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써보고자 마음먹다.

그 후로 다시 3년이 지났다.

by 이현

2021. 10. 17. 의 일기(이자 다짐)


어디든 글을 적어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자기애는 약간 편인데도, 흘러가는 생각들과 기억들이 아까웠다.


퇴근 후의 피로감에 치여, 무엇이든 끄적여보기까지.

미루고 미루기를 2년.

출근하기 싫다는 말을 열댓 번쯤 반복하는 일요일 저녁에,

잠을 청하려고 마신 '따뜻한 우유+시나몬 파우더'에 어쩐지 동기를 얻어

오 분여 만에 키보드 앞에 앉아 글을 쓰고자 마음먹다.


동생과 두 달째 함께 지내고 있다.

식료품은 대부분 온라인으로 배송 주문하지만, 이따금씩 같이 장을 보러 간다.

대부분은 생활비를 벌어오는 내가 결제를 한다.


회사 손님으로 왔던 아저씨가 했던 말이 요즘따라 종종 생각났다.

"나는 집에서 밥만 먹는 사람이라 쌀이 많이 필요해."


종일 집에만 있는 동생이 먹을 게 없을까 싶어 종류별로 고기를 채워놓고,

동생이 자주 쓰는 요리 재료는 떨어지지 않게 사두려고 한다.

그리고 더불어 '기분 쇼핑'을 할 때가 있다.

뭐라 명명하기가 애매해 겨우 얻은 단어다.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싶은 A의 마음

+그 마음을 눈치챈, 결제카드를 쥔 B의 배려

+물건을 사자는 B의 부추김'

= 기분 쇼핑


이렇게 장바구니에 들어가게 되는 물건들이 있다.


시나몬 파우더가 그랬다.

커피에 우유 거품을 올리고 그 위에 시나몬 파우더를 뿌려보고 싶다고, 동생이 몇 주 전 얘기 했다.

그러면서 '굳이 사고 싶지는 않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기억했다.


어제 한강으로 낚시를 갔다 찬바람을 잔뜩 맞고 돌아와, 둘 다 목감기 기운을 느꼈다.

나는 배숙을 만들겠다고 선포했고, 동생은 귀찮다 만류했으나.

배숙과 커피의 교집합에 시나몬 파우더가 있어,

시나몬 파우더를 사는 김에 배숙을 하기로 했다.

무슨 논리인지.


아무튼 그렇게 '기분 쇼핑'으로 얻어진 시나몬 파우더다.


사실 기분 쇼핑이라는 단어는

월급날이 가까워 오는 보릿고개에, 동생의 지갑을 빌려 장을 볼 때 생각해 냈다.

평소 장을 보러 가면, 이것저것 주워 담으려던 나를 말리는 동생을 보며

'원래 충동구매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다. 필요한 것만 사는 스타일이네.'라고 스쳐 생각했었다.

내 월급날을 며칠 앞둔 보릿고개에 동생의 카드를 들고 장을 보러 갔더니,

동생은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잔뜩 골라 담았다.

'얘가 나를 위한 '기분 쇼핑'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더랬다.


아무튼 그렇게 얻어진 시나몬 파우더를

일요일 밤 11시, 데워진 우유에 거품을 내고 그 위에 팡팡 뿌려 마시며.

글 쓰기를 시작하고자 마음먹었다.


2024. 10. 21. 일기(같은 또 다른 다짐)


위의 일기 같은 혹은 다짐 같은 글을 쓰고 만 3년이 흘렀다.

신기하다. 어떻게 비슷한 날짜에 다시 글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을까.

가을바람에 뭔가 있나 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그 선선함에 나를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나 보다.


그 3년 사이.

내 동생은 부모님이 하던 일을 물려받으려 고향으로 내려갔고,

나는 나만의 가정을 이루어 남편과 10개월 된 작은 딸과 함께 하루하루를 부지런히 지내고 있다.


여전히 흘러가는 기억이 아까웠다.

소중한 것(작은 나의 딸... 그리고 남편!)이 생겨서,

보편적이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들(결혼, 육아...)이 쌓여서

그리고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은 아까운 추억들이 하나 둘 흩어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래서 남편에게 내 컴퓨터를 갖고 싶다 졸랐다.

'노트북 화면은 너무 작다. 앉아 무언가를 타이핑할 맛이 나질 않는다.' 주장했지만.

컴퓨터라도 새로 마련하면 지출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자리에 앉아 몇 자라도 끄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주 얄팍하고도 뻔뻔한, 컴퓨터를 갖고 싶은 욕망에 대한 변명이었다.


그렇게 남편을 설득해 컴퓨터를 마련하고도 일주일은 그냥 방치해 뒀다.

사준 남편 보기가 민망해서 신나게 컴퓨터를 탐색해 보는 척했으나

주부에게 육아퇴근이란 그저 릴스나 뒤적거리는 도파민을 원하는 상태가 될 뿐

생산적인 것을 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법이다. 하하.


내 등을 떠 밀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상황에 던져놓으면 어쨌든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는 '나'를 안다.

그래서 필라테스건 P.T. 건 몇 달 치를 끊어두고 억지로 내 발을 향하게 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비슷한 모양새로 브런치스토리에 작가 신청을 했다.


메모장에 적어둔 글감, 마음속에 혼자 궁시렁 풀어냈던 이야기는 한가득이나,

어딘가에 적 어둔 건 몇 자 되지도 않는 내가.

또다시 내 발을 향하게 할 무언가를 찾아 시도한 것이다.


내가 뭘 쓰겠어.

아냐 그래도 뭔가 시도해 볼 만하잖아?


요 두 문장을 이틀 동안 반복하다, 맥주 한 병 콸콸 마시고 용기 내어 작가 신청을 했다.

오모나 웬걸.

한번 써보시게~ 하는 계시를 받았다.

아니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어플 알림을 받았다.

얼떨떨하면서도 도파민이 콸콸 넘치는 기분에 한 시간을 잠투정하는 아가를 기쁜 마음으로 재우고

남편이 큰맘 먹고 마련해 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잘할 수 있겠지?

아니... 꾸준히 노력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