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내가 너를 다시 만날 땐 고통도 망각도 없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거리의 가로등은
내 사랑의 약속들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그 조용한 불빛 아래 태양처럼 빛나던,
나의 귀여운 아기, 너를 내가 처음 보았지.
오늘, 나의 운은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항구도시,
너를 다시 보고,
반도네온의 푸념 같은 음악을 듣고,
가슴 가운데 심장이 팔딱거릴 운이었던 모양이다.
- 카를로스 가르델, 『Mi Buenos Aires querido』(나의 사랑 부에노스아이레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를 걷다보면 중절모를 쓴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그려진 벽화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벽화의 주인공은 카를로스 가르델.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탱고의 황제’라 부르는 예술가입니다. 우리에게 카를로스 가르델은 생소한 이름입니다. 오히려 삐아졸라가 더 잘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여인의 향기>란 영화에서 알파치노가 어여쁜 여배우와 탱고를 추는 장면과 그때 흐르던 탱고선율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겁니다. 그 곡의 제목은 <포르 우나 까베사(por una cabeza)>입니다. 바로 카를로스 가르델이 작곡한 곡이지요.
카를로스 가르델은 1887년 지금은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아바스토 시장 근처에서 태어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17년 음반 '미 노체 트리스테(Mi Noche Triste, 나의 슬픈 밤)'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가르델은 아르헨티나의 밑바닥 문화에 불과했던 탱고를 세계적인 예술로 격상시켰습니다. 무엇보다 가르델은 탱고를 사랑했고, 자신에게 탱고를 가르쳐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다시 만날 땐 고통도 망각도 없을 것이다.”라며 다짐하던 가르델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소중하게 기억하며 자신이 품고 있는 거리 곳곳에 벽화와 동상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가르델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운명적으로 맺어진 연인처럼 지금도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탱고가 탄생한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위치한 작고 지저분한 항구 보카입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럽 이민자들 중에서 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 바로 보카였습니다. 이들은 대개 가족을 고국에 두고 홀로 아르헨티나에 온 백인남성들이었습니다. 가난 속에서 허덕이는 고국의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이들은 신대륙의 한참 번성하고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항만 노동자의 삶은 거칠고 고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외로웠습니다. 당시 보카는 남녀의 성비가 10:1에 이를 정도로 거친 남자들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보카에서 외로움에 사무친 항만 노동자들이 찾을 수 있던 여자들은 모두 홍등가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남자들이 사랑했던 여자들은 다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많고 여자는 적기에 실연을 당하는 쪽은 늘 남자들이었습니다. 거절당한 남자들은 거리에서 자기들끼리 부둥켜 안고 춤을 추었습니다. 이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괴로움과 자신을 버린 연인에 대한 원망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와 춤으로 달랬습니다. 외로운 남자들과 홍등가의 여인들은 보카의 음침한 유곽에서 서로 얽히며 탱고를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 불쌍한 사람들은 4분의 2박자의 격한 리듬을 타며 서로의 몸을 맞대고 잠시나마 짜릿한 관능 속에서 서로를 위안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탱고를 출 수 있는 밀롱가들이 즐비합니다. 매일밤 이 도시의 좁은 골목들에서는 반도네온 소리에 맞춰 탱고를 추는 남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외로운 남녀들은 말없이 탱고를 추면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습니다.
영국의 영화감독 셸리 포터가 직접출연까지 한 영화 <탱고 레슨>에서 셸리 포터는 탱고를 배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갑니다. 영화 내내 셸리 포터는 탱고 댄서 파블로와 탱고를 춥니다. 셸리 포터는 이 춤들을 통해서 여자와 남자가 맺을 수 있는 다양한 관계의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탱고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셸리 포터가 부르는 ‘I am you’라는 노래 가사를 통해 우리는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탱고를 추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춤 출때, 난 확신해요
난 알아요, 당신을 알아요, 아주 오래전부터
맴도는, 내 맘 속을 맴도는 당신
무대 위, 당신의 예술 속에서
당신의 발짓으로 바람같이 말하는 그대
나는 당신을 듣고, 보아요
우리가 만난 그곳에서
눈과 귀는 어느 곳에서 세상을 받아들이나요?
뱉어진 말들은 어디서 들을 수 있나요?
당신은 나고, 나는 당신이예요.
하나는 하나고, 하나는 둘이죠.
하나는 하나고, 하나는 둘이죠.
당신은 나고, 나는 당신이예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외로운 두 사람이 잠시 하나가 되는 꿈을 꾸는 곳입니다. 당신은 내가 되고 나는 당신이 되는 그런 꿈. 탱고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이유는 아마 우리가 모두 외롭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은 혼자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함께 할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맵니다. 마누엘 푸익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에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두 남자가 등장합니다. 동성애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감옥에서 영화이야기를 나누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간을 보냅니다.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면서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을 잊으려는 몰리나와 발렌틴은 마치 탱고를 추는 연인들을 닮아 있습니다.
군사정권 하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구치소 D동 7호방엔 두 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습니다.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수감된 37살의 게이, 루이스 알베르토 몰리나와 노조파업을 선동하여 수감된 26살의 마르크스주의자 발렌틴 아레기 파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로 몰리나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영화를 이야기해주면 발렌틴이 그 영화를 분석하거나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식입니다.
처음 두 사람은 계속 충돌합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몰리나는 섬세하고 여린 감정을 지닌 게이입니다. 몰리나는 정치적 의식도 없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몰리나의 직업은 디스플레이어였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상품들을 예쁘게 전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서민계급이지만 부르주아적 삶의 방식들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잘 내조하고 아이들을 잘 보살피는 중산층 가정의 여성을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발렌틴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그는 혁명을 위해 싸우는 게릴라이며 항상 정치적 투쟁을 생각하며 사회과학서를 읽는 지식인입니다. 발렌틴은 지극히 남성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혁명을 위해 싸우는 투사이기 때문입니다. 발렌틴은 중산층 출신에 좋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을 경멸합니다. 그는 노동자들을 착취해온 부모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게릴라에 합류하여 국가에 위협적인 반정부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두 사람이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입니다. 발렌틴은 좌파 게릴라라는 정치적 소외자로서 감시를 받고 고문을 당하는 등 국가권력기구의 폭력 속에서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몰리나는 동성애자라는 성적 소수자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욕망을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몰리나는 부당한 모멸감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국가폭력과 문화적 억압 속에서 학대당하는 두 사람은 스스로를 억압하며 괴로워하는 불쌍한 인간들이기도 합니다.
「여자처럼 부드러운 게 뭐가 나쁘다는 거지? 수캐든 게이든 간에 감성적이 되고 싶어하는데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이유는 뭐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무 감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남자가 되는 데 방해 요소야」
발렌틴은 감성적인 몰리나를 ‘예민하다’고 규정합니다. 발렌틴에게 ‘예민함’은 여성적인 것이고 이성이 결여된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발렌틴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구분하는 가부장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렌틴은 자신의 감성을 계속 억압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래서 발렌틴은 여자동료와의 관계에서 사랑을 배제하려고 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마르타에 대한 감정을 죄악시합니다.
「이런 이상하고도 슬픈 사랑의 꿈...... 네가 볼레로를 부를 때 왜 내가 화를 냈는지 알아? 네 노래가 내 여자동료가 아니라 마르타를 생각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심지어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 계급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상류계급만 좋아하는 이 세상의 개만도 못한 놈들처럼 말이야.」
발렌틴이 마르타에 대한 감정을 억압하는 이유에는 이렇게 이념적인 문제도 얽혀있습니다. 마르타는 부르주아계급이고 그러한 마르타를 사랑하는 건 마르크스주의자인 발렌틴에겐 사상을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몰리나는 성소수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아왔지만 동시에 그 억압적인 폭력에 순응하며 쾌락을 느끼는 모순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남자가 내 남편이라면...... 그는 명령을 해야만 돼.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니까. 그건 자연스런 것이야. 남편이란 한 가정의 가장이니까.」
「아니야. 가장과 주부는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그건 착취야.」
「그러면 남자다운 매력이 없어지는데」
「뭐라고?」
「그래. 이건 밝혀서는 안 되는 것인데, 네가 알고 싶어하니까..... 남자다운 매력은 한 남자가 널 안을 때...... 그가 조금은 두렵다는 느낌을 받게 되어야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야」
몰리나는 진정한 여성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여성이란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순종적인 여성입니다. 몰리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상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하고 이성적인 남자가 되어야한다는 세상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몰리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억압적 남성성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발렌틴과 몰리나는 이렇게 모순된 자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군부독재시대의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또다른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발렌틴은 마르크시즘과 혁명이라는 대의 때문에 자신이 가진 인간본연의 감정을 감금하고 있고, 몰리나는 동성애자지만 이성애자들이 만들어낸 가부장적 억압구조에 길들여진 모범수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계속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발렌틴의 정치적이고 이성적인 면은 몰리나에게 계속 상처를 주고 몰리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성성은 투사로서의 발렌틴을 계속 흔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해방을 위해서 발렌틴에겐 몰리나가 필요하고 몰리나에겐 발렌틴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결핍을 억압하지 않고 자신의 과잉을 조심스럽게 다스릴 때 인간은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온전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자신과 타인을 억압하지 않을 때 진정한 인간해방은 이루어집니다. 이 소설은 몰리나와 발렌틴이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성취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혁명의 과정은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6편의 영화이야기들 속에서 두 사람이 맺게 되는 관계의 변화들을 통해서 그려집니다.
1. 표범여인 이야기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처음 들려주는 영화는 『캣피플』입니다. 이 영화는 이레나라는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해서 결혼하게 되지만 자신이 표범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되는 비극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몰리나는 이레나에게 감정이입합니다. 표범여인이라는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듯이, 몰리나의 동성애자란 정체성 역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발렌틴은 이레나가 사랑하는 남자설계사 혹은 이레나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려는 정신과 의사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몰리나에게 발렌틴은 애정을 느끼게 하는 대상(남자설계사)이기도 하고 위협을 느끼는 대상(정신과 의사)이기도 합니다.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설계사와 의사 중 누구와 더 가까운 것 같냐고 묻자 발렌틴은 정신과 의사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아직 두 사람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거리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설계사 역시 이레나가 표범여인임이 밝혀지자 자신을 좋아했던 여자동료와 함께 사라지며 이레나를 버린다는 점에서 정신과 의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즉 표범여인의 이야기는 발렌틴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몰리나가 가지고 있던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레나가 남자 설계사와의 키스를 두려워 하듯이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마음을 놓고 정을 줄만큼 발렌틴을 믿지 못하고 있고, 이레나가 정신과 의사에게 갖는 불안감과 공격적 모습에서 자신을 분석하고 가르치려 하는 발렌틴의 고압적 태도를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2. 나치의 선전영화
몰리나가 두 번째로 들려주는 영화는 나치의 선전영화입니다. 프랑스의 여가수 레니는 잘생긴 독일장교를 사랑하게 되지만 마키단(레지스탕스)으로부터 독일군의 정보를 빼오라는 요구를 강요받게 됩니다.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는 마키단과 사랑하는 독일장교 사이에서 레니는 아슬아슬한 스파이활동을 하게 됩니다. 마키단의 협박과 독일장교와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레니는 독일군이 마키단의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 이야기에서도 몰리나의 심리상태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몰리나는 구치소 소장으로부터 발렌틴에게서 정보를 빼내올 것을 요구받았었습니다. 소장은 몰리나에게 게릴라에 대한 정보를 빼내오면 그를 가석방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마키단(소장)이 레니(몰리나)를 시켜 독일군 장교(발렌틴)로부터 정보를 빼내오라고 협박한 영화의 구도와 같습니다. 레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임무(발렌틴에게 정보를 얻어내는 것)와 자신의 감정(발렌틴에 대한 호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몰리나의 심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몰리나는 정치적 의도로 만들어진 나치의 선전영화를 보면서도 오직 남녀의 로맨스에만 집중합니다. 이렇게 몰리나에겐 정치적 사고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습니다. 발렌틴은 이 점을 공격하고 몰리나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계속되는 도중에 몰리나는 배에 통증을 느낍니다. 소장이 발렌틴에게 먹이려던 약을 탄 옥수수죽을 몰리나가 대신 먹었기 때문입니다.
3. 매혹의 오두막
세 번째 영화는 발렌틴에게 전해지지 않고 몰리나의 의식 속에서 이야기됩니다. 몸이 아픈 자신을 귀찮아하면서 책만 읽는 발렌틴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발렌틴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나쁘게 평가해서 상처를 받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얼굴에 상처를 입고 숲속의 오두막에 틀어박힌 한 청년을 사랑하는 못생긴 하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얼굴에 흉터가 새겨진 청년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힌 발렌틴과 연결됩니다. 철학책을 읽으면서 이따금 자신이 방해받는다고 느낄 때마다 악의에 찬 시선을 하녀에게 던지는 청년의 모습은 아픈 몰리나를 귀찮아하며 책읽기에 몰두하는 발렌틴과 유사합니다.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크게 실망하면서 “저놈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까? 마음이 괴로워서 죽는다는 뜻을 알까?”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흉터를 얻게된 청년은 하녀에게 청혼을 합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추한 하녀만이 자신을 동정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외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그들이 지닌 흉터와 추한 외모가 마법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을 뿐입니다. 청년의 부모가 그들을 찾아왔을 때, 그들은 거울을 보고 자신들의 흉터와 추한 얼굴이 그대로 있음을 알게 되고 좌절합니다. 이 이야기엔 몰리나의 위축된 심리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몰리나는 청년의 흉터와 하녀의 추함이 사라졌듯이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청년의 부모처럼 완고합니다. 몰리나의 헌신적인 사랑을 역겨워하는 세상에서 몰리나는 더욱 위축되고 소외됩니다. 발렌틴의 무관심을 받으며 가장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몰리나의 상황은 이 이야기를 더욱 슬프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4. 게릴라가 된 청년과 유럽여자의 사랑
네 번째 이야기를 하는 시점에서 발렌틴은 극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소장이 준비한 음식을 드디어 발렌틴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발렌틴에게 조금이나마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몰리나는 또다시 영화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네 번째 영화는 자동차 경주를 하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바나나 농장주의 아들인 청년은 특정한 자동차 회사의 차를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자동차로 경주에 참가합니다. 독립심이 강한 청년은 부르주아 계급이지만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동차 회사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상류계층의 프랑스 여배우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청년의 아버지가 게릴라에게 납치되고 청년은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가 게릴라들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죽게 됩니다.
청년의 이러한 모습은 중산층 출신이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발렌틴과 쉽게 연결됩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그 때문에 어머니와 멀어지게된 청년의 모습이 발렌틴의 가족사와 흡사합니다. 또한 청년이 사랑하는 프랑스 상류층 여성은 발렌틴이 사랑하는 마르타와 관련지을 수 있습니다. 몰리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발렌틴은 이번엔 스스로 영화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내밀한 심리를 고백합니다. 발렌틴이 재구성한 이야기 속에서 청년은 게릴라들과 한패가 되고 게릴라 처녀를 만나 그녀를 임신시킵니다. 게릴라 처녀는 발렌틴의 여자동료로 볼 수 있습니다. 유색인종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원치 않는 청년의 모습에서 역시 발렌틴이 여자동료에 대해 갖고 있는 모순적 감정이 드러납니다. 청년은 게릴라를 이끌고 어머니의 농장을 급습하여 어머니를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자 이성을 잃고 게릴라들에게 총을 겨누다 게릴라들의 총에 맞아 죽고 맙니다. 겉으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투사로 보이지만 발렌틴의 내면엔 정치적 이념과 자신의 욕망 사이의 괴리가 매우 큼을 알수 있습니다.
이 영화이야기 도중 발렌틴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다가 설사를 하게 됩니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보살펴줍니다. 몰리나의 보살핌을 받고 발렌틴은 몰리나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게 되며 이 후 둘의 관계가 매우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5. 좀비와 함께
몰리나가 들려주는 다섯 번째 영화는 좀비가 등장하는 공포영화입니다. 뉴욕에 사는 한 여인은 카리브해에 농장을 가지고 있는 청년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혼생활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남편은 뭔가를 숨긴채 괴로워하며 술을 마시고 한 백인 좀비여성에게 쫓기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남편이 괴로워하는 이유를 추적해가면서 여인은 예전에 섬의 마법사가 남편의 아버지와 짜고 노동자들을 죽여 좀비로 만들고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일을 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자 남편은 좀비들을 불로 태워 그들을 자유롭게 하고자 했지만 마법사의 계략에 걸려 아내를 죽이고 그 살인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마법사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계약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남편의 전부인은 좀비가 되어 마법사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아내가 본 백인여자좀비가 바로 남편의 전부인이라는 것도 밝혀집니다. 여인은 사악한 마법사로부터 남편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마법사는 남편의 전부인을 시켜 술에 취한 남편을 죽입니다. 그러나 마법사는 번개에 맞아 죽고 여인은 섬을 떠나게 됩니다.
여인이 섬을 떠나는 결말은 몰리나의 출소를 예상케합니다. 그리고 몰리나가 좀비여성이 되길 거부하고 마법사(소장)에 맞서서 남편(발렌틴)을 지키는 여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이야기가 끝나고 몰리나와 발렌틴은 서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 네가 된 것 같아.”라고 고백합니다. 몰리나와 발렌틴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임을 느끼는 완전한 관계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마지막 멜로드라마
몰리나의 마지막 영화는 멕시코의 멜로드라마입니다. 멕시코의 항구도시 베라크루즈의 카니발에서 가면을 쓴 한 커플이 춤을 춥니다. 여자는 은퇴한 여배우이자 가수이고 남자는 신문기자입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여자에겐 그녀를 소유한 갑부가 있습니다. 갑부는 질투심이 심해 그녀를 가두어 두려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도망치자고 하지만, 갑부가 남자를 가만두지 않게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거절합니다. 남자는 실의에 빠져 신문사도 그만두고 술독에 빠진 채 병이 듭니다. 그런 남자를 보고 여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매춘을 하면서 허름한 집에서 그를 보살핍니다. 그러나 남자는 결국 여자의 품에서 죽고 맙니다. 여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부들이 남자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그를 추억합니다.
신문기자인 남자(발렌틴)는 여자(몰리나)를 갑부(소장)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갑부가 여자를 붙잡아두는 힘이 돈과 보석임을 생각할 때, 발렌틴의 역할은 몰리나를 부르주아계급으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자가 갑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선 부와 명성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과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을 처참하게 버리는 모습을 보고 갑부로부터 벗어나려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사랑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자신을 과감하게 내던졌듯이, 발렌틴과 몰리나는 그들을 옥죄고 있는 억압된 자아를 과감하게 버려야합니다.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진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한다는 의미니까, 비록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났을지언정......」
발렌틴과 몰리나는 그들의 만남이 이제 끝이 날 것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정한 관계를 맺었고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이야기가 끝나고 몰리나와 발렌틴은 키스를 합니다. 키스를 하면 표범이 될지도 몰라 두려워하던 몰리나는 발렌틴과의 키스를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게 됩니다.
몰리나는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6편의 이야기들 모두 원작의 내용을 변형하고 편집한 것으로 몰리나가 원작을 토대로 새롭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몰리나는 환상과 현실, 기쁨과 슬픔, 욕망과 좌절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짜는 거미여인입니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짜놓은 이야기들에 붙잡히고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입니다. 몰리나는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발렌틴을 끌어들여 발렌틴과 완전한 결합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몰리나의 이야기는 주술적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몰리나의 주술은 사악한 마술사처럼 타인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영혼을 치료하고 보듬는 사랑의 주술입니다.
그러나 발렌틴과 몰리나의 결합은 개인적인 사랑의 사건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결합은 혁명과 사랑, 이성과 감성, 문자(책)와 음성(영화)이 만나 하나가 되는 사건입니다.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발렌틴은 이성적으로 세상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감성을 억압했습니다. 발렌틴은 책을 보면서 몰리나의 말을 억압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나의 이야기를 하려면 책을 덮어야 합니다. 혁명은 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세상은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할 때 이루어집니다. 말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비로소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고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몰리나는 타자와의 관계에 목말라 있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다양한 음식들을 먹여주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헤프게 퍼주는 몰리나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외롭고 사랑에 허기가 져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몰리나는 나치의 선전영화가 가진 정치적 맥락을 읽지 못할 만큼 세상을 보는 비판적인 눈이 결여되어있습니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구조가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억압하는지를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몰리나는 무지하고 몰리나의 사랑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지와 맹목은 사랑과 폭력적 관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희생과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은 평등해야하고 어떠한 착취도 있어선 안됩니다.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 발렌틴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본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혁명이 사랑을 배우고, 이성이 감성의 위로를 받으며 문자가 음성 속에서 따뜻한 체온을 얻게 됩니다.
한편 몰리나는 자신을 존중해야하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권리를 빼앗겨선 안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라도 다른 인간으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받아선 안되며 억압에 길들여지지 않고 저항해야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몰리나의 이러한 성숙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표범여인에서 갑부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는 여배우가 되어가는 변화로 영화이야기 속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랑은 억압을 가려내는 눈을 얻고, 감성은 분별력을 얻게 되며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한 얘기 또 해서 미안해. 전에 한번 말했는데, 넌 그 말을 별로 달갑게 여기질 않았어.」
「.......」
「몰리나, 남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그래, 약속할게」
「......」
「벌써 책을 덮어, 이렇게 일찍?」
「......」
몰리나와 발렌틴의 변화를 소설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몰리나는 남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지 않겠다고 발렌틴에게 약속하고 발렌틴은 책을 덮고 몰리나를 바라보며 말을 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하나가 되면서 고립에서 벗어납니다.
억압이 나쁜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끊어내고 착취의 구조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에서 사람들은 각자 고립되어 서로 소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극심한 고문의 고통도 이겨냈던 발렌틴이 몰리나의 B급 영화들을 혐오하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무시와 경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고통을 느끼는 발렌틴에게 연민과 애정을 갖게 되는 몰리나의 모습에서 사람에게 정을 주지 않고선 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몰리나는 사람에게 정을 붙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래. 그건 잘못 잠긴 수도꼭지 같아. 그러면 물방울들이 아무것에나 마구 떨어지지만, 그걸 멈추게 할 수는 없거든」
마치 잘못 잠긴 수도꼭지에서 아무 것에나 떨어진 물방울처럼 ‘너’와 ‘나’는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이렇게 뜻밖의 일입니다. 소장이 몰리나를 발렌틴의 방으로 보내면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또한 사랑은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아끼는 마음입니다. 권력이 나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겐 이미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시선은 이렇게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억압당하지도 억압하지도 않으며 ‘나’와 ‘너’의 관계를 완성합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해방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나’가 되는 완전한 순간을 간직한채 몰리나는 출소합니다. 그리고 발렌틴의 메시지를 게릴라들에게 전달하다 총에 맞아 죽습니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죽은 뒤 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으며 죽어갑니다. 고문에서 깨어나 간호사가 몰래 놓아준 모르핀을 맞은 발렌틴은 환상 속에서 마르타를 만납니다. 마르타에게 발렌틴은 거미여인의 영화를 이야기해줍니다. 거미여인은 슬프게 울고 있지만 그 눈물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입니다. 발렌틴이 지어낸 영화이야기 속에서 발렌틴은 몰리나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우리가 깨달은 가장 어려운 일이 뭐지?, <내가 당신 마음 속에 살아 있고, 그래서 당신과 항상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당신은 절대로 홀로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죠>, 당연하지, 난 그 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야, 우리 두 사람이 똑같이 생각한다면, 우린 함께 있게 될 거야, 비록 볼 수는 없어도 말이야.」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죽어가는 발렌틴의 환상 속에 나타난 거미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