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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러댄 Aug 16. 2019

별일 없이 산다

쉬워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

"근무 못한 날짜만큼 월급 무급으로 처리될 거예요."


내가 들은 첫마디였다. 괜찮냐는 말도, 몸상태는 좀 호전되었냐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돈 줄 수 없으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통보 식의 날카로운 멘트에 잠시 눈 앞이 어질 해졌다. 내가 이런 회사에 1년 반씩이나 몸담고 있었단 말이야?


당연히 일주일씩이나 입원해 있었으니 돈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워낙 바쁜 시기에 갑작스레 자리를 비웠으니 죄송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 바쁜 일 때문에 내 몸이 이렇게나 빨리 망가져 버린 것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나는 2월에 대학 졸업장을 받자마자 4월 초에 바로 취업했다. 22살에 첫 직장에 입사한 것인데, 분야가 분야인 만큼 빠른 출근과 늦은 퇴근, 당연히 없는 야근수당 등 내 업무 환경은 열악하리만치 '개'열악했다. (필자는 지금까지 마케팅 파트에서 일하고 있다.) 게다가 대행사를 다녔으니 '을'로써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했다.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까야했다. 나에게 내 생활이 있을 리 만무했다. 퇴근은 또 다른 업무의 연장이었고, 체내에는 인스턴트만 쌓여갔으니 몸이 성한 게 이상했을 터. 갑자기 상태 좀 알아달라는 듯 온갖 증상이 한 번에 겹쳐서 오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 하는 직장인이면 누구나 다 온다는 손목 터널 증후군부터 생리 불순은 기본이고, 피곤함과는 별개로 불면증을 앓아 3일에 2시간을 채 못 자고 출근하는 날의 반복이었다. 한 마리 좀비가 되어 회사와 집만 오가고 있으니 이러다 고독사 하겠다 싶었다. 이렇게 죽으면 나는 누구 옆에 묻히려나. 답이 없었다. 


그러다 일이 제대로 터진 날이 있었는데, 그때가 내 나이 22살의 일이었으니 딱 5년 전 이맘때였을거다. 한창 제안서며 기획안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피곤해서 '생리'의 개념도 없어진 채 그냥 혈이 나오면 하고 아니면 이번 달은 건너뛰나 보다 하던 때였다.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떴는데 침대 시트며 속옷이며 범벅이 되어있는 거다. 양이 많은 거 치고 너무 많은데, 뭔가 이상했지만 바삐 씻고 억지로 출근을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끼니 때우듯 업무를 보고 있는데, 아랫배가 갑자기 미친 듯이 아려오면서 처음 느껴보는 아픔에 아무 말 없이 화장실로 달렸다. 아뿔싸 이게 뭐야, 혹시 몰라서 오버나이트를 하고 온 게 천만다행일 정도였다. 이건 생리가 아니라 하혈이었다. 그것도 매우 심각한 양의 하혈. 입에서 나지막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일단 급하게 생리대를 갈아두고 다시 일을 하다가, 결국 나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로 달려가 대형 오버나이트를 갈아치워야 했다.





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머릿속에 비상 깜빡이가 정신 사납게 돌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내일 반차를 써도 될지를 걱정하고 있는 나를 죽이고 싶었다. 이성을 되잡고 대표님에게 우는 소리를 해가며 겨우 반차를 얻어, 다음 날 병원으로 출근했다. 


그 길로 나는 옷가지를 챙길 여유도 없이 바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병원의 권유였다. 돌아가지 말고 지금 바로 입원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충분히 들을 새도 없이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정확한 병명은 없었다. 다만 극심한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뭐라도 치료하고 나서 돌아가라고 했다. 저 바로는 입원 못하는데요, 일단 회사에 이야기하고 나서 일정 맞춰서 입원날짜 다시 잡으면 안 될까요. 약간의 어이없다는 투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하셔도 되긴 하는데 꼭 그렇게 하셔야 되겠어요? 나는 그 심각한 상황에서 웃음이 먼저 나왔다. 고작 얻은 게 입원 기록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입원했다. 맹물도 이것보단 달 것 같은 싱거운 병원밥을 삼시세끼 먹으며, 언니가 가져다준 노트북으로 병실 베드에 앉아서 일 처리를 하며. 업무 위치만 달라진 일주일이었다.



다행히 하혈은 멎었고, 퇴원 다음날 바로 회사에 복귀했다. 동료들은 내 자리로 한 명씩 오가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냐고, 하나같이 똑같은 말과 똑같은 음으로 물었다. 안 괜찮지만 어쩌겠어요, 괜찮아요. 앞의 말은 자체 묵음 하고 웃으며 괜찮다고 기계처럼 대답했다. 그때, 대표가 날 대표실로 불렀다.


그러고서 의자에 앉자마자 들었던 말이다. "근무 못한 날짜만큼 월급 무급으로 처리될 거예요."


별일 없이 산다



이런 우라질, 니미럴, 진짜 갖은 욕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진 않았다. 네, 짧은 대답을 자리에 앉혀두고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그 길로 나는 퇴사했다. 퇴사하기까지는 정확히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최소한 인간의 도리는 지키자 생각해서 인수인계까지는 마치고 나왔다. 양 손 가득한 짐을 싸들고 나오는 길에 들이마신 공기가 달았다. 동시에 씁쓸했다. 


첫 사회생활에 뛰어들어 일을 온몸으로 흡수하다시피 하며 그렇게 다녔던 회사의 끝은 생각보다 허무하고 별 게 없었다. 밤늦게까지 일을 척척 처리해 내는 사람들을 보면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보니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이외의 것들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겨우 퇴근하기 바쁘고, 출근을 위해 곧장 침대로 향하기 바빴으니까. 나는 하루 종일 바쁘기만 했다.


그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바로 장기하와 얼굴들 <별일 없이 산다>였다. 돌이켜 보면 악에 받혀 치열하게 사는 삶 말고, 진짜 말 그대로 별일 없이 살고 싶었나 보다. 의무적으로 저 노래를 들으며 희망했다. 곧 오겠지, 나한테도 별일 없이 사는 날이. 아직도 가끔 일부러 찾아 듣곤 한다. 잊지 않기 위해, 때로는 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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