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한정.
그리 풍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 첫째도 딸, 둘째도 딸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낳고 기뻐했는지, 조금은 난감해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입이 셋에서 넷으로 늘어나는 과정에서 나는 어쩌면 환영받기 이전에 걱정거리만 안겨준 못난 딸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여튼, 그 마지막 아이의 배를 어떻게든 불려주기 위해 나의 부모님은 더 바쁘고 단단해져야만 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아니다.
일을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쉰다는 것은 곧 가난의 대물림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부모님은 바쁜 맞벌이 부부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내가 걸음마를 떼고, 입학식에 가고, 첫 교복을 사고, 그 교복을 영원히 내려놓는 날이 이어지는 내내. 그럼에도 많은 것을 베풀고 또 해주셨다. 남들 다 신고 입는 나O키나 노O페이스는 아닐지라도 계절마다 새 옷 하나씩은 꼭 사주셨고, 취향을 저격한 영화가 나타나면 주말 아침잠을 포기하고 영화관으로 함께 달려가 주셨다. 차고 넘치진 않아도 많이 부족하지 않게, 필요한 것엔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품은 채. 나는 그렇게 곧게 자랐다.
밥 먹자.
우리 엄마는 모든 면에서 내게 헌신하셨지만, 그중 정말로 최선을 다하셨던 건 바로 '집밥'이었다. 직접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직종을 업으로 삼으셨기에 많이 고된 하루였을 테지만, 엄만 퇴근 후 양손 가득 장을 봐온 뒤 재료들로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곤 하셨다. 우린 외식도 잦지 않았다. (물론 주머니 속 사정이 여의치 않음도 한몫했을 것이다.) 손 맛 좋기로 유명한 전라도 출신의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밖에서 사 먹는 음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달려가면 항상 현관에서부터 갓 지은 고슬한 쌀밥 내가 풍겼다. 나는 후다닥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 앉아 밥을 달라며 아우성쳤다. 엄마는 옷부터 갈아입고 오라고 가볍게 핀잔했다. 피이- 하며 방에 들어가서 짐 정리를 하고 있자면 엄마가 살며시 문을 열고 말한다. 다 되었으면 밥 먹자.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엄마의 밥 먹자는 말로 우리 가족의 진짜 하루는 시작된다. 반찬을 하나씩 집어먹으며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달큰한 대화와 얼큰한 김치찌개가 입 안에서 섞여 최상의 맛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종알거리다 보면 어느새 배는 남산만 하게 불러있다. 그렇게 다들 기분 좋은 배부름을 안고 각자의 방으로 간다.
1시간 남짓한 식사 시간을 위해 엄마는 퇴근 후에도 일을 한다. 서둘러 재료를 손질하고,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마법의 밥상을 차려둔다. 우리 가족의 법칙은 식사시간에 TV도 금지, 휴대폰도 금지였다. 그 시간만큼은 엄마가 해 준 집밥을 먹으며 하나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내일도 힘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땐 잘 몰랐는데, 떨어져 사는 지금이 되어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다만 엄마가 내게 해줄 수 있었던 가장 자신 있었던 것은 '집밥'이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넘치게 잘해줄 수 있었던 것,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엄마의 위치에서 가장 최선을 다해주었던 건 다름 아닌 집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