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선정의 마인드
한창 바둑에 취미들려서 2020년 경에 썼던 <바둑 선정의 마인드>라는 글이 있다. 초등학생때 배워둔 바둑을 알파고의 등장 이후로 다시 관심 갖게 되었다. 유튜브 바둑 영상을 하나 둘 찾아보다가 2020년 경에는 거의 매일 한 판씩 두게 되었고 점차 일주일에 한 판, 한 달에 한 판으로 줄어들었으며 현재는 아예 두고 있지 않다. 대국수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승률은 꽤 좋은 편이어서 얼떨결에 넷마블 바둑 8단까지 승단했었다(온라인 바둑은 기력 올리기가 쉬운 편이다).
매일 바둑 두기 전에 <바둑 선정의 마인드>를 꼼꼼히 소리내어 읽은 이후로 실력이 눈에 띄게 상승했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아래와 같은 글을 쓰고 읽어왔기 때문에 바둑을 쉽게 그만두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비단 바둑뿐만 아니라 승부가 갈리는 모든 게임에 취미를 붙인 분들께 참고가 되길 바라며 공유해본다.
=====
1.바둑이라는 게임의 원형을 품고 있던 법신불께, 바둑이라는 게임을 만들고 즐긴 현인들과 바둑을 발전시킨 기사들, 바둑을 혁신하고 완성해가는 인공지능(발명가-기업-개발자)에게, 바둑을 둘 수 있는 장을 개발해준 기업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환경에, 바둑을 배울 수 있었던 문화와 환경에, 바둑을 배우게 해준 부모님께, 바둑을 가르쳐준 스승님께, 바둑을 익히고 즐기는 스스로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집시다.
2.함께 게임을 하면서 생각을 나누고, 소통해주셔서, 기보를 남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르쳐 주고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한 수 배우겠습니다.
3.저도 일리 있고 의미 있고 재미있는 수를 두어 상대방에게 바둑 두는 재미를 느끼게 하겠습니다. 억지수, 무리수, 꼼수, 뻐김수, 장난수, 비양심적인 수는 되도록 두지 맙시다. 한 수 한 수가 나의 인격과 지성을 반영합니다. 상대의 기풍(개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수용/존중/긍정하여 도발/과욕/무리에 흥분하여 말리지 말고 차분히 최선의 한 수로 대처하고 응수합시다.
4.상대방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머리/센스/실력/멘탈/집중력이 좋거나, 행운이 따른다면 내가 질 수도 있고, 지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그 반대라면 내가 이길 수 있겠고요.
5.그러니 졌다고 화낼 것 없고, 이겼다고 자만할 것 없습니다. 승패의 결과와 나의 가치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승패라는 결과가 있기에 게임의 과정에 스릴과 재미가 생기는 것뿐이죠. 매번 이기기만 하면 게임과 승부가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과정에 충실할 뿐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카르마 요가를 수행하십시오. 이기면 나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하고 승리의 기쁨을 줘서, 지면 나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담백하게 생각합시다. 사실 지면서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죠.
6.승패에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그 태도야말로 지양해야 할 자세입니다. 모든 것을 차분히 관조하는 관찰자가 되어 그저 알아차리십시오. 프로 기사가 될 것도 아니고, 돈이 걸린 문제도 아닙니다. 감정에 휘말리면 에너지 소모도 훨씬 커지고, 흥분감으로 인해 바둑 실력과 재미 또한 저하됩니다. 바둑의 효과, 여운도 부정적인 여지가 생길 수 있고요. 순간의 과정에 몰입하여 즐길 뿐 지나치게 매몰되어 결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관념과 감정의 착각에 부질없이 속지 마십시오.
7.정신 수양, 두뇌 운동을 한다는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맑고 바르게 임합시다. 심심풀이-킬링타임, 관성-중독에 이끌려 꾸역꾸역 정신없이 폐인처럼 한심하게 두지는 맙시다.
8.지면 이길 때까지 두면서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하지 말고 몇 판 할지 딱 정해두고 둡시다. 하루에 한 판 두고 복기하는 것만으로 꽤 많은 정신력과 1시간이 너끈히 소비됩니다. 프로 기사가 될 것도 아니고, 돈이 걸린 문제도 아닙니다.
9.보이지 않는 상대라도 소중한 인연이니 겸손하게 예절을 갖춰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대합시다. 마음속으로라도 인사를 건넵시다. 이기면 기쁜 마음에 너그러이 인사할 마음이 생기겠지만 지더라도 겸손히 결과에 승복하고 상대를 인정해주고 인사를 건넵시다. 인격 수양의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10.기왕에 바둑을 둔다면, 바둑 한 판 한 판에서 신중하게 집중하여 수를 읽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피하여 제 실력을 발휘합시다. 꼼꼼히 복기하여 교훈을 얻고, 학습하여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고 차차 실력을 발전시켜 탁월함을 연마합시다.
11.나아가 바둑으로 인생을 은유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입니다. 아니, 그래야만 의미가 생길 것입니다. 그날그날 바둑으로 얻은 교훈-은유를 아래에 한 줄씩 메모하십시오. 바둑은 모든 전쟁, 승부, 싸움, 논쟁, 타협, 설득, 거래, 도박, 모험, 토론, 의사소통, 스타일-구상-설계-건축의 훌륭한 은유가 될 수 있습니다. 현상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삶을 살아가는 지혜/실전팁을 은유하고 가르치기에 이보다 적절하고 압축적인 수단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12.바둑 한 수 한 수, 한 판 한 판에서 정혜쌍운을 운전하는 훌륭한 기회, 훈련으로 삼으라. 깨어있는 자세로 알아차려서 그저 내 역량 안에서 가장 자명한 한 수를 두어라. 그뿐이다. 그게 다다. 결과에 좌지우지 흔들리지 마라. 그냥 자명하게 둬라. 그럼 자연히 결과에 승복하고 초연할 테니. 정신이 산란하거나 혼침할 때 실수하게 되어 후회, 분노가 남는 것이다. 그 여지를 줄여나가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유리함에 취해(과거에 얽매이는 것이다) 방심하여 양보를 거듭하고 작은 실수가 쌓이면 곧 큰 사고로 이어지며 그로 인해 승패가 좌우된다.
-나의 한 수가 상대의 실력-대응에 따라 결정타가 되기도 하고, 실수가 되기도 한다. 바둑이라는 게임 특성상 프로도 그렇고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언제나 최선의 수를 두는 건 인공지능뿐이지만, 최소한 어처구니없는 모험수, 실수는 되도록 피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 승리에 기여하는 것은 나의 잘함도 있지만 상대의 못함도 있다. 상대가 너무 못해서 이기면 이기고도 찜찜하다. 승리에 무조건 기뻐하지 말자. 다만 성장에 기뻐하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2.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심리적 약점, 기풍적 약점을 노리고 적절히 미끼를 물도록 도발하고 자극하면, 차분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상대에게는 충분히 역전의 기회가 남아있다. 기적같이 짜릿한 역전승에 그 어떤 영화 못지않은 재미와 감동이 있다. 마지막까지 형세가 뒤집히고 뒤집히는 게 바둑의 묘미다.
-바둑을 두면 대상과 하나가 되는 몰입이 잘 이뤄진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바둑 규칙/형세와 내가 ‘동일시’되어 희로애락이 들끓게 된다. 감정적이게 되는 동일시의 아집, 법집이 우려되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온라인 바둑이라는 무형의 관념적인 게임에까지 동일시가 될 수 있는 에고의 확장성이 놀랍기도 하다. 에고가 참나에 포함되기에 만법의 무엇이든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둑 두는 나는 전쟁터에서 아군을 지휘하는 장군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바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내가 설계하고 지휘하고 전투한다는 점에서 장군을 넘어 황제라도 된 기분도 든다. 그렇기에 그 패배가 더욱 쓰라리고, 분노가 치밀게 된다. 패배의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나더라도 상대에게 내서는 안 되고, 스스로의 부족한 실력에 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바둑은 이토록 마음공부에 크게 활용되는 신비로운 게임이다.
-욕심 그득한 상대 이길 때의 쾌감이란. 바둑에 있어서는 기력이 비슷하다면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 이긴다.
-여기서 손해를 보면 저기서 권리가 생긴다. 반대로 여기서 욕심을 부리면 저기서 망가질 일이 생긴다. 말도 안 되는 실수나 무리를 하면 여기저기서 다 무너진다. 바둑은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워준다. 물론 순간 수읽기, 부분 전투 등으로 한 곳을 바라보는 집중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승패는 전체의 형세에서 갈리는 것이므로 전체를 보는 균형 감각이 바둑 실력의 핵심이 될 것이다. 바둑은 흑과 백의 돌이 상징하듯이, 말 그대로 음양의 교차 그 자체다. 내가 바둑이라는 게임을 취미 삼아 하는 것에도 이런 음양 감각을 키워주는 일종의 훈련이요 의미라 여겨진다.
-학습하지 않아 시대에 도태되면 빈틈이 많고 쉽게 무너지게 된다. 인공지능이 최적/최선의 포석을 짜놓고 알려주었으면 그것을 겸손히 배우고 수용할 줄 아는 미덕을 지녀야 승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더 잘 즐길 수 있다.
-(사활의 경우처럼) 한순간, 한 치의 차이로 인해 생사가 갈리고 승부가 갈린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한다.
-욕심과 꼼수, 무리수는 짓밟아주는 게 제맛. 정의 구현과 참교육이 필요한 상대한테는 압도적으로 승리해버려야 한다.
-초반에 휘말릴지라도 (상대가 인공지능이 아닌 이상) 중후반에 기회는 계속, 아직 남아있다. 오히려 초반에 불리하게 시작한 것이 상대에게 방심을 유발하여 더 크게 이기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흥분감에 한 수를 잘 못 놔서, 묘수 아닌 무리수에 넘어가서 완패했다. 완승할 뻔한 게 완패한 것이다. 딱 한 수 잘못 봤다고 모든 수고가 날아간다. 상대가 나보다 기력이 더 센 상대였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나 나도 빈틈을 파고들어 기적같이 기회를 잘 만들어냈다.(이게 실력 상승의 포인트. 역시 위기가 와야 자극이 되고, 실력이 상승한다) 이 기적이 성공했어야 가치가 있는 것인데 너무나도 아쉽고 분하다. 승부의 게임인 이상 감정에 동요가 없기는 역시 힘들다. 그래도 마지막에 인사를 하고 나왔다. 욕은 나왔지만.. 평상심을 완전히 놓치지는 않았다. 아직 수양의 길이 한참이다.
-결정적인 수, 선수를 두고 헛수, 실수를 안 두면 이긴다. 또한 상대의 결정적인 수, 선수에 적절히 반응해주고, 헛수, 실수를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지거나 따지면 지지 않는다. 바둑도 자명/찜찜 길만 따라가면 된다.
-상대의 과욕, 무리수, 꼼수에 휘둘리고 말았다. 더는 못 참겠다 싶어서 나도 점차 과격하게 두었고 그러다 보니 실수가 터져 나오고, 상대는 또 의외로 이런 실수를 물고 넘어지는 데 능숙한지 판을 엉망으로 만든 뒤에 약점을 하나씩 집요하게 파고들어 득점을 챙겼다. 반면에 나는 불쾌감을 짓누르지 못하고 상대를 계속 몰아가려 하다가 말이 안 되는 수를 두기도 하고, 판단 미스를 하기도 했다. 참으로 기분 더러운 기력이었지만 나의 패배를 인정하고 그런 기분 나쁜 기풍을 가진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밀릴 수 있다는 실전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현상계는 진흙탕이고 보살은 이런 곳에서도 연꽃을 피워 올려야 한다. 신사다운 승부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 전통 무술의 달인이 종합격투기 선수에게 코피 터지도록 발렸듯이. 이 삶의 은유를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분 나쁜 승부이긴 하지만, 위의 바둑선정지침을 따라 상대의 기풍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 감사까지 해야 할 것이다. 나의 경계를 이만치 깊숙이 푹 들어와 건드려 자극하는 것도 모두 공부가 될 것이기에. 이것을 공부로 만드느냐 그냥 기분 나쁜 불쾌한 순간으로 남기느냐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에 달렸다. 삶이 자유로우려면 인생의 모든 경계를 배움과 깨달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6바라밀을 통해 영적 연금술을 실현해내야만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직감에 의존하고 감정에 끌려다니면 결정적인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선정-깨어있음에 기반한 직관과 논리적 이성으로 수순을 밟아나가야 정확히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