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내작가 면접기
매일 낭독할 정도로 빠져버렸다.
당시 인생책이었던 <제인에어>보다 시가 더 좋아진 것이다.
그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다.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을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시 든 삶을 살며 시인의 언덕에 오르고 싶었는데...
대학교 4학년 때 신춘문예에 떨어지자 아빠가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니?
시인은 꿈이고! 밥벌이는 해야지!”
결론은 월급쟁이가 되라는 뜻이었다. (방송작가가 월급쟁이 아니지만, 그땐 몰랐으므로)
무너진 자존심에 보여주기식으로 일단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당시 구인정보사이트를 통해 (문예창작과 출신들이 일한다는 소문만 듣고) 출판사와 방송국에 이력서를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교 졸업도 안 했고 방송작가아카데미도 다니지 않았으니 굉장히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한 방송제작사에서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보게 됐는데...
“궁금해서 불렀어. 넌 이력도 없는데 무슨 깡으로 이력서를 냈어?”
“이력은 앞으로 만들면 되죠."
“그 깡이 마음에 든다! 근데 너무 말랐는데? 체력은 좋니?”
“깡으로 철봉매달리기는 반에서 제일 잘했고! 초중고 내내 계주선수였습니다. 100m 13초에 뜁니다.”
“오~ 체력 합격! 아르바이트는 해봤니?”
“수능 끝나고 아르바이트는 쉰 적 없습니다.
최근까지 빕스(패밀리레스토랑)에서 1년 넘게 일했습니다.
안내와 캐셔를 오래 해서 정직원 추천을 받을 정도로 일은 잘했습니다.”
“그래? 빕스면 CJ잖아? 대기업인데 하지! 왜 안 했어?”
“대기업 다니는 게 꿈은 아니라서요.”
“진짜 깡 좋네? (웃음) 아르바이트하면서 전화는 많이 해봤겠다. 내일부터 출근해!”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더니 그날 나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방송작가가 됐고 일은 힘들어도 재미있어서! 방송이 좋아져서!
깡으로 버티다 보니 18년을 즐겁게 일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잘하는 일을 찾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가끔 신춘문예에 떨어진 날을 생각한다.
만약 그때, 아빠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계속 시를 썼다면...
어려운 형편에 욕심을 부려서 대학원에 갔다면... 나는 과연 시인이 됐을까?
정말 운 좋게 등단을 했다면... 계속 시를 쓰고 있을까?
가보지 않은 길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지금처럼 치열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방송일을 하면서 하고 싶은 꿈이 더 많아졌고
나는 여전히 ‘꿈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에’ 더 간절하게 살고 있으니까.
사람은 ‘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방송작가가 되고 나서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주변에 소문내고 다녔다.
효과는 확실했다. 그 프로그램에 빈자리가 생겼을 때 나한테 먼저 기회가 온 것 같으니까? (아마도)
물론 방송국에서 시키는 일은 제법 잘 해내는 편이었다.
특히 막내 때는 문서를 꼼꼼히 봐서 오타를 잘 발견하고 프린트도 실수 없이 잘했다. 사무실 정돈을 잘해서 선배들이 용돈을 주며 책상 정리를 맡겼고 기쁘게 했다. 그 재주로 일명 작가박스(대본, 큐시트, 스케치북, 매직 등 문구류를 챙겨 다니는 것)를 눈에 잘 보이게 담는 것도 능력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원래 깔끔을 떠는 성격도 있지만 빕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모든 물건을 '정위치'에 두는 걸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 일을 하면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 많았다. 모든 경험치는 힘이 된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이어서 뮤지컬 공연을 했는데 그때 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다.
방송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 고 말하고 다닌 덕분에
마흔이 넘은 나이에 뮤지컬 대본 작업 제안이 와서 현재 오랫동안 꿈이었던 뮤지컬을 쓰고 있다.
(물론 공연까지 갈 길은 매우 험난하지만)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잘 되든 안 되든 이 경험 또한 내 인생에 새로운 힘으로 작용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 그 꿈이 실현될지 모르니까.
뭐든 다 해주는 요술램프 ‘지니’에게도 소원을 빌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일단 말을 해야 다 이루어질지니!
내일 발행되는 브런치북 [나의 일박 일지] 여행 주제는 <막내작가가 프로그램을 바꾼다> 인데요.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예비작가님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능작가는 어떤 일을 하는지, 막내작가 면접 합격 팁은 내일 발행되는 글에서 확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