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는 왜 여름휴가에 노트북을 챙겼을까?

어른을 위한 짧은 우화 #06

by 이루나

공항 체크인 줄에 서 있는 캥거루는 한가득 짐을 들고 있었다.

양손엔 캐리어 하나씩, 등엔 백팩도 메었다.

게다가 노트북까지 따로 앞주머니 품에 안고 있었다.


같이 휴가를 떠나는 코알라가 캥거루를 살피며 물었다.

"아니, 2박 3일 휴가에 짐이 왜 이렇게 많아?"


캥거루는 눈을 스마트폰에서 떼지 않은 채, 답했다.

"응, 혹시 몰라 이것저것 다 챙겨 왔어."


기가 막힌 듯 코알라는 다시 물었다.

"노트북까지 가져왔네?"


캥거루는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응, 회사 일 때문에 체크해야 돼서."

시선은 여전히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코알라는 그런 캥거루가 못마땅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레는 수다를 떨며 여행 기분을 만끽할 줄 알았는데,

첫출발부터 캥거루에게 말 걸기가 눈치 보였다.


캥거루는 얼마 전, 회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다.


입사 동기가 먼저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캥거루는 초조해졌었다.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맛집 블로그는

그런 캥거루에게 유일한 휴식처였다.


여행지 맛집에 도착한 캥거루는

코알라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해안가 배경이랑 음식 잘 보이게 찍어줘."

"이번엔 이 각도로 부탁해."

"영상으로도 한 번 찍어줄래?"


코알라는 빨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캥거루가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부탁을 들어주었다.


코알라가 캥거루에게 물었다.

"이번에 승진 어떻게 됐어?

동기보다 늦는다고 걱정했잖아."


"어, 승진했지."

기뻐할 것 같았던 캥거루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코알라는 대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오, 축하해! 잘됐다! 근데 웬 한숨이야?"


캥거루는 머리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

"아니, 승진할 땐 좋았지.

몰랐는데 책임져야 할 게 너무 많더라고."


승진한 캥거루는 성취의 기쁨도 잠시,

매일매일 무거운 책임감으로 회사일에 매달렸다.

승진 전에는 그저 월급날 금융치료를 받으며 신났다.


그런데, 과장이 되고 보니,

회의 참석은 2배 이상으로 많아졌고,

내 일을 할 시간이 없어 점점 야근이 많아졌다.

재미로 하던 블로그도 어느새 수익이 생기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캥거루는 그냥 남들처럼

기본만 하려고 하는데도 몸은 망가졌다.

휴가도 써야 되기에 이번에 쓰긴 했지만,

쌓여있는 업무와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해안가 파라솔 아래서도

노트북으로 일하는 캥거루를 보며

코알라가 말을 건넸다.

"여기까지 와서 일하려고?"

"나, 유칼립투스 정원 갈 건데 같이 갈래?"


캥거루는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답했다.

"응? 아, 나 이 메일은 답장해야 될 것 같아서,

미안. 혼자 괜찮겠어?"


코알라는 모처럼의 휴가에

캥거루가 일만 들여다보는 것 같아 서운했지만 응답했다.

"어, 일 해. 나 한숨 자고 올게."

코알라는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코알라는 초행길이라 무서웠지만

해변 근처에 유칼립투스 정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신나는 마음으로 찾아 나섰다.

'향기 좋으면 나무 위에서 조용히 낮잠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한참 후, 캥거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의 코알라였다.

"있잖아... 나 발목을 좀 삐끗했어...

근데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캥거루는 덜컥 겁이 났다.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해가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주위에 뭐가 보여?... 아니야, 내가 찾아볼게."


다급하게 짐을 정리하며, 캥거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노트북까지 챙겼을까...'


캥거루는 코알라가 갔던 방향을 기억해 냈다.

긴 뒷다리로 퐁, 퐁.

모래사장을 박차고 튀어 오르듯 달리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살폈다.

높이 점프해서 나뭇가지 흔들림도 보고,

낮은 수풀까지 몸을 숙여가며 찾았다.


캥거루의 마음은 점점,

코알라를 향해 뛰고 있었다.


그 순간 저 멀리,

유칼립투스 잎을 쥐고 나무 밑에 주저앉은 코알라를 발견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 정원을 찾아 나섰다가

습기 찬 나무에서 미끄러져 살짝 발목을 접질렸다.


캥거루는 코알라에게 재빨리 다가가,

배낭에서 비상약 키트를 꺼냈다.


캥거루가 가방에서 파스와 압박붕대까지 꺼내자,

코알라는 내심 서운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캥거루는 그제야 코알라의 얼굴을 살폈다.

"미안해, 내가 휴가 와서 일만 했네.

같이 여행 온 건데 혼자만 보내서 미안해."


코알라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너도 네 일 잘해보려고 한 거잖아."


캥거루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 노트북이랑 스마트폰 다 끌게."


그제야 고개를 들자

파도 소리가 솨아아아—하고 마음에 파고들었다.

지는 노을은 해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캥거루가 처음으로 '여유'를 느낀 순간이었다.

짐은 많았지만,

그제야 비울 수 있는 여행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찰랑찰랑 파도 소리와

바다의 반짝이는 달빛 윤슬에

캥거루와 코알라의 수다 삼매경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몇 년 새,

워라밸로 칼퇴근의 로망을 드디어 실현했나 싶었는데,

요즘은 높아진 물가에

하나 이상의 부업은 기본이 되었다.


일과 쉼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

휴가를 가도 휴가답지 않은 이유.

그건, 아마 우리 모두 '캥거루'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출근 전에도, 퇴근 후에도

스마트폰 속 알림은 계속 울리는데,

모처럼 낸 휴가에

'쉬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여행지의 캐리어 속에도 함께 가져가는 것은 아닐까.


늘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진짜 '쉼'을 멀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여름,

당신의 캐리어엔 무엇이 들어 있나요?


혹시 너무 많은 책임과

쉴 틈 없는 생산적 성과에 여름휴가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닐까.


노트북 대신,

스마트폰 대신,

파도소리와 함께

소중한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여다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