충혈된 눈이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대학생 때 엄마가 이혼해도 되겠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다. 나는 찬성이라고, 지금부터라도 자유롭게 사시라고 했다. 엄마는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북돋아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단호히 결행하시지 못했다. 경제력이 있으셨는데도 이혼녀에게 쏟아질 남의 시선과 손가락질이 두려워, 또 자식들에게 결손 가정이란 말을 듣게 할 수가 없어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셨다고 한다.


엄마처럼 중요한 결정을 주저하는 이유는 남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하는 바를 표현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손에 거저 넣는 법은 없다. '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할 텐데...'같은 주눅 든 생각이, 2020년에도 여전히 <82년생 김지영>의 세상이 지속하도록 기여하지 않았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여자는 그저 참고 살아야 한다'는 엄마의 구닥다리 말은 이제 그만 지구 밖으로 던져 버릴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고 본다.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타인의 삶에 대해 공연히 왈가왈부하지 않음도 필요하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건데, 굳이 남의 일에 옳네, 그르네 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니 말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남의 일에 쓸데없이 신경 쓰지 않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가 더 많이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며칠 전, 동네에 명화 인문학 강연이 있었다. 강사님은 멕시코의 유명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의 삶과 작품을 이야기하셨다. 프리다는 자신의 절절한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로 유명하다. 청소년 시절 척추와 골반, 쇄골이 부스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수십 번의 대수술을 겪었을 뿐 아니라, 열렬히 사랑한 남편의 심각한 바람기와 3번의 유산 등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고통 속의 삶이었다. 남편인 디에고의 바람으로 부부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즈음,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망명 온 레온 트로츠키가 프리다에게 마음을 뺏겼다.


강사님은 바로 이 부분에서 앞에 앉아있던 나에게 선뜻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 혁명가인 트로츠키가 하룻밤 함께 하자고 청했을 때 내가 프리다라면 과연 받아들였겠느냐고.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다. 이미 남편의 여성편력으로 부부간 신뢰는 애저녁에 깨진 마당에, 아내만 허울 좋게 지조와 신의를 지킨다는 건 나로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이 준 상처는 고대로 돌려주어 스스로 저지른 죗값을 받도록 하는 게 인과응보라고 굳게 믿으며 말이다. 강사님이 몇 분에게 더 의견을 물어봤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트로츠키의 청을 받지 않는다고들 하였다. 다들 배우자의 바람기쯤은 어떻게든 용서가 된다는 걸까? 설마 아내는 참고 살아야 한다는, 내가 엄마로부터 연신 들었던 바로 그 고루한 인습의 영향은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프리다는 당당히 트로츠키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한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시킨 남편에 대한 복수심 반, 새로운 사랑에 대한 설렘 반이 아니었을까?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프리다의 행보가 사막에서 오아시스 만난 듯 반갑고 통쾌하다. 우스운 건 남편 디에고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며 당장 이혼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자신은 프리다의 여동생까지 건드려 놓고, 부인의 사랑은 왜 안된다는 건지, 정말 편파적이다. 둘은 당연히 이혼했지만, 불과 1년 만에 재결합했다.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 지독한 사랑이었나 보다.


부부관계에서 뭔가 불합리하고 부당하다고 느낄 때, 속으로 혼자 삭히지만 말고 품위 있는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 보는 건 어떨까? 어떻게? 예술을 통해 말이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 거다. 삶이 막막할 때 글과 그림과 음악을 찾는 것은 고통 속의 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프리다 칼로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다친 사슴>, <헨리포드 병원>, <부러진 기둥>, 그리고 수많은 자화상들에 자신의 고통을 녹여내었다. 고통을 안료 삼아 내면을 표현하면서 점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자신을 프리다는 맘껏 사랑했을 것이다. 평범한 친정엄마도 기타를 치신다.  말씀은 고루하게 하셨어도, 지난한 인고의 세월을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는 것으로 숨통을 틔우며 버텨오신 게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굵게 옹이  마음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달래주셨을 거다.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쓰며 좀 더 단단해짐을 느낀다. 생각만 하던 것들을 글로 쓰며 좀 더 자유로와지는 기분도 든다. 글을 쓴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미 절반의 성공이 아닌가 싶다. 강력히 추천한다. 고통 속에서도 자유로와지기를 원하시는 모든 이들께.


남들 눈에 보기 좋으라고 참고, 참아 가슴에 잿더미만 남기는 생기 없는 삶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좀 너그러워지고, 고통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품위 있게 목소리 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갈 길 막으며 바짓가랑이 잡는 고루한 인습 떨쳐버리고 가볍고,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가고자, 미력하지만 오늘도 치열하게 벽을 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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