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타기 가장 빠른 구간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섰는데 딱히 앉을 자리가 없어서 옆옆옆 구간으로 옮겨갔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구간을 발견하여 앉음.
왜 여기만 텅 비어있지 이상했는데 곧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술에 잔뜩 취하신 할아버지가 맞은 편에 앉아있다가 내 쪽으로 오고는 넓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여성을 욕지꺼리로 위협하면서 쫓아 냄. 내 옆옆옆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 나도 여성분 입장이 되어 불쾌해지고 주시하게 됨. 다음역 정차했을 때 아주머니 할머니가 앉으려고 하자 또 어디서 앉으려하냐며 못 앉게 하고 쫓아냄.
이때까지만 해도 부글부글하면서 표정/언어/제스쳐로 지하철내 질서를 위해 제압(정의구현)을 해야하나 진심으로 고민됨.
다음 역에서 한 남성이 아저씨 옆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뭐라고 안 함. 여자한테만 이러는구나. 또 한 여성이 나와 아저씨 사이에 앉자 뭐라고 하려는 기미가 보임.
(정보가 어느정도 수집된) 이제는 행동해야할 때가 왔고 여성 분께 자리를 바꿔드리겠다 하고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밀착해 앉음. 남자는 괜찮아. 라고 넘김.
처음에는 민폐를 분노로 제압하려 했으나 옆자리에 앉자 의외로 차분해졌고 얘기를 들어보고 싶은 여유가 생김. 한 번 눈 제대로 진득히 마주 보면서 무슨 말하는지 들어보려고 마음 먹음. 혀가 꼬이고 분별력이 엉망이라 무슨 말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으나 다 이해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끄덕여줌. 할아버지 형상 안에 있는 불쌍한 영혼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보듬어준다는 느낌으로 탁한 눈동자 안을 깊숙이 들여다봄.
제대로 들렸던 건 "나 잘못한 거 없지?" "사람들이 잘못 된 거야" 이정도이고 나는 이유불문 그렇다고 잘못한 거 없다고 다독여줬다. 그러자 마음이 살짝 풀렸는지 처음으로 구겨진 인상을 풀고 환한 미소로 "오래 살아~ 배운 사람은 역시 알아들어"라고 말하심. 살짝 전율이 오면서 나름의 감동이 있었던 순간. 그렇지만 곧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셨고 험악하게 구긴 인상과 적의로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며 화를 냄. 이 사람이 날 때리려고 하거나 때리면 어떻게 반응하지 순간 생각했지만 그냥 내려놓고 "잘하고 있어요." 하고 내릴려고 할 즈음에는 "힘내세요x5"로 계속 읊조려주었다.
마음 속으로 내내 "하느님 성령을, 예수님 은총을" 강렬히 되새기며 상대를 대했다. 그에게도 축복이 가길 기원해주며. 한편 이 할아버지가 악업을 짓는 것, 다른 여성분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막아주는 전담 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자리에 앉아 계시던 여성분들이 나와 할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시고 할아버지가 내린 후에도 나를 인상깊다는듯 쳐다보면서 내림.
이 사소한 시공간 속에서 조금이라도 정화 효과가 있었기를,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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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에 있었던 일, 사건 직후 지하철에서 썼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