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 가며 공부했건만, 머리 좋은 친구는 게임만 해도 성적이 나보다 좋다. 평일을 회사에 바치며 일해도,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난 친구의 페라리는 살 돈은 없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하나 있다. '시간'이다. 그렇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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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간마저도 사람마다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들 저마다의 템포로 살아간달까.
난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강해서, 새로운 환경에선 눈치를 자주 봤다. 그래서 타인의 감정선을 보다 빠르게 파악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이 집단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내 성격은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선배에게 잘 보여야 동아리에서 힘이 생기는지, 어느 상사에게 잘 보여야 회사 생활이 편해지는지 눈에 보이니까. 그렇게 어느 무리에서든지 소위 말하는 '인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피곤했다. 늘 인간 레이더를 켜고 사는 건 피곤한 일이다.
나의 시간은 서양음악에서는 '프레스토', 국악에선 '휘모리장단'과 같았다. 마치 전시상황의 군인처럼 매분 매초를 주변을 파악했다. 주변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고, 어딜 가나 인정받길 원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주변에선 이런 나를 참 독한 놈이라 하기도 했다. 이런 내게 시간은 무진장 빠른 친구였다. 오늘 주어진 24시간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하는 데드라인이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매분 매초를 노력하며 살아가는 게 정답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성격은 치명적인 '독'으로 다가왔다. 집단내의 모든 사람의 감정선을 파악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아는가? 머릿속으로 24시간 레이더를 띄워야 한다. 이 레이더는 반경 10m 이내의 모든 움직임과 대화를 포착한다. 지금 내 앞의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등 뒤에 있는 선배의 대화를 들으며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 고 싶다면, 유튜브 영상을 두 개 틀어두고 5분간 보면 된다. 나는 이렇게 에너지 소모가 심한 레이더를 24시간 틀어두고 산다.
내 사진첩에는 과거 사진이 거의 없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뜻깊은 경험을 했지만, 이를 기록으로 남길 생각은 못했다. 매 순간을 쳐내야 하는 숙제로 생각했기에, 지금을 즐기지 못했다. 그래서 몇 년 전을 돌이켜보며 뭘 했는지 기억하려 해도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늘 앞서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 달 전, 큰 마음을 먹고 비싼 카메라를 질러버렸다. 조급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내 삶을 되찾기 위해서다. 사진기를 들고 바라본 내 동네는 그동안과는 달랐다. 7년간 살아온 이 동네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일 줄이야! 등굣길에 지나쳤던 학교의 정원은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고, 바쁘게 걸어 다녔던 골목길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나는 오늘부터 일상에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천천히,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잠시 뒤면 사라지지만, 그 순간들이 모여 내가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