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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성 Nov 21. 2023

백마리 개, 언어의 부재

18. 언어 없이 대화한다.

구석을 바라보는 개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쥐를 기다린다. 반나절은 저 상태로 꼼짝하지 않는다. 소리를 내고 인기척을 던져도 그대로다. 정말 다행이다. 내가 가둔 세상에서 이리 신경 쓸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말없이 건네는 눈빛, 슬며시 들어 올리는 손짓으로 통한다. 주어를 생략해도 알 수 있고, 서술어 없이도 의도를 전달한다. 굳이 따져 목적어만 얘기해도 대화는 이어진다. 내 고향 부산에서는 ‘어’ 라는 한 글자로 서너 줄 대화는 거뜬하다. 약간의 끄덕임과 손짓을 더하면 긴 대화도 가능하다. 개와 나 사이에도 그렇다.


말없이 말더듬이로 3년을 살았다. 언어로 물어오는 이는 언어로 된 답을 원했다. 종이와 팬을 꺼내는 동안 뒤돌아선 그들에게 답할 길이 없었다. 나에 대한 배려였을까?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만 던지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난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이지만 늦게서야 들어서는 햇살에 잠시 앉았다. 백마리나 모여 있지만 조용하다. 그보다 울어대는 새소리가 시끄럽다. 사료 그릇 가장자리에 둘러앉아 사료를 쪼아대는 새들을 개들은 바라만 본다. 네까짓 게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는 표정이다.




지어준 이름이 100개이지만 부르는 이름은 없다. 손짓에 달려오는 개들 중에 고르고, 눈빛이 마주할 때 진심을 전한다. 햇살을 따라 자리 잡은 개를 지켜보고, 구석을 찾아 웅크리는 개도 바라본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보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찾는다. 개들과의 대화는 듣는 것부터 시작이다.


짐작한다.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기에 짐작하는 것이 전부이다. 정확도가 떨어질 리 없다.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끼리도 알아듣지 못해 오해가 생긴다. 오히려 개와의 대화는 오해가 없다. 언어가 있어도 표현하지 못할 진심을 찾아낸다. 설득이라는 과정이 없기에 여기의 대화는 꽤나 직설적이다.


조심스럽다. 대화가 길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지레 짐작할 뿐이다. 무엇이 맞을지 단번에 알 방법이 없다. 순번을 정하고 하나씩 던져본다. 반응이 없으면 다음 짐작으로 넘어간다. 서툴더라도 섣불러서는 안 된다. 개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드는 것은 대화가 아니다.




대화의 부재는 절차의 생략이다. 벨소리로 식사기간을 각인시켜 개가 침을 흘리게 했다. 파블로프의 실험이다. 현대 애견훈련의 시초가 된 실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개에게 질문을 던지고 정해진 답만 듣는다. 기대한 답이 아니라면 주저 없이 훈련의 부재를 떠올린다. 개와 대화는 그때부터 생략이었다.


개의 언어는 몸짓이다. 몇 가지 동작에 의미를 새겨 넣은 카밍시그널은 언어가 아니다. 참고자료가 표준국어사전이 되어버렸다. 몸짓을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책상에 앉아 손짓 발짓을 하더라도 결국 집중하라는 말 밖에 듣지 못해서일까?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는 유행 속에서도 다양한 대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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