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마지막 48시간

뺑소니 교통사고 후 25년간 우리와 함께해줘 고마워

by 뉴욕박변

그 날도 어김없이 치과에 들렀다 스벅에 앉았다. 토요일 아침, 남아있는 업무를 마치려고 컴퓨터를 막 열었을 때 엄마가 전화를 했다. 아빠가 무의식 상태로 중환자실이라고...


25년간. 그러니까 한 인간이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마치고도 남을 그 25년간 아빠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2002년 있었던 출근길 뺑소니 교통사고. 당시에는 CCTV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사고 직후 아빠가 아주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 뒤에서 군인차가 아빠차를 들이박았다는 것 뿐이었고, 국립과학연구소의 조사 내용은 아빠차가 주위 가로등을 축으로 운전석쪽으로 9번 회전을 하면서 그 힘으로 아빠가 타고 있던 운전석은 문이 아빠 몸 쪽으로 밀려 들어가 문을 열 수 없어서톱으로 차문을 쓸어 아빠를 구조했다는 말이었다.


기차역에서 바로 병원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때 난 어렴풋이 짐작했다. 1인실 중환자실, 언제든지 면회가 허락되는 이 방. 그건 이번이 내가 아빠가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아빠는 목에 뚫린 구멍으로 산소를 공급하고 있었지만 힘들게 호흡하고 있었고 눈을 깜빡거릴 힘도 없어 계속해서 실눈을 뜨고 있었다. 아빠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힘들어서 어떻하냐는 말 뿐이었다.


두 동생들은 하나는 미국, 하나는 영국에 있었고 비행기를 타면 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비디오콜로 아빠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기로 했다. 사실 지난 봄 아빠가 비슷한 상황으로 중환자실에 입원 했을 때 마지막을 예감하고 각각 동생들이 한국에 와서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간 상태였다.


취미로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던 아빠가 제일 자주 들려줬던 곡은 <알함브라의 궁전>이었다. 1시간짜리 알함브라 기타 연주곡 재생을 반복하고 나서는 아빠가 자주 부르던 팝송 <My Way> <Yesterday>과 모임에만 가면 엄마를 보며 첫 곡으로 부르던 '젖은 손이 애처러워...'로 시작되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우리 셋이 아빠에게 불러줬다. 밤이 되자 70이 넘은 엄마는 집에 가서 주무시도록 하고 나는 아빠 곁에서 컴퓨터를 켜고 일을 좀 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혹시라도 사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아빠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좀 더 여유롭게 즐기면서 가실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내 잘못인것 같았다. 암에 걸렸다고 일이 바쁘다고 한국에 있으면서도 아빠를 더 자주 찾아빕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적어도 40번은 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다음 생애에는 내 아들로 아빠가 와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사랑도 듬뿍 주고 아빠를 돌볼 수 있도록.


둘째 날이 되자, 아빠의 혈압이 떨어지면서 침대에서 양다리를 높게 올렸다. 아빠 허리가 아플 것 같았지만 더 떨어지면 안된다고 해서 위치를 바꿔주지 못했다. 다시 새벽이 왔고, 혈압과 맥박, 심박수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며 영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는 동생에게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 보내며 상황을 체크했다. 새벽이 되자 급격하게 혈압이 떨어졌고 승압제를 써서 억지로 혈압을 올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자고 있던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서둘러 오라고 했고, 동생들에게 다시 비디오 콜을 했다. 승압제가 반복적으로 투여되었고 그러다 아빠가 온 몸에 감전이 된 듯 경련이 일어났다. 그 순간 경련을 없앨 수 있는 주사를 놔 달라고 했지만 다른 중환자를 보느라 당직 간호원은 정신이 없었다. 더 이상 아빠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 승압제를 중지시켰으면 했지만, 엄마는 목사님이 오셔서 마지막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런 모든 것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욕심인 것 같아 엄마에게 화를 냈는데, 결국 가장 힘든 사람은 배우자니까 배우자의 뜻을 따르는 게 맞다는 동생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새벽 4시반에 목사님이 오셔서 마지막 예배를 드려주셨다.


월요일 아침 7시에 중요한 컨퍼런스콜이 있다고 아빠한테 말했었는데 아빠는 갈 때까지 자식 생각해서 25년 12월 22일 오전 7시 6분에 운명하셨다. 그리고 나는 중환자실 밖에 의자에 앉아 컨퍼런스콜에 참석했다.


그렇게 아빠와의 마지막 48시간은 끝이 났다. 25년동안 병원에 누워 생살을 뜯어내는 석션도, 손끝이 까매지도록 찔러대던 당뇨 검사도, 입으로 못 먹은지 11년째라서 배에 구멍을 뚫어 죽을 넣던 뱃줄도 다 끝. 정말 끝이었다. 아빠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된 것, 그게 남은 내가 느끼는 슬픔보다 중요했다.


아빠가 더 이상 육신의 몸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먹고 즐기고 먼저 간 부모님, 형제, 친구들과 재회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고 위로하고 있다.


아빠 생전에 내 첫 책을 출판하고 아빠에게 바치고 싶었는데 이제 영영 그건 못하게 됐다. 천국에 다녀왔다는 누군가 그린 그림에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여기 남은 사람들이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빠가 자랑스러워 하는 딸로 살고 싶어 평생 애썼는데 아빠가 가신 후에야 알았다. 아빠는 내가 어떻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아빠가 내 아빠여서 나는 너무 행복했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너무 소중해. 사고 후 그 힘든 고비 고비 잘 넘겨주고 우리와 2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줘서 너무 고마워. 너무너무 사랑해. 아빠, 즐겁게 지내다가 우리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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