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리는 휘운이와 달리 잔병치레를 좀 했다.
돌도 되기 전에 입원도 두 번이나 했다. 열과 함께 갖가지 증상은 밤에만 나타났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우는 아이를 보면 얼마나 속이 타는지 모른다.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입원한 것이 이 정도인데 큰 병으로 장기 입원을 하는 집에서는 얼마나 힘이 들지. 상상은 안되지만 공감은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 주변에 둘째 출신(?)들이 하는 말을 빌리자면, 집안에서 첫째에 대한 특별한 사랑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냥 머리로 이해를 했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첫째는 말 그대로 첫째 아이가 하는 모든 것이 부모에겐 첫 경험이었다. 그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은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대신 시행착오를 많이 한다. 그 시행착오의 피해는 고스란히 아기가 받는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라서 실수를 했다고 해도 반복해서 고쳐 나갈 수 없다. 내가 잘 못하게 되면 그걸로 그렇게 끝이 난다. 내 아이지만 아이의 인생이 따로 있으므로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규리는 오빠의 고생(?) 덕에 훨씬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휘운이를 키우면서 잘한다고 했는데도 내 의욕만큼 되진 않았다. 가족끼리 간 찜질방에서 넘어져 윗니 두 개가 부러져 크라운을 했고, 비타민 좋다는 소리에 당이 많은 과일주스류를 많이 먹였다. 결과적으로 충치가 많이 생겨 어금니에 금니도 2개나 했다. 치과를 많이 다녀서 지출도 많았고 아이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귤을 너무 많이 먹어서 얼굴이 노랗게 되었는데 의사가 황달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의 팔에 긴 체혈침을 몇 번이나 찔렀는지 모른다.
다른 시행착오들은 앞에서 쓴 그대로다. 규리는 하루 몇 번씩 양치질을 하고 있고 이제 뛰기 시작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닌다. 공갈 젖꼭지 빠는 시간도 신경 쓰고 빨지 않을 때 손가락이 입으로 얼마나 자주 가는지 체크를 했다. 육아에 대한 지출도 좀 더 현명 해져서 첫째 때 보다 더 줄었다.
아이들은 지출은 아차 하는 순간 대량의 지폐 살상을 부른다. 특히 마트, 장을 보러 집 근처 대형마트를 가면 첫째 때나 지금 둘째 때나 사라지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장난감 코너에 가면 동네 꼬마 녀석들이 부모 손을 끌고 많이 온다. 마트 장난감은 인터넷에 비해 많이 비싸다. 아이들은 장난감의 가격에 상관없이 좋아하는 캐릭터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른다. 엄마는 집요하게 아이의 요구를 방어해 낸다. 하지만 아빠가 한방에 엄마의 방어진을 무너뜨린다.
“에이 됐어. 그냥 사줘. 뭐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구만. 자꾸 애를 울리고 있어.”
대부분 저렇게 버럭 호통을 치며 멋지게 거대한 상자를 카트에 담는다. 다른 가족의 일을 내가 이곳에서 가타부타할 일은 아니지만 대게 엄마의 선택이 옳다.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온 돈으로 아이들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해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집에서 직접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는 전략 전술의 리듬이 있다. 이 전선을 구축하는데 엄마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방어진은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명절 때나 무너뜨리는 것이지 함께 사는 아빠가 무너뜨리면 곤란하다.
또 뭐가 있을까?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보다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이 덜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없었다. 이 걱정은 아이들의 할머니가 하셨다. 나는 외동아들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는 평생 한 명의 자식만 키워 보신 것이다. 둘째가 태어나 간호사님이 보여주는 순간, 어머니는 무장해제가 됐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두 녀석을 다 봐주고 계신다. 휘운이 혼자 일 때는 그냥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자는 시간에 틈틈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둘째 규리가 태어나고 나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제 나는 40대 중반이고 이미 7년을 육아로 보냈고 8년째 접어들고 있다. 사교육을 아무리 안 시킨다고 하지만 두 아이가 성장을 하면서 외벌이로 어림도 없다. 나도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어야 하고 준비를 더 힘차게 해야 한다. 부모님께 부탁을 드렸고 부모님은 내가 일을 할 때면 아이들을 봐주신다. 이 부분에선 난 참으로 복이 많다. 내 나이에 비해 부모님은 아직은 정정하 시기 때문이다. 내가 앞에 썼던 내 어린 시절의 부모님의 대한 섭섭함은 이것으로 다 보답받는 것 같다.
그렇다. 자식을 키우면 나의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 부쩍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군대 입대 전, 아버지는 나에게 제대를 하거든 아빠를 아버지로, 엄마를 어머니로 부르라고 하셨다. 그래서 제대 이후에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모님을 불렀다. 난 아빠, 엄마라는 단어를 말할 때 기분이 더 편안하고 좋다. 지금은 그냥 아빠, 엄마라고 한다. 하지만 아빠에게는 당신에게 직접 아빠라고 하지 못한다. 살갑지 않은 거리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엄마와 아빠는 2살 차이가 나시고 아버지가 26세, 어머니가 24세에 나를 낳았다. 부모님이 지금의 내 나이 때는 내가 이미 19세였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던 30대 중 후반, 그리고 엄마의 그 시절에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휘운이와 규리는 아빠의 30대 젊은 시절을 기억을 못 할 것이다. 난 이미 머리카락의 절반이 흰 머리카락이고 아이들이 10대 후반이 되면 난 60세를 향해 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어렴풋이 그때 우리 엄마가 기억난다.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에 별다른 일 없어도 가끔 립스틱도 바르셨고, 매니큐어도 정성스레 하셨다. 어디든 씩씩하게 다니셨고 큰 웃음소리와 함께 동네 아줌마들 흉내를 맛깔나게 내셨다. 아버지는 일요일마다 운동을 하셨다. 축구도 하셨고 테니스도 하셨다. 가끔 엄마가 일요일에 가족과 함께 있길 원해서 집에 있으면 함께 운동하던 아저씨들이 집으로 아빠를 데리러 온 기억이 난다. 특히 조기 축구회 같은 곳에서 오셨는데 아빠가 없으면 이길 수가 없다고 엄마에게 부탁을 하셨다. 나는 이런 탁월한 운동신경을 물려받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들로부터 열성 인자만 받은 것 같다.
부모님이 일찍 나를 낳아서 나는 푸르렀던 부모님의 청춘을 기억하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못난 아들이지만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당신들도 아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 어떡해 생각하실까? 우리 아이들은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난 어쩌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 가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운동회에 같이 가면 아빠들 달리기에 꼴등은 하지 말아야지.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애들이 컸을 때, 머리털 한 올이라도 더 있었으면 한다. 나는 출근하시면서 풍성한 머리카락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리고 단장하고 나가시던 아빠의 모습이 선명하다.
앞에서 나는 부모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썼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나에게 복 받았다고 하실 분도 있으실 것이다. 나는 외동아들로 자라 금수저는 아니었지만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 결혼도 늦고 아이도 늦게 가졌지만 부모님이 다른 집에 비해 젊으신 덕으로 내가 바쁠 때는 아이를 맡길 곳이 있다. 내가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세대가 이어져오면서 시대가 그랬고 몰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제 부모도 이해해야 하고 아이들도 이해해야 한다. 나는 내 부모가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알지만 그 속에 부모의 삶은 모른다. 마찬가지로 내 아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세상에 살 것인지 상상은 되지만 난 그 속에 없을 것이다. 앞 세대와 뒤 세대의 손을 잡고 이어주며 내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자식이자 부모로서의 내 역할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