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에게.
알록달록 온통 원색이 가득한 신당 안에서 너는 하얀 소복을 입고 앉아 있었지.
나는 이 책을 만지작거리며 흰 소복을 입고 머리를 야무지게 쪽진 채 앉아 있던 너의 뒷모습을 상상했어.
나에게 이제부터 '흰 것'은 이것이다, 흰 색깔을 보았을 때 늘 처음 떠올리는 장면은 바로 너의 뒷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펴들었어.
내가 소개해주고픈 소설의 제목은 『흰』이야.
간단히 말하면 '한강'이라는 작가가 '흰 것'에 대해 쓴 소설이지. 안개, 배내옷, 젖, 흰 도시, 흰 개…
그렇게 흰 것들에 대한 단상을 담아냈어.
책을 잘 읽지 않는 너에게, 오직 몸으로 세상을 부딪고, 몸으로 삶을 알아가는 일에 더 익숙한 네게 나는 문득 이 책을 읽어보라고 쥐여주고 싶어졌어.
너도 나처럼 '흰 것'을 떠올리면 내림굿 받던 그날의 소복입은 너를 기억할까?
사랑하는 친구이자 동생이 무당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인데. 내가 아무리 바쁘다, 바쁘다 해봤자 고작 인간의 일인데. 또 하나는 요란한 신령님들 그림 보며 꽹과리소리 장구소리 징소리 지겹게 듣다보면 혹여 나도 좀 정신을 차릴까봐. 혹은 아예 정신을 못 차릴까봐. 그런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의정부의 한 신당을 찾았던 날이 생각나.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변한 공간 속으로 행인들이 자신의 남루한 시간을 덧대며 걸어들어갔다. 그녀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라질 ― 사라지고 있는 ― 아름다움을 통과했다. 묵묵히.”
- 「흩날린다」, 99p
갑자기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언니, 나 신내림굿 받아.”라는 말이었어서
나는 감히 너에게 요즘의 내 근황을 빌어 하는 징징대는 소리의 징 자도 못 꺼냈지.
그 말을 하기까지 네 입은, 늘 빨갛던 입술은 얼마나 하얗게 말라 있었을까.
11월의 추운 날, 눈 내릴 것만 같던 흐릿한 날씨에 소복 하나만 입은 너는 생각보다 담담했어.
그리고 등을 돌리며 심란한 표정을 짓는 네 부모님을 뒤로 하고 묵묵히 네 운명을 받아들였어.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 「넋」,109p
신나게 내림굿을 받던 너는 갑자기 내게 와 말했어.
“혼자 헤매지 말고!”
신기하달까, 순간 두려웠달까.
네 신엄마 또한 내게 “그 울음 누가 대신 울어줄까. 그 자존심으로 지금까지 견뎌왔구나.” 하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너에게 하는 말로 듣고 싶었어.
앞으로 너는 다른 이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어야 하는 사람이 되는 거잖아.
신나게 굿을 하던 너는 점심을 먹고 다시 옷을 갈아입을 때 나에게 말했지.
“언니, 나 작두탈 때 발에 피나면 어떡하지? 너무 무서운데.”
시뻘건 피가 흐르는 네 발바닥을 상상해봤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자꾸만 네 소복이 빨간색으로 물이 드는 느낌이었어.
무당이 된 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네.
알록달록한 신엄마의 옷을 대신 입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작두에 올라갔던 너를 생각해.
죽은 자들을 위해, 너의 신을 위해, 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초를 밝힐 너를 생각해.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 「하얗게 웃는다」,78p
그날 너는 가장 흰 사람이었고 하얗게 웃는 사람이었어.
무당이라는 길이 고단하다 말하는 것은 내 주변의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대신 새벽마다 일어나 하얀 초를 켜고 기도하며 어쩌면 평생 살아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위에 인용한 문장을 네 식으로 바꾸고 싶어.
“박서아는 하얗게 웃었지.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서아야,
신당에서 외로이 보낸 2년은 어땠니.
가끔씩 문자는 주고받지만 나는 한 번도 이 이야기를 묻지 못했어.
굳이 해보지 않아도 이 책의 어떤 페이지를 찍어 네게 보낸다면 네가 지을 표정과 취할 행동들이 눈에 훤해. 바로 나한테 전화를 걸 테고, 안 그래도 목소리 큰 애가 “뭐야 언니? 이거 무슨 책이야? 이거 근데 소설이야 뭐야?” 하고 내 귀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치겠지. 커다랗고 부리부리한 눈에는 눈물도 조금 고여 있겠지. 왜냐면 저 이 책의 문장들은 어쩌면 네가 지금 견디고 있는 현실 그 자체고, 두 번째는 네가 살아가야 할 순간이니까.
네가 춤을 추었던 시절, 한복을 입고 무대에서 춤추는 사진 한 장을 언젠가 내게 보여주었던 적 있었지. 너의 표정, 네가 입었던 알록달록한 한복 색깔, 정지된 몸짓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언젠가 아이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던 너의 꿈도.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냐는 너의 체념도.
그치만 네가 지금 무당을 한다고 해서 네가 한때 추었을 아름다운 춤의 이미지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야. 네가 꾸었던 꿈은 하얗게 성에가 낀 얼음 속에, 여전히 투명하고 순백한 모습으로 생생히 간직되어 있을 거야. 여전히 그 에너지를 간직한 채, 그 색채를 간직한 채 말이야.
겉으로는 언제고 삶 따위 무심히 등질 것처럼 굴지만, 너는 안갯속 같다던 네 삶에서 한순간도 내려오거나 뒤로 물러나길 선택한 적 없다는 걸 알아. 당장 네 앞의 막막함에 치를 떨면서도, 절벽 끝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잖아.
너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용기 있는 사람이야. 난 알지. 너는 용기라는 단어를 알기도 전에 이미 용기라는 본능을 내재하고 태어난 아이라는 걸.
올해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넋을 위해 기도했니?
얼마나 많은 넋을 위로했니?
눈같이 새하얀 침대 안에서 졸린 눈으로 있던 너를 다시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왠지 이 책 곳곳에 네가 살아숨쉬는 것만 같아.
잠들지 못하는 밤에, 수면제를 먹는 대신 머리맡에 이 책을 놓고 생각날 때마다 아무 곳이나 펼쳐 후루룩 넘겨. 그리고 맘에 드는 한 개의 단어, 한 줄의 문장, 혹은 하나의 이야기를 골라서 눈을 감고 되새겨봐.
이 책을 덮고 난 뒤 아주 잠시나마 무언가 아름답게 반짝거리다 사라지길. 그것이 비록 눈물일지라도 그 찰나를 네 하얀 소복에 묵묵히 떨굴 수 있기를, 그로 인해 네가 저편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뗄 수 있기를,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깨끗한 진심으로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