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 넘어가는 열이 나 병원을 찾았고 아들은 독감 확진을 받았다.
미루지 말걸.
바쁘다는 핑계와 워낙 건강 체질이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접종을 미뤘더니 덜컥 걸려버렸다.
하교 후 만난 아이는 이미 열이 있었고 부랴부랴 병원에 간 시간은 겨우 접수 마감 직전.
그날의 가장 마지막 진료를 보고 독감 확진이 되었으니 효과 빠른 수액을 맡고 싶다고는 할 수 없었다.
타미플루만 처방받아 집에 와서는 약을 먹고 아이는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감사하자.
약 먹고 잠든 지 1시간 만에 열은 38도 선이 무너졌고 3시간 후 완전히 정상 체온이 되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열이 나면 머리로 열을 발산시키는 아이다.
그래서 열이 내려갈 때 머리서 땀이 나면서 머리카락이 머리 감은 수준으로 젖어버린다.
머리카락은 푹 젖었지만 숨소리가 편안해진 것을 보고야 안심이 됐다.
토요일 아침 8시.
13시간의 긴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눈 뜨자마자 '배고파'를 시전 한다.
미리 준비해 둔 비빔밥에 계란프라이를 두 개 얹어 맛간장(고추장 들어간 비빔밥보다는 간장베이스를 좋아하는지라)과 들기름을 휘휘 둘러주었더니 꽤 많은 양을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먹어버린 녀석.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평소보다도 더 잘 먹는 걸 보니 완전히 털어냈는가 보다 싶다.
기특해라.
자기가 생각해도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모양이다.
떡진 머리를 하고서 '독감에 걸리고도 학교 한 번을 빠지지 못하다니' 탄식하는 것 마저 귀엽다.
밤사이 간간히 아이가 괜찮은지 들여다보느라 잠을 설친 아침.
기왕 일어난 김에 평일에 못한 청소, 어젯밤 못하고 잔 설거지 그리고 건조에서 미처 꺼내지 못한 다 마른빨래 정리까지 이어지니 오전이 순삭되어 버렸다.
쉴래.
냉큼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머리맡에 둥지를 만들어 몸을 뉘었다.
온몸이 고되도 아들의 독감이 초기 진압되어 쉴 수 있을 안도감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였다.
남편의 목소리가 먼저다.
"아들, 오늘부터 11월이야. 11월이 무슨 달인 줄 알아? "
11월이 무슨 달이냐고 물었어?
정말?
11월은 말이지~ 하고 나는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11월이 어떤 달인지 벌써 준비하는거야?
왜 기대하게 만드는 거야?
ㅋㅋㅋ
아들의 대답이 이어졌다.
"11월? (잠시 생각하더니) 누군가 태어날 달? "
"으그, 아니거든. " (라고 아주 강한 부정을 하는 남편)
"그럼 수능 보는 달? " (우리 부부는 고등학교 교사다. 이 집에서 태어나 평생 고등학교 교사 부모 밑에서 자란 아들에게 수능이란 애미애비가 새벽에 나가 종일 감독 또는 업무를 보고 너덜너덜해진 후 귀가 하는 날이라는 걸 누적 데이터로 인식하는 날이다. 또한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은 학교 선생님들 중 일부가 감독관으로 착출되어 학교는 쉬는데 엄마아빠는 없는 아주 축복받은 날이라 연초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그런 날이 된다.)
"그런 것도 있지만 정답은 아니지. " (대체 뭘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확신에 차고 난린지 내 귀는 초집중 중이다.)
"바로바로 (입으로 두구두구 효과음과 손으로 식탁을 두들기는 오두방정 콜라보가 연출된 후에야) 광군절이 돌아온다. 준비해야 하는 것이야. 음하하하하"
"너 나가"
아주 조금 한 기대가 깨지니 부아가 치밀어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가고야 말았다.
구차하기 싫은데 이미 늦었다.
놀란 아들이 안방으로 빼꼼 얼굴을 디밀었다.
"너 말고, 니 애비"
아들이 씩 웃고 안도했다.
그리고는 영문을 몰라 황당해하는 애비에게 상황을 설명한다.
"아빠, 11월은 누군가가 태어난 달이 맞아. 그게 바로 엄마야. 그리고 아빠 나가래. "