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한 Aug 25. 2022

찬물 샤워

찬물 샤워가 30 정도 짧게라도 하면 우울증 예방과 개선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혼자 책쓰고 지내는  요즘의 주요 일과라 우울감이 생기기 쉽다. 우울감은 무기력하고 비효율적인 하루를 만들기 때문에 미리 방지하고자 아침에 샤워할 때마다 마지막 1 정도는 찬물로 마무리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찬물로  몸의 세포를 깨우면서 몸에 열도  내고 근육도 함께 깨울  틈새 스쿼트 30회를 진행하는 루틴도 함께 만들었다.


처음에는 찬물이 몸에 닿는 감각이 공포에 가까울 만큼 두려웠다. 몸속 DNA 깊이 '추위-죽음'의 연결고리가 새겨진 듯 느껴졌다. 추위로부터 혹사 당한 생물학적 세월, 인류학적 역사가 본능과 무의식으로부터 불거져 올라온 것이다. 추위-죽음이라는 인과 관계는 공포라는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의 과학기술은 추위를 거의 극복했고, 이제 추위-죽음의 연결고리는 인류에게 상당 부분 진실이 아닌 부풀려진 흑역사라고 볼 수 있다.(여전히 추위로부터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간과하는 건 아니지만 보편을 말하는 것이다) 찬물 샤워는 나를 죽이려고,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자극을 적절하게 주는 것이다.


결국 생물학적 차원의 무지와 아집이 찬물에 공포라는 감정을 부여한 것이다. 유전자의 오류이자 착각이 에고에게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게 만든 것이다. DNA에 각인된 인과 관계의 추억과 거기에 따라붙는 부정적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나서는 찬물을 틀기 전 나의 몸에게 이렇게 속삭여주었다. '이건 널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루를 더 쾌적하게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너무 괴로워하고 원망하지 않아도 돼.'


매일 이렇게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이야기해주자 찬물이 부여하는 감각이 점차 막연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관찰할 만한 대상으로 변화해갔다. 부정적 감정이 조금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찬물을 느끼게 된 것이다. 깨어있음과 알아차림, 적절한 지혜의 힘으로 생물학적으로 찌들어있는 무지와 아집을 극복하자 허위와 환상의 공포감이 깨지고 사라졌다.


똑같은 감각인데 깨어서 알아차리고 생각을 제대로 하여 감정이 바뀌자(정확히는 불필요하게 나서지 않게 되자) 그렇게 오랜 기간이 흐른 것이 아닌데도 감각 자체가 극명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선정과 지혜로 무지와 아집을 발견, 극복해서 감정과 감각을 바꿔낸 이번 체험은 꽤나 유쾌하고 이미 알고 있는 현상임에도 충격적이었다.


내 삶에 스며들어 있는 숨은 '찬물'들이 얼마나 많을지, 아니 '찬물' 아닌 게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대한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찬물들을 하나둘 찾아내서 생각, 감정, 감각을 조정하고 싶어졌다. 쾌적하고 생산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


하늘이 인간에게 '역경'을 주는 이유도 아침마다 자의로 셀프 찬물을 선사하는 나를 보며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하늘은 단지 괴롭히고 벌을 주려는 게 아니라 인간이 더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역경도 불사하는 것이다. 역경을 단지 고통으로만 받아들여 불행에 젖어드는 것은 스스로 튼 찬물 샤워에 감기가 걸려 하루종일 누워있는 슬프고도 우스운 꼴이다. 역경이 찾아올 때는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의미를 발견하고 재해석하고 부여해서 영적 성장과 성숙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인간에게는 마땅히 그래야 할 의무와 그럴 수 있는 능력,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 민폐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