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by 은한

새로운 가구들이 하나 둘 집에 도착한다. 건전지가 없는 탓에 시계는 10시 13분에 멈춰있다. 나는 그것 앞에서 멈춰 멍하니 오랜 시간 바라다본다. 그 다음에는 거울을 멍하니 바라다본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창밖으로는 한번씩 기차 경적 소리가 들려온다. 열차가 지나가는 시간은 도저히 예상하지 못할 만큼 불규칙적이다. 넓어진 방을 괜히 한바퀴 두바퀴 세바퀴 천천히 걸어본다. 초록빛 식물들을 바라본다. 벌써 1년을 넘게 함께 살다니 문득 소중하게 아름답게 여겨진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책들을 살펴본다. 제목만 읽어도 썩 만족스럽다. 매 끼니를 집에서 챙겨먹고 밥을 먹고 곧 설거지를 한다. 이사 오기 전에는 징하게 쌓이고 쌓여 일주, 이주가 넘어야 하던 설거지다. 쓰레기는 즉각 쓰레기통으로 넣는다. 어디 쌓인 먼지가 없는지 살펴보고, 눈에 띄면 곧바로 닦는다. 새로 산 밀대걸레로 바닥도 박박 닦아본다. 음 만족스럽군.

엄마가 만들어줬던 김치전을 따라 만들어보려고 양파를 썰었다. 마지막 칼질 반쪽으로 쪼개면 될 양파에서 네번째 손가락을 같이 써는 바람에 살이 베였다. 스친 줄 알았으나 살점이 너덜거렸고 피가 샘솟아 뚝뚝 흘렀다. 신경도 나간 건지 촉감이 생각보다 무뎠다. 수돗물로 한번 세척하고, 우리집에 밴드가 없구나, 마데카솔을 작게 쥐어짜 얹은 후에 휴지를 돌돌 감고 테이프로 꽉 묶어서 응급 처치를 했다. 그 상태로 부침개 반죽을 마저 완성했고, 아까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아 비빔밥을 먹었다. 곧장 병원을 갈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토요일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은 지나치게 비싸고 왠지 오바하는 거 같다. 이대로 지혈을 한 뒤 월요일에 병원에 가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꿰맬 정도는 아니잖아? 하고 낙관했다. 그래도 약국은 들려야할 꺼 같아 비빔밥을 깨끗이 비우곤 나왔다.


약국에 휴지를 돌돌만 넷째 손가락, 피가 흥건히 젖어있는 그것을 보여주며 칼에 베여서 왔어요, 라고 말했다. 병원을 가야하지 않겠냐고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얘기했고, 어느 정도로 베였냐고 약사로 보이는 사람이 물었다. 휴지를 풀어 보여주려고 하니 기겁하더니 됐다고 멋쩍은듯 웃으며 옆에 피부과에 가보라했다. 주말인데 열었어요? 열려있다고. 다행히 피부과에서 칼에 베인 상처도 진료해주었고, 결국에 세 바늘 꿰매는 수술을 했다. 의사 앞에서 돌돌 만 휴지를 풀자 피가 다시 솟구쳐 흘렀다. 의사는 빨간약으로 젖어있는 솜으로 상처 부위를 닦아주었고, 차분하게 면밀하게 상처 부위를 살폈다. 이거는 꼬매야겠네요. 역시 차분하게 얘기한다. 누워서 수술받는 게 낫겠다고 하여 누웠다. 피가 아마 뚝뚝 떨어지고 있었을텐데 나는 누워있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네번째 손가락만 어떤 수건 틈 사이로 빠져나와 수술을 진행했다. 의사는 조금 따끔할 꺼에요, 하고 국소마취 주사를 했다. 상처 부위 주변으로 네번 정도 찔려 주사 바늘이 들어왔다. 이 따가움이라는 감각을 나는 순전히 그 순간의 나를 위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객관적? 차라리 어떤 강박적인 왜곡일지도 모른다. 내 신체를 우주의 한복판에 맺혀있는 아주 조그만 먼지라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이 따가움은 그 먼지에서 울려퍼지는 작지만 날카로운 파동이다. 그러면 뇌의 오른쪽 뒤편에서부터 고통이 멀리서 아련히 울려오는 것 같다. 네번의 따가움을 목격하고 관찰했다. 마음가짐 하나로 따가움에 대한 호감도가 바뀔 수 있다.

나는 일주일에 수 차례는 칼에 베이고 병원 진료를 받는 양 태연하게 굴었다. 의사에게 만약 밤에 다쳤다면 어쩌나, 하고 우려를 표해보았고 병원과 상처에 관련된 의문을 물었다. 의사는 차분하고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손을 꿰매는 와중에 그랬으니 뭐 이런 환자가 다 있어, 하고 재밌어 했을지도 모른다. 마취가 잘되어서 꿰매는 감각은 덜 위협적이었다. 의사는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었고, 향후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진료 일정이 어떻게 될지 설명해주고는 나갔다. 진료실에 앉아있는 의사 앞에서 어리숙하게 기웃거리니 미소지으며 계산대에 가서 처방전을 받으면 된다 했다. 의사에게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처방전을 받으러 갔다. 김치전 하나 먹으려다가 이게 무슨 일이람. 수술 비용이 십만 원이 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병원비는 다행히 13500원이 나왔고 약값도 고작 2800원인가 나왔다. 한국이 의료 시스템 하나는 환상적인 것이다.


죽어있는 시계를 살리기 위해 편의점에 들려 건전지를 샀다. 집에 가기 전에 노래나 부를 겸 코인노래방에 갔으나 빈 자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릴 만큼 랩과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었다. 두어바퀴 둘러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에 건전지를 넣었고 시간을 맞춰 다시 벽에 걸었다. 초침은 정밀한 소리를 내며 일정한 간격으로 나아갔다. 시간이 흐르군. 이제 시계를 멍하니 바라볼 일이 거의 없겠지. 후라이팬에 포도씨유를 넉넉히 두른 후 아까 해놓은 김치전 반죽을 올렸다. 한번에 뒤집기는 힘들어서 네 조각으로 나눈 후 하나씩 뒤집었다. 아주 잘 구워졌다. 피를 쏟고 먹는 김치전이 유독 맛있었다. 특히 양파는 달기까지 했다. 창밖에서는 예고도 없이 경적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 열차를 움직이게 하는 건전지가 있다면 빼면 좋을텐데. 여기는 신촌이다. 나는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도 없이 이사를 온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디론가 영원히 걷고 싶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