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를 본 건 나뿐이다
그날 회의에선 내가 꼭 말해야 할 게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은 너무 빨리 지나갔고,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도 나는 '지금이라도 할까?', '저 사람 말 끝나면 다시 할까?'
멀어져 가는 타이밍 속에 고민을 삼백 번쯤 하다 나왔다. 주제가 어렵지도 않았는데 왜 나만 말을 못 할까. 특별히 발언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적어도 명쾌한 질문 하나쯤은 던질 줄 안다.
내가 더 괴로운 건, 난 나름 사석에서 말도 잘하는 것 같고, 내 말에 누군가가 감탄할 때도 있는데
회의만 들어가면 더 바보가 된다는 것.
그 다음날 회의에는 미리 수첩에 할 말들을 적어갔다. 하지만 누군가 던진 질문 때문에 내가 적어간 키워드 중 단 하나도 얘기할 타이밍은 역시 잡을 수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애매하고 평범'해서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여유가 있을 때 나는 나름 나를 위로할 때도 있다.
'나는 이 회사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최상의 학벌을 자랑하진 않지만 결국 이들과 함께 있다.'
'나는 보고서를 뛰어나게 잘 쓰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나는 영어 점수가 월등히 높진 않지만 회의는 그럭저럭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나올 때마다 다시 깨닫는다.
'역시 사람들은 학벌이 학벌인지라 내가 스마트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근속이 10년이 넘었는데 이 정도 보고서 수준이라면 팀을 옮길 때마다 실망할 거다.'
'외국에서 좀 공부했다고 기대했는데 속 빈 강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난 나의 무능함을 회의 참석자 중 몇 명이나 기억할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우 대리, 아까 안 과장님 얘기하고 나서 분위기 봤지. 나 너무 무서워서 얘기 그냥 안 했잖아"
"경선 씨, 아까 영업팀에 질문할 때 팀장님 너무 디테일하지 않던? 나도 그거 궁금했거든. 똑같은 질문이라 가만있었네"
그리고 중요한 걸 알게 되었다.
"아까 안 과장님이 뭐라고 했는데요?"
"아, 저 팀장님 얘기하실 때 메일 쓰고 있느라 제대로 못 들었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 기억은 하겠지만 누구의 말에 누가 대답한 것인지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다.
나는 회의 내내 작아진 나만 보고 있었다.
누가 나만큼 조용할지 동지를 찾는 심정으로 관찰해 가며 애처로운 나를 사정없이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생각보다 날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왜
그날 회의에서 다른 사람들이 말한 내용이나, 등장한 질문들에는 그렇게 너그러웠으면서
나 자신만 그렇게 비난하고 나왔을까.
내가 그날 내 탓만 안 했어도 덜 힘들었을 것이고,
지금에 와서 새삼 기억조차 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혹시 회의 때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마디 말하지 못했더라도 자책 마시길.
그 회의에서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은,
말 안 하면 큰일 나는 일이 없어서였고, 질문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궁금한 게 없어서인 것이다.
작아진 나를 쏘아보는 나 자신을 멈춰보시길 바란다.
사람들 기억 속에 내가 굉장히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멈춰보시길 바란다.
그 회의에서 별다른 일없이 나온 날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내가 나를 쏘아본 일을 멈춘 그날부터는
회의실에서 내가 조금은 편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